포천시 신북면에 있는 한음 이덕형을 배향한 서원이 용연 서원이고 가산면에 있는 오성 이항복을 배향한 서원이 화산 서원이다. 옛날에는 한강 이북을 한양 한강 이남을 한음이라 했었다. 이덕형은 광주 이씨이다. 광주 이씨들의 선산은 강동구 암사동 고덕산 자락에 있다. 옛날엔 그 곳도 광주군이었다. 이덕형의 호 한음은 한강의 남쪽 즉 광주에서 딴 것이다. 이항복의 호는 백사이다. 흔히 오성으로 알고 있는데 오성은 호가 아니고 작호이다.
이항복은 임진 왜란 때 병조판서가 되어 세운 공으로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었다. 임진왜란때 조선군의 총사령관은 실질적으로 이항복과 이덕형이었다. 둘이 번갈아 가며 병조판서를 하면서 조선군을 총지휘했었다.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것도 이덕형과 이항복이었다. 그리하여 호성 공신이 되었다. 부원군을 왕의 장인으로 만 알고 있는데 원래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봉하는 작호이다.
대개 그 사람의 고향이나 본향을 따서 작호가 주어진다. 이항복은 경주이씨이다. 경주의 남산을 옛날엔 오성산이라 했단다. 매월당 김시습이 쓴 최초 한문 소설 금오신화도 경주남산에 관련된 신화이다. 오성산이나 금오산이 모두 경주 남산인 것이다. 저 때 오자는 자라 鰲자이다. 용연은 용이 사는 못이다. 옛날엔 서원 주변에 용연이란 못이 있었단다. 화산서원 뒤에는 닭벼슬을 닮은 화(성)산이 있다. 두 서원의 이름은 자연 지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연서원은 마을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고 화산 서원은 화성산 산자락에 세워져 있었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대개가 비슷하다. 홍살문,외삼문,동재와 서재,강학당, 내삼문 사당순으로 배치 되어 있다. 용연 서원과 화산 서원도 마찬 가지였다. 용연서원은 동재를 숭문재 서재를 수연재 강당을 경모당이라하고 있었다. 화산서원은 동재를 동강재 서재를 필운재,강당을 덕인당이라 하고 있었다.
필운재는 서울 서촌에 있는 배화 여고 안에 있는데 백사가 태어난 곳이다.배화여고는 육영수 여사가 나온 학교이다. 용연서원은 6.25 때 불타 사라졌다가 1970년대 이후에 다시 지어졌단다. 서원 근처에 있는 교육관은 금년에 지어져 아주 산뜻 했다. 화산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71년에 복원 되었단다. 사당북쪽에는 당시 훼철 될때 위패를 묻어 두었던 자리에 매안지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이 이항복과 같은 경주이씨라서 화산서원에 후원을 많이 했었단다.그래서 그런지 건물들이 번듯했다. 용연서원엔 한음 말고도 문간공 조경이란 또 한 분이 더 배향되어 있었다.
조경이란 존함은 나도 처음 들어본다. 사액 서원에 배향된 걸 보면 유교적으로 훌륭한 분인가 보다. 판서와 찬성직에 까지 오르고 숙종 때는 청백리로 선정되었단다. 뿐만 아니라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기 까지 했단다. 종묘에 배향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이덕형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외교관으로 활약했다면 조경은 병자호란 때 일본에 원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활약한 분이란다.한음은 원군을 불러 오는데 성공했는데 용주는 실패했다. 용주는 당시 김상헌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척화파란다. 나중에 두 사람은 청나라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단다. 이덕형에 대한 소개는 어제 쓴 글에서 소개했으므로 오늘은 생략 한다. 이 용연서원은 흥선 대원군이 전국의 천여개의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훼철할 때도 살아 남았단다.
당시 강원도에는 두개의 서원이 살아 남았었는데 지금은 그 두개 마저도 사라졌단다. 포천시에는 서원이 용연서원 말고도 이항복 한 분만 배향한 화산 서원과 주벽 박순외 5명을 배향한 옥병서원 그렇게 서원이 3개나 있다. 저런 걸 보면 포천이 조선시대 땐 학문적으로 위상이 높았나 보다. 그런데 흥선 대원군이 용연 서원만 남겨 두었단다. 오성은 포천이 선대 고향이고 한음은 포천에 외가가 있다. 그런데 왜 다 같은 사액 서원인데 용연 서원만 남겨 두었을까? 용연 서원 사무국장 말에 의하면 오성군을 배향한 서원은 함경도 북청에도 있어서 그랬단다.
북청은 오성대감이 인목 대비의 폐비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유배간 곳이다. 오성 대감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오성군의 시신을 북청에서 포천으로 옮겨다 장사를 지냈단다. 오성과 한음은 선조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었다. 광해군 시절에는 원상이었다.원상은 왕도 함부로 못했었다 그래서 사약은 내리지 못하고 유배를 보냈을 것이다. 한음은 영창대군의 사사를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당하여 낙향 했었다 . 그일로 상심한 나머지 실의에 빠져 있다가 죽었다. 한음과 오성은 죽을 줄 알면서도 반대 했단다. 숙 종 때 박태보도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다 곤장 백대를 맞고 귀양가다가 노량진에서 죽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유교윤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 있다. 용연 서원에 포천과 별연고도 없는 한음을 배향했을까? 백사 기념관 해설사에게 물었더니 오성과 한음이 절친해서 그랬을 거라고 했다. 자신없는 말투로 보아 백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한음에 대해선 잘 모르는 듯 했다. 용 연서원을 소개하는 소책자에 의하면 한음의 외가가 포천이란다. 한음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랐단다. 한음은 포천과 연고가 전혀 없는 건 아닌 것이다.
이번에 가보니까 용연서원은 신북면에 있었다. 신북면은 온천이 있어서 자주 왔었는데 용연서원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젊은 시절 포천엔 무척 자주 왔었다. 포천에는 신북 온천 말고도 김일성 별장이 있는 산정호수와 마의태자 전설과 억새꽃으로 유명한 명성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관광객들은 수정처럼 맑은 산정호수에서 봄 여를 가을에는 배를 타고 노를 저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탔었다.필자는 소싯적에 익힌 솜씨를 맘껏 뽑내곤 했었다. 명성산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정호수의 정경은 사시 사철 그림처럼 아름다웠었다.
鳴聲산은 울 명자 소리 성자를 쓴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쳤을 때 명성산이 소리내어 울었단다.저 산에 은신해 있던 마의 태자도 밤을 세워 대성통곡 했단다. 다음날 마의 태자는 마의를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 갔단다. 그 후 소식은 모른단다. 근디 경순왕은 왕건 보다 더 오래살았다. 그리고 명성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묻혔다.
포천의 동쪽을 병풍처럼 가로 막고 있는 백운산과 광덕산도 명산이다. 두산 사이가 백운 고개이다. 그 고개를 넘으면 강원도 화천군이다. 포천의 이동면에는 이동막걸리와 멍석 떡갈비가 유명해서 놀러 갈때 마다 식도락을 즐기곤 했었다.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이고 이덕형은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둘 다 금수저였다. 오성과 한음은 소싯적에 아주 개구져서 둘이 온갖 시망스런 짓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려서 같이 어울린 적이 없단다. 나이 차가 다섯살이나 나고 1580년 과거 시험장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조운제 님이 주신 카톡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