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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가 있지 않는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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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4 02:43
-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가 있지 않는다면
세상이 아주 어지러울 때 난리, 난리 해도 이런 난리 없다고들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가 이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볼 때의 저는 오히려 냉정하고 침착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냉정해지려고 하고 침착해지려고 합니다.
너무 난리 법석을 떨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저는 꽤나 교만하고
신앙적인 자존심이랄까 자부심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더욱이 수도자라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조금 다른 뜻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분노로 거리로 나설 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려,
특히 분노의 감정과 파괴적인 감정에 휩쓸려 나서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두려워 나서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가 나서야 하며
사람들이 절망할 때 그때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우리의 희망을 두고 믿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이게 나라냐?!’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이 세상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번번이 이런 지도자를 뽑을 것이고
나라는 이 모양이 될 것입니다.
이번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을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전 세계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설마설마했는데
트럼프를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인 히틀러를 뽑았듯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라도 이런 선출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정말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지,
복음의 가르침에 그 어떤 것보다 가치를 두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8년 전 그러니까 2016년에 제가 한 강론의 요약입니다.
수평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8년 전과 올해가 너무 똑같지요?
그래서 마치 올해 강론이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으셨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있지 않으면
이런 어리석음이 반복 또 반복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그 나라에 있지 않고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면 또 그리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느냐?”고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허튼소리나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와 있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고,
‘여기’에 있는데 ‘다른 어디’서 오는 것처럼 묻고 있으니 허튼소리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듯 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면 됩니다.
쉽지 않지요.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아예 제쳐놓지는 말아야 합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향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완성을 향해 차츰 나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 생활이고,
종말론적인 완성을 나이 먹을수록 살아가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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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늘 망설입니다. 좋은 책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딱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면,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선택합니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님께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집필하는 데만 무려 25년이 걸린 대하소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 암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르셨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연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필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토지’의 서문에 나오듯이,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면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쓴 글이기에 대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없이 자란 포도는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척박한 땅에서 자라야 스스로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진짜 좋은 포도주를 키우지 않습니까?
고통을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유익함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유익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에 좌절하고 실패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우리에게 모범을 주시는 주님께서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큰 고통이 부활의 기쁨으로 바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고통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희망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시지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에 맞춰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 때문에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 너머에 하느님 나라라는 큰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선물을 주십니다. 앞서 박경리 선생님께서 고통을 마주하면서 ‘토지’라는 대작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고통의 유익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마지막 날 주님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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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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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뭄이 들면,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찾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찾아낼 때까지” 찾으십니다. 곧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십니다.
그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이요,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만나면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기보다, 오히려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이요,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그분께 대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잃은 ‘양’과 ‘드락메’를 되찾은 후에 말합니다.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
그렇습니다. 이 비유의 정점은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되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던 까닭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쁘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 “기쁨”이 너무도 커서 결코 나누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이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먼저’ 우리를 찾으신 당신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드러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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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있으면 천국
대학 수학능력 시험일입니다. 모든 수고와 땀의 결실을 이룰 수 있길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 21장 3절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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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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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세상 종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실까요?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며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이곳 성지에 발령받고 지내면서 왜 주님께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지 조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봉안당에 들어오시는 분들을 위한 예식을 진행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의 삶을 마치신 분도 떠나보내는 가족들도 모두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라는 말이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어 내일이 없을 수도 있는 우리에게 내일 하면 된다고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용서도, 친절도, 나눔도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크게 생각하면 거창할 수 있지만 사랑은 작은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사랑은 한마디의 위로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따뜻한 손길 한 번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환한 미소 한 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말을 들려주시는 이유는 오늘을 사랑하며 살라는 주님의 진심 어린 충고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모든 시간 안에 사랑이 들어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안에서 우리는 오직 오늘만 사랑할 수 있으니, 오늘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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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만 맛있으면
뭘 함께 먹어도 맛있습니다.
물과 함께 먹어도 맛있습니다.
밥이 맛있다면 말입니다.
가끔 냄비 밥을 합니다.
살짝 불린 쌀에 물을 넣고 센불에 올립니다.
이내 냄비가 끓어오릅니다. 이제 중약불로 바꿔줍니다.
그때부터 저는 냄비가 내는 소리에 더 집중합니다.
기다림도 잠시 어느 순간 ‘탁탁탁’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약불로 10초 정도. 그 후 불을 꺼주세요. 그리고 뜸 10분.
이제 다 됐습니다. 밥이 맛있으니, 반찬이 뭐든 맛있는 식사가 될겁니다.
밥을 하다 보니 우리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요.
밥이 맛있으면 어떤 반찬이든 맛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늘 행복하고 기쁘다면
우리 삶 어느 곳이든 멋지고 즐겁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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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자>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자주 즐겨 외는 자작 애송이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요즘 만추의 단풍으로 아름답게 타오르는 대한민국은 어디나 하느님 나라 천국같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바라보는 불암산을 바라보며 외우는 자작 짧은 애송시가 기도의 계절, 10월, 11월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아무리 나눠도 계속 나누고 싶은 또 하나의 시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이미 익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현인들같습니다.
“옛 어른들은 항상 삼가고 번민했기에 오히려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다산>
당신 수의를 미리 마련해 놓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던 친지 옛 여러 어른들도 생각납니다.
“군자는 평온하고 너그럽지만, 소인은 늘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논어>
옛 군자라 할 수 있는,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선비들의 삶이 그리워 영조시대, ‘추사 김정희’를 능가한다는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박희병) 2300쪽에 달하는 양권의 방대한 책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옛 아름답고 깊은 전통과 너무 단절되어 있는 오늘날의 얕고 엷은 천박(淺薄)한 세태에서 초연하고 싶은 갈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기도 역시 생각납니다.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시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빛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평화가 되게 하소서”
끊임없이 솟아났던, 한마디로 제 인생자체가 주님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 때 언제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아 나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살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저에게는 매일 수도원 경내 산책이 성지순례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느님 나라의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 가지도 마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살 때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이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는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처럼’, 늘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삽니다. 산과 강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승들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영성이기도 합니다. ‘산과 강’이란 옛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강(江)은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산(山)곁에 있다
나도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임곁에 있다”<1999.1.28.>
바로 성인들이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저절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나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거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빤짝 한번 나오는 제1독서 필레몬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를 위해 필레몬에게 보낸 격조높은 서간이 참 깊고 향기롭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성인들의 글은, 말은 이렇듯 깊고 향기로워 영혼을 위무하고 치유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이런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주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사랑이, 예의와 배려, 존중의 사랑이 가득 담긴 참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간곡한 청이 담긴 서간입니다. 무례하거나 불손한 면이 추호도 없습니다. 오네시모스에 대한 한없는 사랑, 필레몬 동지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구구절절 감동적입니다. 옥중에서 쓴 수인서간이지만 하느님 나라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대자유인 사랑의 사도 바오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서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 각자 삶의 자리, 꽃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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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임께서 임 닮은 이들 가운데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믿음이 오시어
믿는 이들 가운데에
희망이 오시어
희망하는 이들 가운데에
사랑이 오시어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에
정의가 오시어
정의로운 이들 가운데에
자비가 오시어
자비로운 이들 가운데에
평화가 오시어
평화로운 이들 가운데에
기쁨이 오시어
기뻐하는 이들 가운데에
섬김이 오시어
섬기는 이들 가운데에
돌봄이 오시어
돌보는 이들 가운데에
살림이 오시어
살리는 이들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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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믿으면 오는 하느님 나라
가련한 인간들이 비웃듯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이는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오’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이번에도 인간에 대한 더없는 사랑과 인내를 보여 주십니다.
비방을 받으셨으나 비방으로 갚지 않으셨지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셨습니다. 그들을 엄하게 꾸짖지도 않으셨지요. 그러나 저들이 워낙 사악한지라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말씀만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안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엑카르트는 “이러한 화해”의 임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것은 창조계의 화해로서 우리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 구별하는 이성의 기능은 화해를 통해 교화를 경험하고, 분노의 기능은 평화를 경험하고. 욕망의 기능은 만족을 경험하고, 기억의 기능은 창조주 내지는 아버지와 피조물의 선함을 경험하고, 지성의 기능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아는 경험을 하고, 의지의 기능은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엑카르트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징표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버리고 하느님을 무심코 알고 강하는 영의 열매들이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모든 둘 됨과 구별되는 하나 됨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하느님은 다시 한 번 하느님이 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하다. (27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고통당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나 말이지. 예수님, 성모님, 죄인들 그리고 머지 않아 얼어나려는 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 .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지옥에 떨어져 ...... 많은 집이 부서지고, 나쁜 사람들이 신부님들을 죽이지 . 얼마나 슬픈 일이니 !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건데 ......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고 ...... 그리고 나는
천국에 간다. 그러나 너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빛이 밤에 나타나걸랑 도망쳐라. 그리고 천국으로 와"
“그렇지만 천국으로 도망칠 수는 없잖니?"
“정말 그렇구나. 어떻게 하니 ? 하지만 무서워할 것 없어. 천국에서 너를 위해, 교황님, 신부님들, 우리나라를 위해 전쟁의 재난이 여기까지 닥치지 않도록 기도할께."
루치아가 이 대답을 아주머니께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루치아는 다만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올린삐아는 이것 또한 마음에 걸려서 루치아의 어머니한테 갔다.
“난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요. 애들의 생활은 마치 수수께끼 같단 말이에요."
“정말 그렇더군요. 그 애들은 저희끼리는 줄곧 소곤거리다가도 다른 사람을 보면 즉시 말을 끊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지 못하게 해버려요. 그리고 누군가가 가까이 가면 머리를 숙이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아요. 나에겐 아주 이상스럽게 생각돼요." 하고 마리아 로사는 진정 어처구니 없어 하며 동의를 표했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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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11월, 위령성월의 거의 반이 지났습니다. 예전 노인 병원에 근무할 때는 죽음이 우리 삶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 와 있음을 현실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으며, 그래서 자연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들을 접하게 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란 말인가?’와 같은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평생 죽음을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구의 아버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고서, 죽음을 알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기에 죽음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 연구 결론은 한 마디로 <잘 살자!>인데, 이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게끔 ‘지금 여기서’ 아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곧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해 왔는가?, 라고 자신에게 물으면서 늘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요양병원에서 생활이, 제게는 무엇보다도 봉사와 섬김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음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 존재의 의미가 충만하고 존재의 보람이 풍요로운 곳 그래서 사랑의 기쁨, 사랑의 평화, 사랑의 친교가 충만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고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 혹은 가야 할 곳이 아니라 누리는 것 또는 누려야 할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영혼의 밭에 뿌려진 겨자씨처럼(13,19), 밀가루 서 말 반죽 속에 든 누룩처럼(13,21),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가운데 이미 와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찾아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17,23)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17,20~21)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으로 느끼는 행복 자체입니다. 만일 하느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나라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 나라를 찾아 나서라고 하셨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충만한 곳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은 하느님 나라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고 하느님 나라를 보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닐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道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그 도를 찾고 싶어 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젊은이는 아주 높은 산에 살고 있는 현자를 만나면 도를 깨우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떠나 마침내 그 현자를 만났습니다. 현자에게 젊은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도가 무엇입니까? 도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이곳까지 무엇을 따라 왔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젊은이가 “몇 년을 걸어서 길을 따라 왔습니다.”하고 대답하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따라 걸어온 그 길이 바로 도일세. 도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닐세, 자네가 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만나고 부딪치고 했던 모든 것, 사랑하고 헤어지고, 밭을 일구고 달구지를 몰던 그 모든 것이 바로 도일세. 그 안에서 도를 찾지 못한다면 어디 가서도 도를 찾을 수 없는 것일세.』
결국 이 이야기에서 ‘日常卽 道’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는 높은 산에서, 이상한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들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별하고 대단한 사건이나 일들을 통해 오거나, 어떤 거창한 것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그리고 우리가 하는 작고 소박한 일상적인 일들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가는, 나누고 누리는 삶의 실천을 통해 점점 더 커지고 자라나면서 완성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나 누룩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커지고 자라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 주신 삶처럼 우리 또한 그분처럼 사는 데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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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죽음 너머 그곳 체험 먼저 이곳서 /
박윤식 [big-llight] 2024-11-13 ㅣNo.177586
“보라,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말씀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그분께서 악령을 쫓으시고 치유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드러났기에. 따라서 그분 믿음에 따라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지가 결정된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 마음에 늘 함께한다. 우리는 가끔은 다음의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대부분은 ‘예.’라는 답에 확신을 두지 못한다나. 무언가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러나 믿는 이는 답하리라. “물론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분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릴 것이니까.” 그렇다. 아버지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놓으신 분께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는가? 분명히 들어갈 게다. 다만 굳이 염려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기는 하되, 그곳에서 과연 잘 적응할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왜냐면 이곳과 그곳은 전혀 다를 테니까. 그러니 여기서 그곳을 익히지 못하면, 거기에 가도 결국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정녕 깨닫지 못할 터이니까. 우리는 모두 아름답고 평안한 곳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또한 복지가 잘 갖추어져 부족한 게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려한다. 앞으로 세상이 점점 더 발전하면 언젠가는 그런 나라가 오리라는 희망도 가지리라. 그래서 우리가 이곳서 추구하는 그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가를 생각하자.
예수님께서 세우시려 한 당신 나라는 우리가 희망하는 그 나라와 어떻게 다를까를 늘 성찰하자. 어쩌면 우리는 종말을 향해 가는 이다. 그곳은 흔히 죽음이 머무는 곳이 아닌, 이 세상 완성인 곧 하느님 나라일 게다. 세상 마지막에 하느님 뜻이 완성될 것이기에. 그렇지만 다들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찾아오느냐고 안절부절 한다. 아니 아예 ‘여기에, 저기 있다.’라며 떠든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라고 평생 질문으로 살지만, 결론은 ‘지금 잘 살아라!’ 일게다. 단지 생명 유지가 아닌, 보람을 갖고 손톱만큼이라도 더 값있게 사는 걸게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려면 늘 봉사와 사랑으로 사는 거란다. 결국 멋진 삶이 값진 죽음이라는 거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다하며 인내로 기다리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어떤 장소로 오는 게 아니라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고 하셨다. 당신께서 더불어 머무시기에 그 나라가 이미 우리들 가운데 와 있다나. 이렇게 그 나라란 어떤 장소를 뜻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이란다. 곧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면 다, 하느님의 나라이리라. 그 나라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그날을 늘 깨어 기다리자. 그러면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난다나. 먼 날을 마냥 기다리며 허송할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자라는 하느님 나라를 찾도록 노력하자.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 나라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 죽음 저 너머의 그곳을 이곳에서 반드시 체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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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봉독되는 필레몬서는 한 장으로 구성되었고,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부유한 신자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가 도망쳤다가 바오로 사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오로를 통하여 입교하였고, 옥중에 있는 바오로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 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안전을 생각하여 그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편지로 오네시모스가 노예로서 지은 죄를 용서하고 신앙의 형제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바오로는 신앙의 지도자로서 필레몬에게 요구할 권위가 있음에도,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필레 14절).
바오로가 이 두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쓴 방식은 권위로 지시하기보다 필레몬의 성숙한 신앙과 애덕을 믿으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필레몬에게 입힌 손해를 자신이 직접 갚아 주기로 합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가 필레몬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사람 사이를 섬세하게 중재하는 바오로의 모습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이 사건을 다시 보며, 그들 안에 있는 성숙한 신앙과 애덕에 기대야 합니다.
권위적인 지시보다, 선의를 움직이게 하는 부탁과 제안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손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중재자의 희생적인 행위도 화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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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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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주님 말씀] 2024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매일미사ㅣ한용희 대건안드레아 신부 오늘의 복음&강론
https://youtu.be/ztFC_9YwASg 8:06
cpbcTV가톨릭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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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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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갑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간절히 입국을 원하는 하느님 나라,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세상 그 너머의 또 다른 세상, 하느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현존 속에 더이상 고통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행복한 세상...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으며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와 관련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물론 이 세상은 때로 정의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고통의 파도로 넘실거리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심을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어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며, 너그러운 마음,
넉넉한 미소 짓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내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에 힘겹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그런 행위는 곧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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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의지에 달렸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합당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지옥의 시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옥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과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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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째서 외적 행복이 늘어날수록 내적 행복이 줄어들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착각하였습니다.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외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뤄지는 의로움과 마음의 기쁨과 평화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성령으로 느끼는 행복을 맛보면 세상의 행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연인이 상대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상대의 진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연인이 주는 행복을 완전하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완전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영화 ‘위대한 캐츠비’에서 캐츠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데이지는 다른 행복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캐츠비는 어렸을 때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돈과 명예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캐츠비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미 돈과 명예는 있지만, 바람둥이인 톰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톰은 자기 적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고 데이지도 어느 정도 이것을 압니다.
캐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허울뿐인 행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자기 남편의 내연녀를 차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캐츠비는 그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랑에 온전히 몸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가 이와 같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행복을 신에게 맡겼습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임을 알기에 그는 유일하게 가진 두레박도 개가 입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공허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으니 그만큼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파홈은 욕심을 부리다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추장의 말에 그는 돌아올 시간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2미터도 안 되는 땅에 묻혔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그만큼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시작은 선악과, 곧 십일조를 바치므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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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0-25)”
1)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종말’이 언제 오느냐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은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느냐고 질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종말은 눈에 보이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다든지 저기에 있다든지 하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나중에 예수님 재림 때에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또는 종말의 한가운데에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가운데’ 라는 말은, 딱 중간 지점이라는 뜻이 아니라, 종말이 한창 진행 중인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2)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종말이 완성되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종말을 완성하러 오시는 분이고,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관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은 “박해와 고난을 겪다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될 텐데”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는 “말할 수 없다.”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만일에 인간들이 종말의 날과 시간을 미리 알게 된다면, 또는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 주신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회개하면서 그 날을 잘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몇 명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인간 세상 전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종말론자들 때문에 많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아는 것은
결코 인간들에게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지금’ 깨어 있으면서, ‘지금’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라는 말씀은, 사이비 종교와 종말론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누가 따로 알려 줄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되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당시 사도들과 신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전에 종말이 먼저 오기를 희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의 재림과 종말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겪더라도 영광스럽게 재림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4)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기후 위기 때문에, 또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또 대규모 자연 재난들 때문에 종말을 더 의식하고,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ㄱ).”
신앙인들이 기다리는 ‘그 날’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멸망하는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고 완성되는 날인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려면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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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7,20-25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행동 과학자 로건 유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인연이란 ‘만드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공감가는 말입니다. 내 삶에 의미가 되어주고 기쁨이 되어줄 ‘좋은 인연’은 내가 가만히 기다리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게 아니지요.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그 노력의 결과로 조금씩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고, 좋은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에 이끌려 다가오면 비로소 그들과 내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함께 완성으로 나아가는 ‘좋은 인연’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가만히 입을 벌리고 서서 인연이라는 포도송이가 내 입 안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참된 사랑을 못해본 건 아직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라며 ‘상황 탓’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혜성처럼 나타나 자기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던 로마를 물리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거라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즉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힘들고 괴로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딴 세상’,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이 세상을 뒤집어 엎고 만들어 갈 ‘새로운 세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변화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서 시작된 내적인 변화가 완성될 때 비로소 그 참된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우리 가운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이들이 누리는 참된 기쁨과 행복입니다. 즉 특별한 장소나 특정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언제든 시작될 수 있고 또 이미 시작되었지요. 그러니 ‘우리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즉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게 싫다고, 손해보거나 상처입고 싶지 않다고 사람들은 피해 다니면서,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혹은 조용한 성당에서만 하느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상대방 안에 내재해 계신 ‘그의 하느님’을 만나고 내 안에 모셔야 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거나,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지금 여기’에 같이 있는 이들 안에서 그분을 찾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서만 하느님을 찾는다면 그건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반쪽짜리’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을 온전하게 내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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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 바실레이아 뚜 테우)는
유대교와 그리스도의 신학적 중요 개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천국’,
‘아버지의 나라’,
‘주님의 나라,’
‘그 나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로 쓰고 있지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태 복음서에서는 ‘하늘나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말을 직접 쓰는 것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왜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셨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해줍니다.
그들의 질문이 이제껏 해온 것으로 비추어 보면 순수한 것이기 보다는
비판적인 입장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요 내용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인데, 바리사이인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말씀과 자신들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서도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에 비꼬는 의도가 있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타 민족에게 억눌려 살아왔던 과거의 어두움을 청산하고 뛰어난 영도자,
메시아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그 나라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경제적으로 또 군사적으로도 다른 민족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구름 잡는 듯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어느 세월에 하느님 나라가 오겠느냐는 비아냥도 배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주님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가 유대인들의 기대처럼 어느 시대,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장소가 아니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그들 가운데 이미 시작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공간적이거나 미래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현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였을 때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는 말합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 아니라 언젠가 오시는 주님의 나라를 지금부터
준비하기 위해 눈을 다시 현재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천국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함께 하는 그 순간이 천국이지요. 아주 작고 부족한 빵이지만
이웃과 오순도순 나누며 대화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 천국이지요.
늦가을 나무 사이로 빛나는 햇볕의 아름다움도 바로 천국을 그리는 것 아니겠어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는 주님 말씀대로 가시적이거나
미래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서 먼저 당신 자신이 많은 고난을 겪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실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과 천국은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어떠한 처지에서든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삶,
여기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는다면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맞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도 지금 확실하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부족한 것이라도 서로 나눌 때, 고통과 실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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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 한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육신을 지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한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오감에 의한 경험을 중시하고 외적 자극에 길들여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잘 보지도 믿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늦게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이나 가치들을 알아차리곤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다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이민족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의 오심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17,20)고 여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17,20-21)고 답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17장 21절의 ‘엔토스’(ἐντός)입니다. 이는 ‘가운데’ 또는 ‘안에’라는 뜻을 갖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어디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내면적인 것’, ‘마음속에 자리하는 실재’로 언급되지 않기에 여기서는 ‘안에’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엔토스’는 ‘가운데’, 또는 ‘너희들이 만질 수 있게’(C.H. Roberts) 또는 ‘너희의 지배 안에, 너희 가운데’(A. Wikgren)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 한가운데 임하여 예수님의 활동과 더불어 늘 있으므로 시간에 매이지 않으며, 그것을 기대할 필요도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삶의 현실 한가운데 있고, 있게 될 것이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삶 한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치유활동을 통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아내처럼 살면서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소유와 집착에 매여 영혼의 눈이 멀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먼저 추구하면서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려면 '어떻게'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려면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12,54-56). 이는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에 따라 각자가 사랑의 사람이 되고 이 사회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인내로써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한복판에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 안에서 신음하는 예수님을, 가난한 이들 안에서 굶주리시는 예수님을, 박해받는 이들 안에서 거친 숨을 쉬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나와 너 사이의 한복판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는지, 진정 사랑과 정의의 나라라 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철저히 추종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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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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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4.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좋은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
<2024.11.14> 아침을 여는 묵상 (딤후 2:1~13절)
❝좋은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
❚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사역자로 훈련되어, 악한 영들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 좋은 사역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 좋은 사역자란,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1~2절).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내 아들아’라고 부르면서 디모데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 권면합니다. ‘강하다’는 ‘권능을 부여 받다. 힘을 받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2절) 충성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 훈련하여 복음이 계속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 자신이 주께서 맡기신 사역에 충성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충성 여부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교회를 통해 더 많은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순수하고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 훈련시키고 가르쳐 계속해서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사역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좋은 사역자란, 복음에 적극적인 사람입니다(3~6절).
하나님은 복음에 적극적인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3~4절). 군인은 사생활이 없고, 자기를 모집한 대장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급자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순종 그리고 함께 전투의 현장에 나아가야 합니다. 좋은 사역자는 내 자신의 일보다는 복음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받아 사역의 자리로 보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승리의 관을 얻기 위해 경기하는 자입니다(5절). 경기에 나가는 선수는 규칙대로 경기를 하지 않으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테두리 안에서 순종하여 사역을 감당할 때,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세 번째는 수확을 얻는 농부와 같은 자입니다(6절). 농부는 수확을 얻기까지 성실하게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의 열매를 얻기까지 그만큼의 값이 지불 되어야 하며, 땀 흘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병사나 경기에 나가는 선수나 농부와 같이 적극적인 자세로 고난에 대처하고, 부지런히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복음의 열매를 맺기까지 무수한 눈물과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인내할 때에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고난 그 자체는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고, 고난의 그 순간은 몹시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고난의 순간을 믿음으로 그리고 인내로써 주님과 함께 참고 견디면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복음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전하기에 힘쓰는 좋은 사역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좋은 사역자란,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7~13절).
좋은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윗의 후손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8절).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9절). 바울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한 이유는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10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인내는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함께 살 것(11절)이며,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할(12절)것이며,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12절)입니다.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받는 고난은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주님과 함께 받는 영광의 삶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과 상황에 처하더라도 복음을 자랑하는 일에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언제나 신실하시기 때문(13절)이시기고,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을 의지하여 당당하게 복음을 자랑하는 영적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으며, 좋은 사역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해져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충성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고난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좋은 사역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딤후 2:1~1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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