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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10~18절/
믿음으로 보는 세상
아브람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하여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창13;3~4)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심한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아내와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 아브람은 처음 기근을 만났을 때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 18~19절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을 갖지 않은 바로에게 책망을 듣는 것은 믿음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거짓말한 사실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행한 잘못이 결국은 자신에게 수취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그의 모든 재물이 손해되지 않고 오히려 풍요롭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와 두 번째 시험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과의 갈등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람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포기하였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포기는 신앙의 출발점이 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13;8~9절) 믿음이 없을 때는 자기가 중요합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며 일을 전개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예민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면 손해도 볼 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여유와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었던 롯은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 보다는 이해관계에 예민했고 세상의 쾌락과 풍요에 미혹을 받았으며 물질과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10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우리들 주변에는 이렇게 우리를 유혹하고 매료시키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쾌락과 자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롯은 선택권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롯은 자기가 본 세계가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것같이 생각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롯이 바라보는 요단들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물이 넉넉했다는 사실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농사가 잘 되었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하게 할 만큼 완벽한 조건과 환경을 갖추었던 지역이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애굽 땅과 같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은 기근 때문에 한때 애굽 땅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나일 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도시문화가 꽃피었던 애굽 문명의 편리함과 화려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은 행복이 보장된 곳처럼 보였습니다. 롯은 그곳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한 도시오. 매력 있는 도시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는 도시입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화려한 것에 속지 마십시오. 그럴듯한 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아브람과 롯에게만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지를 선택할 때 많은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집을 어느 곳에 얻느냐는 여러분 자신이 결정해야 할 몫입니다. 아마도 집값이 빨리 오를 것으로 예상되거나 자녀교육이 편리한 곳에 집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월급도 많이 주고 근무 환경에 쾌적하며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입니까? 아니면 월급은 좀 적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리입니까? 결혼을 위해 여러분이 선택한 남자나 여자의 선택기준은 무엇입니까? 학벌 좋고 가문 좋고 능력 있어서 그와 결혼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만 같은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롯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11절에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결국 롯은 하나님을 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택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잘못된 선택에는 비록 그것이 10년이나 20년 후일지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람을 떠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을 택했기 때문에 롯은 아브람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왜 아브람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람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했지만,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사람은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축복의 사람을 뒤따라 다니며 축복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생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후회하며 삽니다.
12절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람이 끝가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외로운 땅이었으며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어떠합니까? 롯은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며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라는 이르렀습니다. 소돔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13절) 물질을 택하면 ‘소돔까지’ 갑니다. 처음부터 그곳까지 갈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곳까지 가고 맙니다. 이 길은 멸망의 길이요, 심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길은 인기 있는 길로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사람들이 피하는 길이요, 가지 않으려고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13절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화려한 것과 쾌락 뒤에는 항상 죄가 있습니다. 넓은 길 뒤에는 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편하다고 평안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련해서 항상 넓고 편하고 좋은 것만 선택합니다.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어디에 기준을 두고 선택하며 사십니까? 롯은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은 홀로 남았습니다. 신앙은 항상 홀로 남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면 고독해지고 외로워집니다. 신앙을 가지면 인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이 힘들고 외로운 길인데 그 길을 갈 것인가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청춘과 젊음을 아까워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늙고 병들어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후회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하지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어제 오시는가? 바로 롯이 떠나고 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손해 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포기와 손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롯은 떠났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찾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이미 아브람 곁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근을 만나고 갈등하고 고민할 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시고, 한숨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계란이 부화할 때 인위적으로 껍질을 깨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지 불쌍하다고 깨어주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죽어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다시 태어나고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자기를 이기고, 자기를 깨고 거듭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롯은 아브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롯이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롯과 아브람이 끊임없이 싸웁니다. 하루는 롯처럼 생각하고 또 하루는 아브람처럼 생각하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한 가지 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롯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의 약속을 눈 감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등을 두드리시며 잘했다고 격려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기근을 만나고 갈등을 겪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탈출하여 승리하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고, 가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이 너무나 뻔한 것 아닙니까? 공부해서 좋은 학위를 갖고, 좋은 직장을 얻고, 재벌이 된다고 해도 죽음 앞에 서면 한 주먹의 재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한 줌의 행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경쟁하고 싸우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나’라는 존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얻게 됩니다. 롯이 떠난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동서남북은 세계를 뜻합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찾아 왔을 때 그는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전에는 개처럼 취급했던 이방인들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해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유배지 ‘밧모섬’이라는 버려진 땅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접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여러 가지 하늘의 세계에 대해 목격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이라는 우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읽고 예수를 만난 후에 종교 개혁의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본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이라는 문화권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눈이 열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광활하고 넓은 중국이라는 대륙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 눈을 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유망한 C.T스터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으며 켐브리지 7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으며 성공이 보장된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가고 믿음이 생기면서부터 시야가 달라졌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에 갔다가 더 시야가 넓혀져서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어 그곳에 뼈를 묻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인도라는 큰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어떤 세계를 봅니까?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며 내 이성과 경험과 상식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 놀라운 은총의 세계까지 들어가게 하십니다.
14절에서 배우는 사실이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 번째는 ‘너는 눈을 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 오셨을 때 그에게 비전과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는 첫 번째 이야기로 ‘네 눈을 들라’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땅을 보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눈을 들어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현실과 환경을 보면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면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눈을 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에는 놀라운 환상과 비전과 하나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너 있는 곳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현실을 싫어합니다. 고통스럽고 질척거리고 따분한 이 현실을 피해 어딘가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기적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병이어가 기적의 시작이 된 것처럼 내 모습 이대로 내 환경 이대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나의 현실적인 상황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무엇을 보느냐가 보전입니다. 어떤 총각이 한 처녀를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 어느 날부터 그 여인과 함께 살게 됩니다.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네가 보는 땅을 내가 주리라’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이 축복은 아브람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은 자신의 세대보다 그 다음 세대에서 나타납니다. ‘재벌 30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여러 대를 통해 계속 이어집니다. 믿음은 이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이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셀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으며 크기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축복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앞을 보아도 그렇고 뒤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측량할 길 없을 정도로 무한하십니다.
17절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얼굴을 들라’, ‘보라’에 이어 아브람이 받는 세 번째 축복의 메시지는 ‘일어나..,다녀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며 누리는 축복의 조건은 고개를 들고 비전을 보고 그것을 향하여 일어나 걸으며 땅을 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축복을 거저 주지 않으십니다. 그는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종과 횡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어느 누구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미래는 갖는 사람의 것입니다. 축복도 갖는 사람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우즈베키스탄의 땅을 밟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땅을 밟기 바랍니다. 어떤 여자는 시집가서 애를 낳고 기저귀를 빨면서도 ‘나는 내일의 모세의 기저귀를 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기저귀를 빨고 있지만, 그저 밥하고 빨래하며 살고 있지만 그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돈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며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만큼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소유하게 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현실은 항상 초라하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이 그 모든 비전을 보았지만 현실은 아직 ‘상수리 수풀’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변한 사람이었습니다. 태양을 본 사람은 촛불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듣고 맛본 사람이기에 현실은 외롭고 고독하고 가난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 미지의 세계, 축복의 세계가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이 무엇을 합니까?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고독하고 외롭고 성취감이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배하는 순간 믿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상황이 변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단을 쌓습니다. 이제 아브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보통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입니다. 갈등을 겪고 기근을 만나고 손해를 경험하면서 그는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으로 변신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열려라 하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