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여성 코미디언 만담으로 시작, 원고도 썼던 김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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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19. 19:44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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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여성 코미디언
만담으로 시작, 원고도 썼던 김윤심
요약 1914년생 김윤심, 만담가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로 만담을 배워 일본에 알려짐.
만담뿐만 아니라 창에도 기질이 있었음. 만담과 소리만으로 시종 관중을 웃김.
광복 전까지 최고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남음. 한국 전쟁 후 코미디 원고를 집필까지 함.
같이 활동했던 연예인들에게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대우를 받으며 살다가 여생은 외롭게 보냄.
여성으로 맨 처음 희극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은 김윤심이다. 1914년생인 그녀는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아홉 살 때 상경, 당시 만담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신불출에서 배웠다.
신불출은 유성기 시대의 배우로, 아직까지도 그의 장기였던 만담은 유성기판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김윤심은 유일한 그의 여성 제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의 연기는 만담, 그중에서도 원맨쇼처럼 혼자서 하는 독만담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열한 살 때. 일본의 한 공연단체에서 조선에 천재소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초청했을 때부터였다. 당시 그녀는 창에도 상당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80세를 넘어서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그녀의 만담과 창을 듣고 곧 취입을 시키기도 했는데, 그 판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린 적도 있었다. 또한 공연을 하면 재일동포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그 바람에 레코드사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 열 살을 갓 넘긴 소녀가 일본을 떠들썩하게 하자 그 명성은 흔히 배구자에게 비견되기도 했다. 춤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배구자 역시 소녀 시절에 일본에 와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성이 사람을 웃기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유랑극단에서도 사람을 웃기는 것은 남자배우의 몫이지 여자는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여성으로서 연예인이 된다는 것은 연극배우나 가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사람을 웃기는 일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체구가 자그마한 김윤심은 무대에 한번 오르면 30분도 좋고, 40분도 좋고, 만담과 소리만으로 시종 관중을 웃겨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그녀의 레퍼토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스승이었던 신불출의 작품을 가지고 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일본행은 신불출의 허락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며, 다녀와서도 스승의 무대를 따라다니며 기량을 익혔기 때문이다.
김윤심의 웃기는 연기에 신불출이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신불출이 처음부터 가르쳤던 독만담은 남다른 학식과 구성력 그리고 재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신불출 자신도 전통의 소리꾼들을 따라다니며 그 사설 속에 있는 재담을 귀담아 듣는 탐구력의 소유자였다.
광복 전까지 김윤심은 최고의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한국전쟁 후엔 <만화경> <염불타령> <요절 춘향전> 등 코미디 원고를 집필하고, 그녀 자신이 직접 출연·연기하기도 했다. 또 이봉룡이 음악을 맡은 뮤지컬의 구성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공연을 기억하는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윤심은 매우 박식했고, 시대상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연기에 능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여성 코미디는 유랑극단의 막간 무대에서부터 출발했다. 윤백단·나품심·신일선·신은봉 등 이때 두각을 나타냈던 여류들은 레코드에서, 무대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광복과 전쟁을 거치는 동안 모두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그러나 김윤심만은 시종 사람을 웃기는 그 일을 버리지 않아 격동기 전후의 맥락을 이어주었다. 이는 우리 나라 코미디의 변천을 살펴볼 때 뚜렷한 일로 나타나 있다. 그녀의 내면적인 축적이 빈약한 것이었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쟁 후에도 여성 코미디언이라면 먼저 꼽아주었던 김윤심은 당시 같이 활동했던 연예인들로부터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자취는 차츰 사라지고 말았다. 텔레비전이 각광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말년의 김윤심은 무의탁 시설에서 외롭게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전성기 때 의사와 결혼하여 한때 만주에서 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결혼은 평탄하지 못했다. 이후의 연예활동은 전국을 무대로 한 것이었다. 슬하에 둔 두 딸은 외국에 나가 연락이 끊어진 채 그녀는 끝내 경기도 벽제의 무의탁자 보호시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때까지 연예계에서는 그녀가 벌써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