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18
7월14일[연중 제1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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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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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3m4gwnJqts
[예수회 최대제 로베르토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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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여름 캠프 온 아이들을 위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대형 식자재 마트에 갔습니다. 이것저것 잔뜩 산더미처럼 카트에 싣고 계산대 앞에 서니 근무하시는 자매님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묻습니다.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그 상황에서 ‘사실 저는 천주교 신부인데요!’ 하기도 거시기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식당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식당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더위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야 재미있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자영업자들,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실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마트 직원의 질문 앞에 다시 한번 제 신원, 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각별히 총애하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는데, 그러한 소명에 기쁘게 응답하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 때로 근사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폭군이나 압제자의 잔악한 횡포나 그릇된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 앞에서도 그저 숨죽이고 지낼 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한번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고관대작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그의 파렴치한 치부를 아무런 가감없이 고발합니다. 서슬퍼런 예언의 말씀 앞에 왕들조차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평생 한두번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생애는 핍박과 돌팔매질과 추방과 놀림의 연속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망다니기까지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거룩한 주님의 지성소 베텔 땅을 더럽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서 예언하며 밥 먹고 살아라, 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질책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 7,14-15)
보십시오. 아모스 예언자는 철두철미한 신원의식, 겸손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근본, 본래 처지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본래 양치는 목자요,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결핍 투성이요 천덕꾸러기였던 원래 나의 허물을 벗고 사목자가 되고 책임자가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잊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어딜 가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보필해야 합니다. 슬슬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거짓 목자, 삯꾼으로 전락하는 중입니다.
요즘 저는 일부러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골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까마득한 시절에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근로자였습니다. 예언자요 사목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나의 근본, 내 결핍 투성이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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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N0WL5Nn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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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왜 기적이 적게 일어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받고 파견받습니다. 병의 치유는 하느님만의 능력이고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좀처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예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이 차에 깔린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차를 20cm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에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하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이런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의 특징은 ‘사랑’은 있는데 더는 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데 있습니다. 이를 ‘가난’, 혹은 ‘청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이르셨습니다. 억지 가난이 아닌 다 내어주어 더는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신 영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지만, 2017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후원금을 모은 뒤 수만 명으로부터 12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아 외제차를 사고 요트 파티를 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쓴 일당이 잡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받은 돈 일부를 후원하기는 하였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고 그들에게 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줄 수 있으면서 그것은 아끼고 주님께 치유의 기도를 하면 들어주실까요? 하느님은 조롱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없다면 아직은 교회가 신자들이나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이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유럽 전역에서 걷은 돈들이 수레에 실려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자랑스럽게 “저것을 보아라.
이제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사도 3,6)라고 하던 때는 지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도 “맞습니다. 교황님,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라고 하던 때도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 마르티노 수사는 흑인입니다. 수도회의 재정 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팔아 수도회의 재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줄 때 빵이 무한정 늘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들의 시복·시성 조사 때 꼭 하는 게 기적 심사입니다. 성인의 생전에 일으킨 기적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뒤에 거룩함의 표징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인이 더는 줄 것이 없이 되었을 때 분명 그 성인을 통해 당신께서 더 내어주십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많아야 초대 교회처럼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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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천동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와 금성의 모양 변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금성을 관측하면 달처럼 다양한 모양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천동설에 의하면 금성은 초승달 또는 그믐달 모양으로만 보여야 했기 때문에 금성의 위상 변화 역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지구는 1시간에 약 1,670km의 속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자전)하면서, 태양을 둘러싼 대략 9억 6천 만km에 달하는 타원 궤도를 1년 동안 돌고(공전) 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일주 운동과 계절 변화인데 일주 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행성이며, 태양은 우리은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항성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변방에서 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꿈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는 달을 탐사하였고, 화성까지 탐사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천동설과 지동설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성당의 중심은 아닙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은 중남부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성당은 포트워스 한인 성당입니다. 그리고 대략 4시간 거리에 오스틴, 휴스턴, 샌 안토니오 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에 엘파소, 덴버, 콜로라도 성당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가기에는 먼 거리에 피닉스, 라스베이거스 성당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제들이 함께 모여서 연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습니다. 중남부 지역 대표 신부님과 휴스턴, 오스틴, 샌 안토니오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꾸르실료 담당 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레지오, 엠이, 성령기도회도 담당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4시간 거리에 있는 성당이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피정도 함께 하면 좋겠고, 성령기도회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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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 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셨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래서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예언자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고(마르 1,14 참조)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해 신뢰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 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 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일 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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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돌무화과나무를 가꾼 경험과 기술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의 일에 관한 모든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소유’를 요구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주인이나 스승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단죄, 험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같은 잘못된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만일 하느님의 일 때문에 이웃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꾸 갈등을 겪는다면, ‘누구의 힘’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성체 앞에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 자녀로 부르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 안에서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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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마음으로.>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ㄴ-11)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도 ‘응답’입니다. 따라나선 것만이 응답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ㅣ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ㄱ)
이 말에서 ‘해로운 것’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쓰레기’는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는 것’, ‘버려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가치 없는 것들을 버려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또는 버리지 않으면,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아까워하면서 버리지 못한 그것들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당신을 처음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던 그 마음 그대로, 또 그 모습 그대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빵, 여행 보따리, 전대, 돈, 여벌옷 등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해로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버렸던 ‘쓰레기들’을 되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은, 이미 버린 쓰레기들을 되찾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너무 심한 말이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표현이 상당히 강하긴 한데, 그것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재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정말로 신앙생활에 큰 방해가 됩니다.>
또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텐데, 우리는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고 삶이다.’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3) “가져가지 마라.”는 “가져오지 마라.”이기도 합니다. ‘빈손’으로 떠난 제자들은 돌아올 때에도 ‘빈손’이어야 합니다.
4)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어디에서나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거든”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여기서 ‘아신다.’는 ‘알고 계시니까 주신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을 먹이실 수도 있지만, 착한 이들을 통해서 먹이시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십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고, 그게 걱정이 되니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걱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걱정에 사로잡혀서 걱정만 하다가 믿음이 희미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면 걱정이 희미해집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숙식을 제공한다면, 그 도움을 주님의 은총으로 믿고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뜻인데,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다른 집으로 옮겨 가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주는 대로 먹는 것과 민폐를 끼치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민폐를 끼치는 짓을 하는 것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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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순명과 순종>
성직자 신분의 시작인 부제 수품 전, 대품 피정 마지막에 성직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을지 주교님과 면담을 하고, 서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당시 교구장님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저의 수품 면담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추기경님께서 하신 질문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자네는 이제 성직자로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될 터인데, 마음의 결심을 하였고 잘 지킬 수 있겠는가?” 이어서 순명과 독신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저는 저의 부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채워진’ 성직자가 아니라, ‘부족한’ 종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태까지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 사랑과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에 앞서, 여러 가지 규칙을 말씀하십니다. 맹수와 강도를 물리칠 지팡이와 돌이 많은 땅을 걸어갈 때 필요한 신발 말고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옷을 두 벌 껴입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사치한 모습이니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더 보태서 마음에 드는 좋은 집을 찾아 다니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가벼운 몸가짐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했고,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로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도 듣지 않으면, 앙갚음이나 해코지하지 말고 다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또한 ‘순종’했다고 생각합니다. 순명이 마땅히 옳게 따르는 것이라면, 순종은 부족한 것을 모두 채워주시고 도와주시겠다는 염려와 보살핌을 받아들이고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순명을 통해 선포자로 파견된다면, 순종을 통해 목자 곁에서 사랑받는 양으로 이끌려 갑니다. 순명이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면, 순종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가슴 뜨거운 주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파견 당부 말씀은 결코 내던짐이 아닌, 지극한 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족합니다. 하느님만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이고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명을 서약했지만, 주님께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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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방기태 루이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신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복음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집을 떠나서 어딘가에 머물게 될 때를 생각해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어쩌면, 제자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요구 조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이의(異議)도 제기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현실적으로 무리한 요구였을 텐데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나약한지 예수님을 통해서 확인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가라앉게 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통해서 자신들의 몸에, 생계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현실의 장벽 앞에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 보일 때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자들은 현실의 장벽 앞에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분명 내적인 힘인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담대함(용기)을 가지고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한 결과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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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장욱종 안토니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 1.3)
저의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한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실컷 놀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다.”
요즈음 여러 가지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을 향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좋아진단다.”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다 거짓말처럼 여겨집니다.
사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도 지금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부는 고등학교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될수록 책임감이 커져 더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 안에 거짓이 많아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함께 동반하고 있는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희망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청소년들은 시간이 지나면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보다는 분명히 잘 되는 근거 있는 희망을 만들어가고 품어 가는 과정이 참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희망은 바로 주님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이 지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거짓된 희망이 아닌, 주님이라는 진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많은 것을 챙겨주어서 기쁜 소식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참으로 어렵기까지 합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가 아닙니까? 특히 악이 가득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채우다 보면 주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빈 마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빈 마음이 있어야 그 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만이 희망 없는 세상 안에서 참된 희망을 품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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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 남성이 상체에 ‘타투’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많이 했고, 또 그 친구들이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이 남성의 어머니께서 우연히 아들의 타투한 것을 보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김치 담던 반찬 통으로 아들의 머리를 두들겨 패며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사실 이 남성은 부모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았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할 때마다 긴소매 티셔츠를 입거나 토시를 해서 상체의 타투를 가렸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운전하다가 전방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신호를 기다리는 앞차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에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운전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빨리 윗도리 벗어!”
숨기고 싶었던 아들의 타투가 이런 상황에서는 드러내고 싶었나 봅니다. 이렇듯 숨기고 싶은 면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잘못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단정짓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려 노력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만약 도저히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그만둘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시지요. 부족함 없이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에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 없이 그 모든 것이 가능할까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있는 것까지 놔두고 떠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만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자리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늘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을,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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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를 파견 한 이유는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선포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하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는데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서로의 협력으로 선교의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명 이행의 객관성과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보장해 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마라!’오직‘주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라’는 당부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 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나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 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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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채비>
마르코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채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보내지는
나의 길은
보내시는
님의 길이오니
보내지는
나의 채비는
보내시는
님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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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의 축복된 삶>
“회개, 찬미, 순종”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참 좋습니다. “주변을 챙길줄 아는 사람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도 얻는다.”<다산> 사랑 실천의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 참 멋진 진리 말씀입니다. 천리향, 만리향 꽃같은 사랑의 행복한 수도공동체라면 성소자는 물론 목마른 영혼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 올 것입니다.
어제와 자고 난 지금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셉수도원 설립 37주년 및, 75년 제 생애 최초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참으로 생전 처음 침실에 아담한 50만원짜리 침대를 놓았고 그 느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그 소감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고가의 침대가 아니라 안도했습니다. 돌침대가 아닌 흙침대입니다. 순전히 참 좋은 분의 사랑과 원장수사의 분별의 결단으로 이뤄진 쾌거입니다. 물론 사랑의 성령님께서 개입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저와 두 분의 친애하는 도반 70대 노수사들에 대한 수도공동체의 각별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평생 무소유의 비워가는 단순한 삶을 추구해온 저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습니다만,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침대 놓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어제 강론 제목에서 강조했다시피 노쇠해가는 삶과 더불어 겸손과 순종 수행을 통한 영적 면역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원장수사에 전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대로 잘 어울리고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동네 경노 잔치라도 열린 듯, 신기한 구경거리나 있는 것처럼, 수도형제들 내 일처럼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된 모습들로 다녀갑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듯 신선한 분위기입니다. 평생 방바닥에 붙어 자다가 높은 침대를 사용하니 내 존재가 격상된듯한 고귀한 느낌도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업무차 어제 오전 10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37분만에 뉴욕공항에 도착한 원장수사의 답신입니다. “설치가 잘 되어서 제 일처럼 기뻐요. 저는 지금 막 착륙했어요.”
이어 맨먼저 침대 놓는 아이디어와 성금을 후원한 분으로부터 받은 답신입니다. “어머나! 벌써 들어왔군요. 너무너무 보기 좋고 깔끔합니다. 오랫동안 궁리 끝에 말했던 것이 일사천리로 성사되어 기쁩니다. 아마 낼은 매트레스가 들어오겠군요. 세분 노수사님들 건강하시기만 빌겠어요!”
또 어제 오후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분은 제 면역질환으로 피부에 뚜렷한 흔적을 보고 자기가 잘 아는 한방병원에 예약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니 그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에 전력투구하다 생긴 면역질환이기에 “부끄러워할 상처”가 아닌 “영적전투의 훈장勳章”처럼 자부하니 당당한 느낌도 들고 주님께서 알아서 조처해 주시리라 믿는 마음도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워할 것은 “죄짓는 일”이지 결코 “피부병의 흔적”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저런 깨달음이 남은 생애 더욱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삶을 어떻게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묵상중 떠오른 세항목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에게 우선적 자질은 회개입니다. 회개은총입니다.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참된 회개뿐입니다. 파견에 앞서 제자들은 회개와 더불어 그 텅빈 자리에 주님은 더러운 영들의 대한 권능을 가득 넣어 주셨고,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무소유의 홀가분 차림으로 떠나니 이 또한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을 택한 회개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말그대로 이런 회개를 통한 자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자유이겠습니다.
어디에 가든 환대를 고맙게 받아들이되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미련없이 떠나라 합니다. 다만 주어진 선교사명에 최선을 다할뿐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는 그대로 참된 회개의 열매인 믿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파견의 궁극 목표가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요,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많은 마귀는 쫓겨나고 많은 병자는 기름부음을 받아 병이 치유되니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가 단연코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매사 겪게 되는 힘든 일들을 회개의 계기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즉 자아초월의 계기로 삼을 때 상처나 짐은 영적성장과 성숙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죽을 때가지 끊임없는 회개요 회개의 여정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순종하라!”
즉각적인,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삶은 지상명령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갑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자살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내는 순종일 때 구원입니다.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 순종의 인내, 순종의 겸손, 순종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들간 상호순종도 물론입니다.
순종이야 말로 영적성숙의 잣대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단번에 순종은 없습니다. 순종의 여정입니다. 순종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날로 깊어 익어가는 순종입니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배웁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배우지도 못합니다.
순종의 훈련, 순종의 습관입니다. 봄철 배꼭지는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을 열매 익었을 때 잘 떨어지는 배꼭지처럼 사람도 영성이 잘 익어야 이런 자발적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참으로 눈밝은 주님은 정확히 아모스를 주목했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불렀고 그는 지체없이 순종했음이 다음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예언자도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던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저는 초등학교 8년동안 교사생활하다가 주님께 붙잡혀 34세 늦깍기로 수도원에 들어왔고 올해로 수도생활 42년째입니다. 다시 산다 해도 이렇게 주님께 붙잡혀 올 것 같고, 또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 “찬미하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여기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순종의 열매가 찬미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의 찬미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간 월요일마다 바치는 찬미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서는 자연히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합니다. 어느 한 대목도 생략하기가 아깝지만 전반부 만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존재를 끊임없이 격상시키는, 날로 주님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우주와 인류의 구원이 망라된 참 웅대하고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축복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 늘 함께 하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우리들의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회개의 삶에, 순종의 삶에, 찬미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도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축복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온누리에 미치는 찬미의 축복 선물입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 85,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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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행자가 아니라 파견된 자>
배가본드(vagabond)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말로 여행자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이것을 영영사전에서는 ‘wandering aimlessly without ties to a place or community’라고 풀이합니다.
풀이하면 어떤 일정한 장소나 공동체에 매임 없이 그리고 아무 뚜렷한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참으로 여행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좀 더 고상하게 성지 순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한곳에 매인 삶이 답답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저는 함부로 의심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
아무튼 여행이나 순례나 공통점은 어떤 곳에 매이지 않고, 머물던 곳을 떠나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나 복음의 제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행자나 순례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행자와 순례자가 자기 스스로 떠나는 것이라면 예언자와 사도들은 부르심 받고 파견받아 떠나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여행자와 순례자가 자기가 좋아서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곧 자기가 끌리는 데로 간다면 예언자와 사도들은 가기 싫어도 가라고 하시니 가고, 가고 싶지 않은 곳도 가라고 하시니 가는 것이 다른 것이지요.
실로 저희 수도자와 선교사에게 관건은 파견의식입니다. 여기서 파견의식이란 파견 예절의 뜻이 아니라 나는 파견되는 존재라는 정체성 의식을 말함입니다.
내가 파견되고 안 되고는 파견자의 뜻이고, 어디로 파견되는 것도 파견의 뜻이며, 파견되지 않으면 있는 곳에 계속 있는 것도 파견자의 뜻입니다.
그런데 수도자건 신자들이건 이런 파견의식이 없어
파견자의 뜻을 생각지 않고 ‘셀프파견’을 하려 합니다.
옛날 수도자들은 선교사로 파견될 때 선교사가 될 생각이 없는데도 선교사가 되라고 하니 되고, 갈 곳도 자기 선택이 아니라 가라는 곳이, 갈 곳이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 되고 가고 싶은 곳이, 갈 곳이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집니다.
여행자나 순례자와 예언자나 선교사의 차이는 여행 짐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요즘 여행자들은 웬 짐이 그리 많습니까? 짐이 짐스럽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비판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짐스러워하면서 여행 짐은 하나도 짐스럽지 않은가 보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짐에 관한 규정을 파견 규정으로 내려 주십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너에게 짐이 되고 지장이 되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네가 의존하는 필수품이 되지 않게 하라!
네가 오로지 지녀야 할 것 곧 짐은 주님뿐이다!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평화만 너의 짐이다!
주님의 파견 규정에는 가야 할 곳도 있습니다. 가야 할 곳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경치 좋은 곳 또는 명승지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목적이 복음 선포이니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파견 규정에는 마무리 규정도 있습니다. 떠나갈 때 파견자의 뜻대로 파견되었듯 마칠 때도 파견자의 뜻대로 마쳐야 합니다.
더 있고 싶다고 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환영받지 못할 때 뒤끝이 작렬해서도 안 됩니다. 발의 먼지를 털고 깨끗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는 그곳을 깨끗이 떠나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뜻은 새로운 곳으로 가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도 그리고 어떤 사람도 애착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 뜻에 따라 있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라는 주님의 뜻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행자가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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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부르심(선택)!>
오늘 복음(마르 6,7-13)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파견 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사도로 삼아 파견하십니다.
연중 제15주일에 들려오는 말씀, 곧 제1독서(아모 7,12-15)와 제2독서(에페1,3-14)와 복음의 주제어는 '부르심'입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선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사람들을 선택하십니다. 약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보잘 것 없는 아모스를 예언자로 선택하셨습니다.(제1독서)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자녀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미리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제2독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지금 나에게 주어진 성소(聖召.부르심)에 감사하며, 이 성소에 충실합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봉사자 부르심'에 감사하며, 이 부르심의 기쁘게 "예!" 라고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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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TnQ11myH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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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 11)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단호하게
마음을 세우는
새날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덮은
먼지를
우리가
털어 버리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마음대로
되지않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서대로
되지않는
우리의
일들입니다.
우리의 일들은
우리자신을
발견하는
뜻밖의
시간입니다.
먼지는 먼지를
만들어내고
은총은 은총을
만듭니다.
과거의 낡은
먼지를
내려놓습니다.
먼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먼지를
털어 버려야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행복의
시간입니다.
먼지만 있고
행복이 없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듯
기도로 다시
일어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허점도
우리의 약점도
우리의 잘못도
은총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거룩한 주일
되십시오.
먼지를 알아야
빛을 볼 수 있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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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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