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이후 성종대 까지 5차례 공신 책봉에서 네차례나 1등 공신이 됐고, 그의 위세를 보여주는 압구정(狎鷗亭) 까지 더해지면서 호의호식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간신,칠삭둥이,훈구대신등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명회는 조선전기 정국을 안정 시키고 두 딸을 왕비로 보내는 데도 성공한 노련한 정치가의 면모를 보인다.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사우당(四友堂)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조선ㆍ화령)쪽지를 들고 명나라에 가서 조선 이란 국호를 낙점 받아온 한상질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다. 과거 시험에는 몇차례 응시 했으나 거듭 실패 하는등 젊은날 그의 인생이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
단종 즉위후 젊은시절 함께 산천을 유람하던 벗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접근 함으로써 한명회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권람은 수양대군을 만난 자리에서 " 한명회는 어려서 부터 기개가 범상하지 않고 포부도 작지 않으나, 命이 맞지않고 지위가 낮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공이 만일 발란(拔亂) 할 뜻이 있으시면 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며 한명회를 적극 추천했다. 이후 한명회는 수양의 책사로 활약 하면서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의 동선을 파악하고 홍달손, 양정, 유수등 내금위 등에 소속된 무사들을 포섭해 갔다.
1453년(단종1년) 10월10일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란이 발생했다. 한명회는 무사30인을 수양에게 추천하고 반대파 정치인을 파악해 정보를 제공 하는등 정란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정난후 수양ㆍ정인지ㆍ한확ㆍ 홍달손 ㆍ권람 등과 함께 정란공신 1등으로 사복시 소윤에 올랐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됐다. 1455년 세조 즉위후에는 더욱 승승장구 하여 좌부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 1등에 책봉 되었다.
1456년 성삼문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을때 한명회는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이를 좌절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성삼문등은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을 맞아 연회하는 날을 거사일로 잡고 별운검(別雲劍) 특별경호원)으로 임명된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려 하였다. 하지만 미리 행사장을 답사한 한명회는 "창덕궁은 좁고 무더우니 세자가 입시하는것은 불편하고,따로 운검을 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라고 세조에게 건의했고,이것은 결국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난 ^신의 한수^가 됐다. 1456년 가을 한명회는 좌승지를 거쳐 다음해 이조판서ㆍ병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