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산업국가로 통합 이끈 ‘어머니의 얼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딸들을 보기 위해 전국 일주를 떠난 노부부는 청주, 부안, 부산, 울산을 거쳐 마침내 강원도 속초에 도착한다. 다섯째 딸 미애가 뱃사람인 남편 영균과 살아가는 곳이다. 미처 연락 받지 못하고 부모를 맞은 딸은 반가운 마음에도 대접할 변변한 음식이 없어 안색이 좋지 않다. 일터에서 막 돌아온 사위 영균이 술상을 들자 미애는 모자라는 술을 감출 요량으로 물을 탄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아버지는 모르는 척 술맛이 좋다며 칭찬을 하고, 설움이 복받친 딸은 밖으로 나가 흐느낀다.
“철없이 자란 네가 이제 어른이 된 걸 보니까 그저 기쁘기 한이 없다.” 위로하러 나온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딸을 감싸 안는다.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 시리즈 <팔도강산> 첫 편(1967)의 한 장면이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의 옷고름을 적시고도 남았을 이 장면에서 인자하게 딸을 격려하는 어머니가 바로 황정순이다. 풍족하게 사는 다른 딸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미애 부부는 산업근대화 시대의 가장 큰 희생자에 속했을 농어민층을 대변하는 캐릭터일진대, 그들은 궁핍한 삶에 불만을 품지 않고 부모의 격려 속에 착실하게 돈을 모아 어선을 장만하는 성실함을 보인다. 그 뒤에서 항상 자상한 웃음을 멈추지 않고 서있는 ‘어머니’ 황정순은 직접 선동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 못지 않게 강력한 메시지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1925년생인 그녀가 물론 처음부터 어머니 역할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극단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하여 허영 감독의 <너와 나(君と僕)>(1941)로 영화에 데뷔한 그녀는 라디오 드라마 <청춘행로>에서 주인공 ‘촌색시’ 역할로 목소리 연기를 하고 이를 영화화한 작품(1949)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골 여성이라는 이 배역은 이후 그녀가 주로 맡게 될 역할과 그녀가 표현하게 될 정서를 잘 보여준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의 유명한 법정 장면에서 그녀는 변호사 최은희가 감동적으로 변론하는 불쌍한 하층계급 아낙이 되어 눈시울을 적신다.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례적이라 할 작품 <육체의 고백>(1964)에서 황정순은 부산 환락가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는 클럽의 ‘프레지던트’ 마담을 연기한다. 어머니로서의 이미지가 교차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밑바닥 여성들의 연대’다.
그러나 이렇게 황정순이 대변했던 서민적 혹은 비(非)도시적 이미지는 이후 그녀가 ‘어머니’의 얼굴로 산업근대화 시대 한국사회의 ‘남겨둔 고향’ 역할을 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최은희가 주로 맡았던 역할처럼 교양 있고 합리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인고하고 이해해주면서 자리를 지키는 어머니상을 통해 그녀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산업근대화의 우군이 되었다. <마부>(1961)에서 처량한 마부 춘삼을 보듬으면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그의 아들로부터 어머니로 인정받게 되는 수원댁, <갯마을>(1965)에서 과부가 된 며느리의 재가를 돕고 다시 돌아온 그녀를 따뜻하게 반기는 시어머니, <화산댁>(1968)에서 엇나간 출세욕에 부당한 성공을 꿈꾸는 아들을 가슴 아프게 신고하는 어머니 화산댁 등 그녀가 맡은 역할은 ‘근대화’의 옆자리에서 이를 부단히 돕고 지켜주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러한 ‘스타로서의 어머니상’의 존재는 좁게는 근대화의 주체적 단위로서 ‘가족’에 대한 믿음과 향수를 자극하면서, 넓게는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하나의 가족과도 같은 결속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팔도강산> 시리즈의 약발이 떨어져갈 무렵 문화공보부는 이 작품을 TV연속극으로 만들어 다시 한번의 흥행을 모색하는데, 이를 몰랐던 영화제작진은 영화 완결편 <우리의 팔도강산>(1972)에서 어머니 황정순이 죽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 했다. 하지만 이를 본 공보부의 불호령으로 제작진은 부랴부랴 결말을 수정해야 했고, KBS의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드라마화된 이 시리즈는 1974~75년 당시 시청률 40%가 넘는 큰 성공을 거두며 유신체제를 성공적으로 홍보했다. ‘어머니’의 힘은 그렇게나 컸던 것이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첫댓글 1-배우로만 생각해야할까.
2-어머니 역 그대로로만 보여야할까.
3-청순가련형이어야할까.
4-배우와 여자로 보이면 안 되나?
5-황정순, 여자로 각인되었다면 어땠을까. 분명 여자는 여잔데도!
어쨌건 황정순은 배우고,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