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교회 새 부엌에서 처음으로 점심을 준비하였습니다.
근 5년만에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서로 교제하며 식사하는 즐거움을 누리니 참 좋았습니다.
또 부서마다 새가족들이 찾아오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청년부에도 청년 한 명이 와서 예배를 함께 드리고 교제하였습니다.
영지교회가 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 소중한 영혼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본문 주해)
시편 116편은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허락해주셨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저자와 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피난길에 올랐다가 상황이 역전되어 왕궁으로 귀환하여 지은 시가 아닐까 추측된다.
1~2절 : “주님,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기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니, 내가 평생토록 기도하겠습니다.”(새번역)
이 시의 서론으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3~11절 :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의 찬송시를 부르게 된 계기가 된 과거의 사건을 열거한다.
3~6절--사망의 위협을 포함한 큰 어려움을 시인이 겪었으며, 그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짖었다.
그가 드린 기도(3~4절)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고백한다.
하나님이 시인을 위험에서 건지신 것은 ‘기도의 행위’ 이전에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공의와 자비로운 성품으로 위험에 처한 자를 구원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그 성품을 알고 의지하는 자는 순진한 자(단순한 자)로 불린다.
7~8절--하나님께서 위험에서 구원하여 안식에 이르게 하셨음을 진술한다.
하나님은 시인을 ‘사망’에서 ‘안식’에 이르게 하셨다.
구원의 결과, 시인이 들어간 안식은 영혼의 평안함이며 그 처소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품’이다.
9절--“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새번역)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와 긍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생명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새로 얻은 생명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한다.
10~11절-- 시인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해 고통 중에서도 견고히 서 있음을 고백한다.
시인은 지난날 받았던 고통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즉, 그가 당한 고통의 배후와 저변에는 그가 끝까지 붙들었던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할 때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라고 하며, 신실하신 하나님만 의지하였다.
12~19절 : 시인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서원의 이행을 다짐한다.
12~14절--시인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보답하기를 자문한다.
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면 구원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반드시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의식을 반영한다.
서원으로서 찬양은 통상 감사제와 더불어 드려졌고, ‘구원의 잔’은 이런 감사제를 표상한다.
15~16절--“성도들의 죽음조차도 주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신다.”(15절, 새번역)
죽음 자체는 죄의 삯이기에 귀중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고 계신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리신 하나님께 종이 됨을 고백한다.
시인이 여호와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강박적 의무나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의 헌신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은혜,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그 은혜가 그를 강권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신을 ‘여종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가장 낮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종의 결박을 풀어 주셨으니 자신의 전 존재를 깊은 내면에서부터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있는 것이다.
17~19절--시인은 그가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 앞에서 지킬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는 회중 앞과 예루살렘 한가운데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할 것이다.
(나의 묵상)
시인은 극심한 환란 중에 드린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였고 또 하나님의 응답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4절)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7~8절)
시인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나 상황의 변화를 구하지 않았다.
오직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였다.
시인은 지금 사망의 줄에 매인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통해 영혼의 절대 평안을 되찾게 되었다.
이것을 보며 문제를 해결 받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복음을 알기 전 나의 기도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온통 문제 해결과 상황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잔뜩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것이었다.
응답의 내용은 이미 내가 정하여 하나님께 나왔고, ‘이렇게 부르짖는데 안 들어주시면 안 되지요’ 하며 하나님께 대드는 기도를 했던 것이다. 수많은 목회자(또는 기도원 원장)들의 부추김 속에서 적당한 헌금과 함께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는(?) 그런 기도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기도의 기쁨이라고 생각했고, 그 기분을 응답의 확신으로 여겼다.
복음을 알고 나니 이런 기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자기 백성이 드리는 이 무지한 기도에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를 생각한다.
주의 택한 백성이라도 현실적 삶에서 당하는 고난은 끝이 없다.
그런데 그 고난 중에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당면한 현실적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돈과 건강과 가족에 얽힌 많은 문제에 대해 열렬히 기도하던 것을 그치고,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주님께 연합된 자이기에 주님 주시는 평안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금 상황이 힘들지라도 그 상황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그 해결을 위한 기도를 드릴 수가 없다.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하실 것이 확실시되는 모든 상황에서 내가 달리 할 일은 없다.
오직 문제는 그런 주님을 모시고서도 내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15절 말씀을 주목한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평안을 얻은 상태에서 시인은 자신의 몸이 그대로 죽었을지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라 주님께 보석과 같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 죽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 육신을 죽게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 자체는 결코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영생의 은혜를 누리게 되자, 이제는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란 바로 ‘성도들의 죽음’ 즉 ‘십자가 삶’인 것을 생각한다.
탐심을 죽이는 십자가, 자기부인의 십자가를 따르는 일은 성도의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요, 이 죽음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이다.
30여 년 동안 해 왔던 종교적 기도를 그치고, 내 영혼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신 성령님의 역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것은 내 삶에서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주님,
육체에 묶인 마음을 풀어주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는 마음을 알고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내 영혼을 건지소서’ 잠잠히 기도하게 하시고
내 삶에 적극 개입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게 하옵소서.
이 진리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