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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어지던 날 , (1910 년 8월 29일 ) 제국주의 일본 은 경복궁에 일장기를 걸어 놓고 국권찬탈을 철저히 시행 했다.
그러나 이토록 뼈아픈 민족의 고난사를 막기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리며 오직 쓰러져가는 국가, 대한제국을 위해 몸바친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 1차 의병들, 손에든 무기는 농기구에 가깝다. 이들은 화승총과 맞섰다.
제 1차 항일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한 직후 위정척사파의 거두 유인석의 지휘하에 일어난 전국의 의병항쟁을 말한다 .
제 2차 항일의병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후 전(前) 참판 민종식의 지휘하에 강원도 홍천에서 기병(起兵, 1906년 3월 16일)했고, 산남에서 일어난 전(前) 중추원의원 정환직, 경주에서 최익현, 태인에서 임병찬, 경북 평해에서 신돌석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전국 122개소에 경무분견소를 설치해 의병들과 대치했다.
◆ 의암 유인석 선생이 기거하던 춘천의 옛집으로 아직 현존한다.
◆ 의암 유인석
제 1차 의병 활동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유인석 의병장이다.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고흥, 1842년 강원도 춘천시에서 출생했다.
철종때 이항로등에게 글을 배우다가 1868년 김평묵과 유중교를 스승으로 학문에 힘쓰고 위정척사 운동에도 참여 하였으며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한 존화양이 사상을 제천에서 강학하였다 .
1876년(고종 13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때 경기, 강원 유생 46명과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항반대을 벌였다 .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 제천에서 부패관리들을 척살했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1896년 제 1차 의병활동이다.
만주 회인현에 은신중 고종황제의 유지를 받고 일시 귀국 , 1898년 다시 만주로 갔다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도 총재에 추대되어 헤이그 밀사로 갔던 이상설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침공을 기도하던중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 되었다 .
1910년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성명회를 조직, 각나라 정부에 발송한 8,624명이 서명한 선언문에는 영문으로도 서명하는등 외교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15년 봉천성 관전현 방취구에서 74세를 임기로 병사하였다 .
◆ 일본군에게 체포된 평양 의병들과 가족 친지
1906년 5월 의병장 민종식의 홍주성 점령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의병투쟁을 토벌하기위해 일본군은 전국 12개소에 경무분견소를 설치했다.
◆ 1905년 1월 1일 경부선철도가 개통된지 2일후인 1월3일, 일본군은 철도파괴음모라는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헐버트 'Passing of Korea'에서 발췌)
◆ 제 2차 의병항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 제법 화승총을 들고 군대의 면모를 갖추었다. (FM 메캔지 촬영, 대한제국 의 비극에서 발췌)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후 민영환 선생의 자결, 전(前) 참판 홍만식의 음독자살, 전(前) 의정 조병세, 전(前) 참판 이맹재의 자결, 그리고 전(前) 참판 송병선의 음독자살 등에 이어 민종식등의 홍천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들풀에 불 번지듯 의병항쟁이 전개 됐는데, 이것이 제 2차 의병항쟁이다 .
◆ 1906년 6월 12일 전남 순창에서 체포되어 8월18일 대마도로 끌려가는 면암 최익현
면암 최익현은 1833년 12월 5일(음력)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김기현, 이항로의 제자이다. 철종 재위중인 1855년, 정시문과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 발행을 시도하자, 재정의 파탄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중건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 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 서원철폐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을 낱낱히 열거, 고종의 친정으로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 대원군 실각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1876년 명성황후의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로 된 격렬한 척사소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을미사변과 더불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을 해 그 당시 유학자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었다 .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반대,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을 촉구했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 임락등 80여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뒤 전남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지 대마도에서 주는 음식은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부, 단식을 계속하다가 4개월 만에 병으로 한 많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 태극기에 서린 애국혼, 불원복(不遠復)이란 글이 태극기에 써 있다. 이 말은 '멀지않아 다시 돌아 온다.'는 뜻으로 애국투쟁의 의지를 태극기에 써 넣어 투쟁 의지와 애국정신을 기린 것이다.
이 태극기는, 임진왜란 때 용맹스럽게 나라를 위해 산화한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 고광훈 의병이 자신의 형 의병장 고광순과 함께 전남 구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연곡사에. 본부를 두고 각지에서 일본군을 교란시켰다
형이 연곡사에서 전사하자 남은 의병으로 끝까지 싸우며 태극기에 이 글을 써 넣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어 3년간 진도로 유배당했지만 1930년 10월 26일 63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본군과 경찰은 전국 각처에서 의병들을 붙잡는 대로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현장에서 이렇게 목을 메달아 공개적으로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이를 갈며 항일감정을 삭혔고 의병이란 모습으로 분노를 토해냈다 .
◆ 122개의 분견소에는 의병 '현상수배' 사진과 죄목을 적은 수배자 명단을 걸어 놓았었다 .
◆ 의병포고 격문(義兵布告 激文)
◆ 왕산 허위
허위 선생은 1854년 4월 1일, 경북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 1895년 45세 때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단발령까지 실시하자 분개하여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날을 기하여 성주에 포진하여 관군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협공하는 관군을 막을 수 없어 이은찬, 조동호가 전사하자 충북 진천으로 진(陣)을 옮길때 고종황제로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자진 해산하였다. 1899 년 대한제국의 부름을 받아 수반 판사가 되었다 .
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체결 사건으로 이상천, 박규병 등과 격문을 살포하는 저항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허위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국 각지에 흩어진 의병들을 양주에 집결시키고 서울 탈환에 박차를 가하는 대책으로 연합군 13도 창의군 총대장에 이인영 을 임명하고 , 자신은 군사장이 되어 서울에 진입, 의병 2,000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
그후 이완용이 연천 진지로 사람을 보내 경상도 관찰사, 내무대신 등의 관직으로 회유를 획책했으나 일거에 거절하고 1908년 6월 11일 일본헌병대의 습격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평 에서 체포, 그해 1908년 10월 경성감옥(서울 서대문 형무소) 사형수 제 1호가 되었다.
사형집행시 간수가 유언을 물으니 "대의를 펴지 못했는데 유언은 무엇에 쓰랴" 하며 꾸짖고 교수형으로 순국하셨다.
그러나 허위 선생은 혼자만 의병항쟁을 한것이 아니라 그의 맏형은 항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댔고, 세째형 허겸은 의병투쟁을 함께 했다. 일본의 국권침탈 음모에 격렬히 저항한 허위집안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고향인 선산에 살기 힘들었고 견디다 못해 세째형 허겸은 허위의 4남 2녀를 데리고 1912년 서간도로 망명하였으며 사촌들도 뒤를 따랐다 .
결국 허위의 조카 허형식 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나섬으로 자손들은 해외에서 뿔뿔히 흩어지며 혹독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됐다. 해방후 친일파들의 득세속에 애국자의 희생정신은 빛을 바랬고, 훈장과 최저 생계비 조로 지급되는 몇푼의 현실에, 이들 후손들은 목이 메일 것이다. 수많은 재산을 '잃은 나라'를 찾고져 의병활동으로 모두 탕진하고 자손들은 타국과 국내에서 유랑인이 되어 유리걸식을 하는 부랑인이 됐다.
◆ 일본의 남한 대토벌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 (湖南義兵長)들.
가슴에 포로번호를 달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계홍, 김병철, 강사문, 나성화 의병장이다 .
- 호남 항일의병 투쟁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전국 의병들의 60.1%, 교전 회수의 47.3%를 차지할 만큼 호남지방은 의병투쟁의 중심지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집계한 통계에 의하면, 1908년, 교전수에 있어서 전남, 강원, 황해, 전북, 충남, 경북 등의 순이었고 1909년에는 전남, 전북, 경기, 경북, 충남, 강원 순이었다 .
일본은 1909년 9월 1일 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 보병 2개연대 2,260명을 동원하여 전남지역을 휩쓰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의병수가 17,570명으로 집계되었다.
◆ 이 곳은 의병투쟁 당시 의병들이 수감된 광주감옥 군산분(群山 分監)으로 굉장히 허술해 보인다.
◆ 의병장 임병찬
전남 옥구 출신으로(1851 - 1916년) 동학혁명 때 관직을 버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 최익현과 함께 의병 200명을 이끌고 순창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전남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하다가 1916년 거문도에서 단식, 순국하셨다.
무명 의병
◆ 호남 의병들이 사용했던 화승총들
◆ 의병을 토벌하기위해 완전무장을 갖춘 일본군이 열차 앞에서 승차준비를 하고 있다.
◆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 만행, 초토화된 항일의병 주둔지.
◆ 일본군이 살해한 사람의 귀를 잡고 웃으며 들어 보이고 있다.
◆ 붙잡은 의병의 목을 작두로 베고 있다.
음사오적 이완용의 변론 中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1900년대 의병
일본군에 체포된 의병들
첫댓글 귀잡고 웃는사진은 - 남경
작두는 중국군 사진 입니다.
관련 자료를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라스트미션 https://dodook.tistory.com/2566
요기 입니다.. 중국 사이트 가보시면 오피셜 사진 많이 있습니다.
오피셜 링크는 예전이라 기억나지 않습니다. 남경사진은 대략 30년전부터
보이던 사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