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는 미국의 동양학자로, 일본 도쿄대에 재직하면서 일본과 한국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한국 관련 자료를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그는 이 자료들을 미국 뉴저지 주립 럿거스대학교에 기증했다.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는 2008년 ‘그리피스 컬렉션’에서 한국관련 사진 592장을 발견해 복사했고 오랜 고증작업을 거쳐 이 중 358장이 기존에 보지 못하던 사진들임을 밝혀냈다.
경운궁 대안문을 나서는 명성황후 장례 행렬.
사진 뒤에 ‘황후의 운구 장면’이라고 적혀 있다. 이 사진들 가운데 명성황후 국장 사진은 특히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1895년 10월8일 시해된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2년여가 지난 1897년 11월 엄수됐다. 장례 행렬 순서대로 보면 명성황후의 신백(神魄)을 모시고 가는 신주가마 신련(神輦)이 가장 앞쪽이다.
미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그리피스가 수집한 명성황후 장례식 사진.
신백(神魄)을 모신 신련(神輦·신백을 모시고 가는 신주가마), 곡궁인들(哭宮人)의 행렬. 주위 건물들과 배경을 볼 때 장례 행렬이 운종가(종로)를 지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뒤를 좁은 길을 지날 때 임시로 쓰는 간단한 상여인 견여(肩轝·1면 사진)가 따라갔다.
그 뒤를 조랑말을 탄 곡궁인(哭宮人)들이 행렬을 따르고 있는데 배경의 건물과 산세로 확인하면 행렬은 광화문 육조거리를 지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명성황후의 재궁(梓宮·관)을 모신 대여(大與·큰 상여)가 행진했다.
동구릉에 있던 명성황후 무덤.
명성황후의 무덤은 시해된 뒤 1년간 동구릉 안에 있다가 청량리 쪽으로 이장된 뒤 현재 경기 남양주시의 홍릉으로 옮겨졌다.
명성황후 무덤 사진이 나온 것도 처음이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뒤 동구릉에 1년간 매장됐다가 청량리 쪽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구릉 안 홍릉 사진이 이번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사진 뒷면에 “황후 민씨가 묻혀있다”고 적었다.
이 무덤은 명성황후가 1895년 8월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뒤 집권한 김홍집 내각이 민심무마용으로 급조한 것이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실권을 다시 잡은 고종이 공사 중단을 명령해 완성되지 못했다. 이후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현재의 홍릉 수목원에 모셔졌다가 1919년 고종이 숨지자 현재의 경기 남양주시 홍릉으로 이장됐다.
시인 이상이 다녔던 경성고공(구 공업전습소)의 외관
공업전습소 건물 사진도 최초로 발견됐다. 1907년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공업전습소는 1916년 경성고공으로 승격됐다. 시인 이상이 다닌 학교이기도 하다.
러일전쟁 당시 경성 시내를 지나가는 일본군.
러일전쟁 당시 서울에 진입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아래쪽으로 군중과 건물 사이에 철로가 살짝 보이는데 당시 만들어진 경의선으로 추정된다.
이화학당 1회 졸업생인 신마실라·이화숙·김애식의 모습.
1914년 이화학당 1회 졸업생으로 여성 최초의 학사 학위를 취득한 신마실라, 이화숙, 김애식이 교정에서 찍은 사진도 처음 발견됐다.
김옥균의 청년 시절
어린 시절의 서재필
박영효의 청년 시절
의친왕의 청년 시절
흥선대원군의 중년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의 모습으로 유일하게 알려져 있던 사진의 이본(異本)이다.
기존 사진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전봉준이 1895년 2월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법무아문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기존 사진과 정황은 거의 같으나 뒤편 가마꾼의 얼굴이 돌려져 있어 몇 초의 차이를 두고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두 사진에 담긴 전봉준의 표정에도 차이가 있다.
강화 유수(정이품 관리) 조병식의 50대 초반
조병식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8촌으로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강화유수로 부임했다. 이 사진은 강화유수로 부임하던 조병식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그리피스는 '한국의 지방 관리'라고 적었다.
사진 우측에는 "가산대부 강화유수 겸 진무사 조병식 정복지도"라고 적혀 있어 사진의 주인공이 조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0대 초반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조병식은 1876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는데 동학교도들이 교조의 신원청원서를 보내오자 탄압했고 사태가 악화돼 정부는 조병식을 경질했다.
전봉준은 2차 봉기 살패후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잠적해 있었는데 조선사람이 현상금을 탈 목적으로 신고하여 체포하여 잡혀가 다음해 사형에 처해졌다.
조병식은 방곡령 당사자이다. 조병식뿐만 아니라 최익현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생들이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폄하하고 무시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人死留名)
새 녹두장군을 노래하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동학 농민 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동학농민군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
또 다른 설로는있는데,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의 동요라고도 볼 수도 있다. 이 노래는 조수미 등 몇몇 성악가들이 부르기도 하였다.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죽지꺾어 누운새야
녹두꽃이 다지도록
녹두밭에 누운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1871년 신미양요 사건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승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