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노루발풀
150620전라도닷컴[한송주의 길따라 인연따라12] 국악인 선영숙
설운 세상 줄풍류로 어루만지는 가야금 명인
지음들의 풍류인연은 그렇게 비롯되던 거였다.
20년을 훨 거스른 1990년대 중반, 전남도청 뒤 국악학원 골목의 어느 주막 난장. 때 아닌 줄풍류판이 거나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야금을 거느리고 두 아들은 아쟁과 해금을 잡고 아버지는 모갑을 맡은 오붓한 가족 공연이었다.
당시 선영숙명인은 국악배움터를 열어 후학들을 기르고 신상철선생은 남도예술고에서 회초리를 들었으며 두 아들은 부모로부터 걸음마를 익히고 있었다. 부부는 허름한 주막을 돌보아 가계에 보탰는데 무학회라는 장학회를 맺어 어려운 학생들을 돌본다는 풍문도 돌았다.
그런데 이참에 이웃들과 예인들을 불러 모시고 한바탕 신명을 꾸렸던 것이다. 주막단골이었던 불초는 팔자에 없는 귀명창의 허례를 둘러쓰고 게멩스럽게도 상청에 초대받았던 터였고.
아하 이것이 말로만 듣던 우리 내림의 향제줄풍류로구나, 온몸으로 흠뻑 세례를 받았었다. 이날의 오지고 푸진 풍류자리는 두고 두고 아리따운 추억으로 휘놀며 잊히지 않는다.
맑푸른 자연 속에 우리 가락 휘영청
2002년 봄, 이 부부국악인으로부터 또 한 번 초대를 받았다. 적벽풍광 휘늘어진 화순 이서에 넉넉한 국악배움터를 차렸으니 한 탕 어우르자는 청이었다. 그 동네는 또 불초의 고향인지라 이 희유한 시절인연을 느꺼워하며 버선발로 내달았다.
사단법인으로 너볏이 간판을 단 호남연정국악연수원은 두 채의 체험관과 식당 숙박시설, 실내 공연장, 난장을 고루 갖춘 반듯한 학당이었다.
“비좁고 소란스런 도회지에서 우리가락을 놀자니 늘 성에 안 찼는데 요참에 큰 맘 먹고 일을 저질러부렀어요.” 선영숙 원장의 귀띔이었다. “경치 좋고 공기 맑은 데서 노니 맘까지 후련해지고 지대로 신명이 나요.”
연정국악원에 얽힌 사연이 또한 푸근했다.
“1997년 가을, 대전 사시는 연정(燕亭) 임윤수(林允洙)선생이 예고도 없이 저를 찾아 광주에 오셨어요. 면식도 없는 국악계 어른의 방문에 깜짝 놀랐지요. 선생님은 멀리서 나를 지켜봤는데 열심히 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아름다워 격려차 오셨다면서 이번 팔순 잔치 때 들어온 부조금을 좀 나눌테니 후진 양성을 위해 쓰라고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어요.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오셔서 격려해주고 적잖은 재보시를 하셨는데 어른의 뜻을 살리고 평소 소망도 풀 겸 좀 무리를 해서 국악원을 설립했지요. 배움터에 선생님의 아호를 붙이고요.”
그 간절한 서원 덕이었는지 국악원은 처음의 우려를 씻고 금세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 가락 하는 스승들이 제대로 가르친다는 입소문을 타고 외진 곳을 멀다 않고 배울 이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전남도립국악단 상임지휘자를 지낸 부군 신상철명인과 판소리 고법 이수자 기세규명인, 그리고 두 아들 현석 현식이 합세하면서 15명의 절고 교수진이 짜였다.
정단원 외에도 예제 인연처에서 재능기부를 자청한 객원단원이 울력을 해 두레살림이 50명으로 늘었다. 이 비옥한 터전에서 활발발하게 공부한 새싹들은 경향의 예술 명문교에 쑥쑥 진학해 국악의 대들보를 기약했다.
연정두레는 그러나 재비나 꾼을 길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들을 찾아가 우리 가락을 나누고 함께 즐긴다. 갈수록 섧은 세상 우리끼리라도 우리 너울로 대동세상을 어루어내자는 곡진한 마음이 모여 있다.
“연정국악원은 우리 국악을 청소년과 지역주민들에게 보급 전승시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틈나는 대로 현장을 찾아가 어울마당을 마련해요. 전통문화배달사업이라고 해서 지역사회 행사에 맞춰 무료 공연을 하고, 토요일 오후에는 관내 초등학교에 가서 어린이들과 함께 ‘꿈나래잔치’를 펼치지요. 또 한 달에 두 번꼴로 양로원이나 장애인 시설에서 외로운 이들과 정을 나눕니다.”
연정국악원은 이런 문화봉사활동으로 2013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돼 성장의 뒷심을 얻기도 했다.
40년 공력 문화재 지정 빛봐
선명인은 숨 돌릴 겨를 없는 공생활 중에도 자기 공부에 게으르지 않아 크낙한 공덕을 성취해 냈다. 2010년 5월 김병호류 가야금산조가 전남도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고 그 처음이자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선영숙명인이 뽑힌 것이다.
1967년 10살 나이에 가야금에 입문한 지 43년만에 완성한 금자탑이었다.
“예능보유자 인증서를 받아든 순간, 그저 눈물만 한 없이 흐르더군요. 어린 저를 거두어 주신 강문득스승님이 제일 먼저 떠올라 선생님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되뇌었어요. 그 다음으로 늘 제 옆에서 거들어 주신 남편과 아들을 얼싸안고 또 다시 흐느꼈지요. 그리고 저를 이끌어 주고 보살펴준 선배 동료 후학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군요. 제 영광이 이 모든 분들 덕이라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습니다.”
선명인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야금을 잡고 강문득선생 등에게서 배웠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신체적 역경을 밝은 성품과 남다른 성실성으로 이겨내고 난해하기로 이름난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를 직심있게 익혀나갔다.
그동안 15번의 개인발표회와 1990년 서울 KBS국악관현악단을 비롯 여러 악단과 협연하고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가 작곡과 음반제작 등을 했다.
공부 욕심이 많아 중요무형문화재 제83호인 구례 향제줄풍류를 짬짬이 익혀 2002년에 이수자로 지정되기도 했다. 신상철명인은 현재 구례줄풍류 전수조교를 맡고 있다.
2005년 10월 경주신라문화제 기념 제23회 전국 국악대제전에서 선명인은 일반부 현악부문 대통령상(대상)을 차지함으로써 가야금산조의 당대 일인자임을 천하에 과시했다. 그리고 5년 뒤에 꿈에도 그리던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등극한 것이다.
하지만 선명인은 형식적인 문화재 지정 못지 않게 실질적인 전승 노력이 절실하다는 데 눈을 떴다. 그리고 전승의 토대가 될 연주음반을 제작하고 그걸 채보해 출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4년 만에 결실을 보았다. 선영숙명인이 구음과 연주를 하고 김인제교수(이화여대 출강)가 채보와 해설을 한 음반과 악보집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가 제작된 것이다.
난해한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 채보 쾌거
2014년 11월 13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는 매우 뜻깊은 연주회가 열렸다.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47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선영숙 가야금 발표회. 이날 공연은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 악보 출판과 음반제작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연주회는 말 그대로 한국 풍류를 대표할 재비들이 망라되어 걸죽하게 베풀어졌다. 가곡 중 우라, 언란, 편라, 편수대엽, 태평가 연주로 초를 내 남창 김호성, 여창 선영숙, 대금 조창훈, 가야금 김인제, 피리 박영기, 거문고 박상아, 해금 정길순, 장단 박거헌들이 점입가경 어우러졌다.
절정은 당연히 김병호류 가야금산조로 선영숙명인이 내질렀다.
뒤풀이 차례에 음반과 악보 제작에 따랐던 일화들이 소개되었다. 김인제교수가 돌이켰다.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는 연주하기가 까다롭고 음반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복원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선영숙명인의 연주가 없었으면 그 원형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을 겁니다. 선명인은 강문득선생에게서 김병호류를 온전하게 내려받아 오늘에 이었고 또 탁월한 공력으로 난해한 기법을 소화해 소중한 한국음악 유산을 되살려 냈습니다.”
가야금산조는 전남 영암 출신 김창조(1865~1919)선생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 기원이 시작되었다. 진양조로 열어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에 몰아가고, 여기에 우조, 평조, 계면조, 경드름, 강산제 등 여러 조를 비벼서 자재롭게 노는 국악 최상승의 기악 독주다.
1968년 가야금산조와 병창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다양한 유파의 전승이 이루어져 왔는데 김병호류만이 그동안 외면을 당해 왔었다. 특히 김창조선생에게서 사사한 김병호(1910-1968)의 산조는 농현이 유장하고 다른 파에는 없는 엇모리장단이 들어 있어 매우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도 말이다.
“가야금 산조의 본향인 전남에서 뒤늦게나마 문화재 지정이 성사되어 선인들에게 진 빚을 조금은 던 심정이어요. 더 열심히 해서 우리 고장의 전통예술을 빛내야 겠지요.” 선명인의 다짐이다.
‘적벽풍류’ 마당극으로 지역민과 덩더꿍
2014년 12월 22일 오후 2시 화순군 화순읍 하니움 문화센터. 연정두레가 마련한 ‘적벽풍류’ 공연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무대와 객석은 예인과 일반인이 따로 없는 대동마당으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화순적벽의 개방에 맞춰 그동안 여러 경사가 겹친 호남연정국악연수원이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사은 잔치였다. 화순적벽의 역사와 풍광을 국악극으로 꾸민 작품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각계각층의 화순군민이 한데 어울려 고향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여서 모두에게 뿌듯함을 안겼다.
연정두레는 최산두, 김병연 등 적벽에서 노닐었던 소객들의 풍류담에 화순 장터와 모후산 기슭을 배경한 민초들의 애환을 버물어 멋들어지고도 신명나는 판을 꾸려 큰 갈채를 받았다.
그렇도록 공을 들였다. 선영숙 원장이 총감독을 맡아 지휘를 하고, 음악은 신상철 단장이 책임을 졌으며 기획에는 기세규 부원장이 심혈을 쏟았다, 또한 연출은 차두옥 동신대 교수에게 맡겨 전문성을 더했고 시나리오ㆍ안무ㆍ연출은 김해진 한나래 전통무용 원장 등에게 맡겼다.
출연진도 숙련된 연정두레패 15명을 전진 배치해 기틀을 갖추는 한편 민간인 10명을 객원으로 출연시켜 유연성을 가미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레 악극단이 결성되었다. 연정악극단은 첫 공연의 성공에 고무되어 다음 무대 준비에 몸이 달아 있다.
“정성을 들이니 그만큼 보람도 크더군요. 버거운 일이긴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씩은 주민들을 모시고 악극 마당을 꾸며볼 생각이에요.” 선원장의 의욕은 끝없다. 그리하면 우리의 풍류인연도 너울너울 이어지리라.
글 한송주 대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