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사교과서상에 표현된 고려말 급진파사대부와 온건파사대부의 구분에 대해서 일단은 왕조교체를 지향했는가? 고려왕조유지를 원했는가라는 식으로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왕조교체기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그런 구분은 특별히 재론할것은 없스니 그후 흐름에 대한 표현이 문제입니다.
왕조교체를 지향한 사대부들은 조선초기 15세기 내내 관료세력을 형성하면서 권력을 유지한 계층으로 훈구파 내지 관학파로 연결하고 온건파 사대부는 15세기 후반 성종조때부터 서서히 정계진출을 해서 사림파로 연결하여 결국 16세기에는 사림파가 집권한다라는 도식을 전개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도식전개가 얼마나 타당한 소리인지 부터 따저보아야 합니다.
왕조교체지향 급진파사대부 - 관학파/훈구파
왕조교체반대 온건파사대부 - 사림파
이렇게 흘러간다라고 구분하는 교과서의 표현은 조금이라도 분석해보면 완전 오류투성이 논리입니다.
우선 온건파사대부라고 하는 사람들중에서 이미 태조때부터 출사한 사람들도 나타나고 늦어도 태종도때까지 출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아는 것입니다.
온건파인지 급진파인지 구분이 불분명한 사대부들도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양촌 권근이라고 봅니다.
권근인 왕조교체기인 1392년당시 귀양살이를 하다가 귀양에서 풀린후 다식 관직에 복직됩니다.
권근이 왕조교체에 어떤 입장인지는 확실히 나온 기록은 아직 못찾았스니 정도전 드라마상에서는 일단은 온건파사대부입장을 취하다가 스승 목은의 허락으로 출사를 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드라마대로 한다면 권근은 온건파사대부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조선조에 출사한 인물이 되죠.
그 다음에 세종때 명신이라는 황희도 조선건국후 두문동에 은거했기에 명백히 온건파사대부라고 볼수 있지만 황희도 태종때 출사를 합니다.
이밖에 다수의 목은 포은계통의 제자들 역시도 늦어도 태종때까지는 상당수가 출사를 하게 되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항은 교과서상으로는 김종직이 온건파사대부계통학파로 최초로 출사한냥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의 부친 김숙자는 이미 출사를 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김종직은 어릴적부터 집안이 이미 고려왕조를 그리워하는 온건파사대부가치관에서 벋어난 상황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과서에서 표현하기를 사대부의 다수는 온건파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향촌의 사대부들의 경우 고려말당시 역성혁명관련해서 어떤 확고한 정치적 견해를 들낼 입장이 전혀 못되는 그저 아무 힘없시 시골에 은거하는 선비들이 대다수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일정부분 관직생활을 하고 영향력이 있서야 역성혁명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들내고 주변사람들에게 인식을 시킬것인데 사실상 대다수 관직생활을 안하는 시골의 사대부들은 이렇다 저렇다 할 견해를 들내지 못하니 이들을 특별히 왕조교체에 반대한 온건파사대부라고 분류할수 있슬지가 의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여말 사대부들의 역성혁명관련 정치적 성향기준으로 분류한다면
1. 왕조교체에 적극 나서는 급진파 사대부 : 정도전 , 조준 등
2. 1번에 반대하는 온건파 사대부 : 이색,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
3. 관료계층이지만 1번과 2번 딱히 어디에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새왕조에서도 관직을 이어나가는 사대부로 정도전등의 일파에 협조한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반대목소리도 내지도 않은 사람들 : 권근 등
4. 관료계층이 아닌 대다수 향촌의 사대부가 해당되며 정치적인 견해를 내세울 입자이 전혀 안되는 사람들
이렇게 나누어야 할것입니다. 이들중 절대다수는 4번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다음에 온건파사대부 후예들이 김종직때부터 관료로 등장한것을 시작으로 삼는표현들이 많은데 이미 늦어도 태종때 2번부류사람들의 제자들의 상당수가 출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1번 계열사람들이 관학/훈구파라는 표현은 완전히 잘못된 표현일것이고 타당하다고 해도 태조때정도로 한정하여야 한고 늦어도 태종조후반~세종조때에는 1번과 2번의 후예(그 자손 및 제자)들간에 지배계층으로의 구분은 없어졌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헌데 왜 교과서상에 이런 식으로 도식을 전개하개 된 원인을 찾으라면 아마도 후대 16세기 이후 유림들입장에서 유학의 계보를 정하기 위해서 여말 목은/포은/야은등을 높히고 김굉필 조광조등으로 그 학맥을 연결시키려다 보니 그 중간고리고 김종직을 대표적 인물로 꼽아넣는 식의 정리를 하다보니 저러한 도식전개가 형성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객곽적인 정황으로 보면 이미 늦어도 태종후반기때에는 1번 2번의 후손제자들간에는 관직생활하는데 구분이 없어지다시피할 정도이니 김종직을 온건파사대부의 정계진출의 시작으로 보는 표현은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온건파 사대부들중에 하륜이나 권근 등 전향파들이 나왔다 해도 전향파들의 정치이념은 본질적으로 비전향파와 차이가 없는 터라 이들은 도덕의리론적 성리학 사상을 추구할수밖에 없는건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지요 온건파 사대부들은 개국 이전에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취해도 개국 이후에 원론적인 입장만 추구하는 비전향파와 현실적인 변화를 고려하는 전향파등의 분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성리학을 원리적으로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온건파 사대부들의 사상과 사림파의 사상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사림파의 시조 김종직이 정몽주의 절의를 계승하는 길재의 사상을 길재의 제자인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았기에
그 사상을 기반으로 찬탈로 부도덕하게 집권한 세조의 훈구 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질수밖에 없어서
김종직의 제자들이 도륙당한 무오사화가 그런 요인으로 촉발될수밖에 없었지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 찬탈을 비난하여 이를 본 세조 세력인 훈구 세력들이 반발하여 김종직 학파를 도륙할수밖에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