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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 32] 진상 모른 채 최순실 사과…탄핵 직행한 ‘최악의 악수’
JTBC 보도 다음 날인 10월 25일 오전 정호성·이재만·안봉근 비서관 3인,
그리고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우병우 민정수석, 김성우 홍보수석 등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모두들 더 늦어지기 전에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원장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과문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악수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때만 해도 최 원장(과거 유치원 원장을 지내 최 원장으로 호칭)을 사적으로 청와대로 부른 일이나
연설 원고를 몇 차례 보여주고 의견을 구한 것 정도만 문제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호성 비서관을 통해 원고를 전하고 의견을 구한 것은 사실이니 내가 계속 모른 체 버티면 결국 정 비서관이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가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를 한다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과문의 초점도 ‘대통령 취임 후 개인적 인연이 있던 최순실씨로부터 대통령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게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쳤다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0월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각종 연설문과 발언 자료 등이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유출된 것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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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사과문을 받아들이는 정치권과 언론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내가 미처 파악하지도 못한 각종 의혹에 대해 100% 인정한 것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최씨가 청와대 비서관들을 자기 집 수족처럼 부렸다든지, 국정에 깊숙하게 개입해 중요한 결정을 했다든지,
나와 공모해 기업들에 돈을 요구했다는 등의 의혹들도 그에 포함됐다.
나는 터무니없다고 여겼지만 사회 분위기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여론의 속성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 내 불찰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10월 25일 대국민 사과로 인해 사실상 나의 탄핵이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과 이후 민심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과를 하더라도 내가 인정할 부분과 내가 모르는 부분은 명확히 선을 그었어야 했다.
또 최 원장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만큼 사과를 그렇게 서두를 일도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최 원장이 나 모르게 어떤 일을 했는지 제대로 알게 된 시점은 탄핵 이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으면서였던 것이다.
10월 27일 김수남 검찰총장이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이영렬 서울지검장을 본부장으로 임명해 특별수사본부를 꾸렸다.
특수본은 독립적으로 수사하면서 검찰총장에게만 직접 보고하겠다고 선언했다.
청와대는 고려하지 않고 검찰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는 메시지였다.
우병우·안종범 등 줄줄이 사표 내며 청와대 기능 무력화
10월 24일 JTBC 보도 이후 워낙 많은 의혹이 사실이 아닌 것들과 뒤섞여 터져 나오는데,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들이 자꾸 보도되는 상황이었다.
나로서도 무엇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야 대책을 세우든 말든 할 텐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이니
수사를 지켜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이 판명 날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우병우 민정수석으로부터 상황에 대한 확인과 검찰의 입장 등을 보고받아야 했지만
우 수석은 “검찰이 자기들끼리 하려는 것 같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이미 청와대의 기능도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결국 10월 31일에는 이원종 비서실장을 비롯해 우병우 민정수석,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김재원 정무수석, 김성우 홍보수석과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이 모두 사직서를 내고 물러났다.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은 내가 1998년 정계에 입문을 할 때부터 18년 동안 정치의 생사고락을 함께한 관계였지만
헤어질 때는 개별적으로 짧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안봉근ㆍ이재만ㆍ정호성 전 비서관(왼쪽부터).
1998년 박 전 대통령의 정계 입문 이후 줄곧 함께 일했던 이들은 최서원 국정농단의 여파로 2016년 10월 31일 모두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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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사정도 각각 달랐다.
정호성 비서관과 안종범 수석은 당시 최서원 원장 문제로 수사 대상이 되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책임을 지겠다’며 나간 인사들도 있지만,
김성우 홍보수석 같은 경우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나갈 필요가 있느냐”고 붙잡아도
“나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사퇴를 고집했다.
나가겠다는 사람들을 어떻게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이렇게 한꺼번에 빠져나가니 청와대는 완전 공백 상태가 됐고 이후 정국 대응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최서원 원장이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다소나마 아는 인사들이 사라지니 이에 대한 나의 대응도 계속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어두웠지만 어쨌든 빨리 후속 인사를 통해 조직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후임으로는 최재경 전 대검 중수부장을 발탁했다. 가까운 정치인으로부터 적격 인사라고 추천을 받았다.
그런데 11월 20일 검찰이 안종범 수석과 정호성 비서관 등을 기소하면서 나와 공모한 혐의가 있다고 발표하자
최재경 수석도 11월 23일 사의를 표명했다.
임명장을 받은 지 5일 만이었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 역시 특검범이 통과되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불발로 끝난 김병준 카드…국회에 총리 추천 부탁해도 묵묵부답
나는 어떻게든 정국 흐름을 바꾸기 위해 11월 2일 새 총리로 김병준 전 부총리를 지명했다.
또 한광옥 인수위 국민대통합위원장을 새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모두 고심을 거쳐 결정한 인사였다.
김 전 부총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 비서실장과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는데
여권 내 여러 인사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그가 맡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 위원장은 동교동계 출신으로 민주당에서 오래 활동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나를 도왔고 정권 초기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황교안 총리도 한 위원장을 추천했는데, 푸근하고 원만한 인품이 강점이어서 이런 시기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각각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중용된 경험이 있는 만큼 파격적인 인사라는 평이 있었는데,
야당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후 전개는 희망과 다르게 흘러갔다.
야당에서는 국회와 상의 없이 인선을 결정했다며 반발했고 새누리당 비박계에서도 이에 동조했다.
이들은 거국중립내각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인사를 총리에 앉히고 내각도 국회가 합의해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통령중심제라는 헌법 취지에도 맞지 않고, 내각 구성을 위한 여야 협상 과정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오히려 혼란이 가중될 수도 있었다.
나의 이런 뜻을 전하기 위해 한광옥 비서실장은 11월 7일 국회를 방문했지만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지도 못했다.
여당도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야 내가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지만,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야 하는 국무총리는 야당의 협조 없이는 임명이 불가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1월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총리에 좋은 분을 추천해 주신다면 그분을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김병준 총리 후보자의 지명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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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11월 8일 국회를 방문해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나 “여야가 합의해 총리로서 좋은 분을 추천해 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나라가 굉장히 어지럽고 마치 전복이라도 될 것 같은 혼란한 상황이었고, 그에 대한 무한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양보해 일단은 사회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국회는 딱히 의견을 내놓지 않았고 결국 황 총리로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10월 29일부터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 시위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1만2000명(경찰 추산)으로 시작했으나 11월 중순이 되자 200만 명까지 늘어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어디선가 시위를 조직화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듬해 1월 25일 ‘정규재 TV’와의 인터뷰에서
“광우병과 이번 사태는 근거가 약했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다소 흥분된 상황에서 나온 정제되지 못한 표현이었다.
어쨌든 나는 시위 상황을 TV로 보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크다는 것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혼란이 점점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나로서는 어떻게든 입장 표명을 또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0월 25일 첫 사과문을 발표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10월 30일에는 최서원 원장이 독일에서 귀국했고 검찰 조사를 통해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확인되고 있었다.
언론도 각종 의혹을 추가로 계속 보도했다.
2차 사과문,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자괴감이 듭니다”
첫 사과문을 발표할 때만 해도 나는 최 원장에 대한 믿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고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11월 4일 발표한 2차 대국민 사과문에서 나는
“최순실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이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라고 잘못을 인정했다.
나는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고 밝혔다.
2016년 11월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서원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제2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고개를 숙인
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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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나는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고 했는데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참모진과 논의할 때 이 표현을 빼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나는 직접 이 문구를 넣었다.
다만 내가 최 원장을 불러 굿을 했다든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정말 사실과 다른 왜곡이었기 때문에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바로잡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또한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물론 내가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지만,
야당이 마치 내가 최 원장과 공모해 사익을 챙기려고 했던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경제공동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옷값도 내가 냈고 최씨로부터 돈을 받은 적도 없는데 왜 ‘경제공동체’로 묶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나는 향후 검찰 조사 등을 통해 이런 점들이 명확히 밝혀지길 바랐다.
선거 때마다 애타게 찾던 이들도 등 돌려
하지만 국회의 분위기는 검찰 조사 결과를 기다릴 틈이 없다는 양 급박하게 굴러갔다.
내가 겪은 바로는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행태가 변화무쌍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줄곧 각인된 것이지만 이때도 새삼 느끼게 됐다.
선거 때마다 나에게 많은 이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박빙의 지역일수록 내가 한 번 다녀가면 분위기가 달라져 선거 결과를 뒤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뿐 아니라 서울·수도권이나 충청 등 전국 곳곳을 돕기 위해 찾아갔다.
하지만 내가 어려워지자 대부분 등을 돌렸다.
선거 때마다 애타게 나를 찾았던 이들도 여지없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탄핵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지고도 안 던진 것처럼 행동했던 이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JTBC의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가 나온 2016년 10월 24일부터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12월 9일까지는 고작 47일간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상황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여당의 분열이 큰 요인이었다.
처음 태블릿 PC 보도가 나왔을 무렵 야권에서 요구한 것은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고 나에게는 2선 후퇴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립적 인사라고 판단한 김병준 전 부총리를 총리로 지명하자,
지명 철회와 거국중립내각을 요구하며 하야나 탄핵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 외엔 협상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여기에 여당 일부가 야당에 동조하면서 분위기가 이미 탄핵 쪽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11월 15일 국회에 제출된 특검법안은 일사천리로 17일 통과됐다.
심지어 특별검사는 여야 합의가 아니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합의해 2명을 추천하면 내가 1명을 임명하도록 되었다.
박영수 특검 임명, 화천대유 부패 상상 못 해
2016년 12월 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왼쪽)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박영수 특별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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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특검 후보는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과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이 올랐다.
이 두 명 중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을 선택한 것은 최재경 민정수석의 추천이었다.
당시 내 처지가 다른 누군가와 더 논의할 상황도 아니어서 그대로 결정했다.
당시엔 박 전 고검장이 화천대유와 엮여 뒤에서 그런 부패를 저지른 인사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11월 17일부터 국회에서 국정조사가 시작됐다.
12월 6일 1차 청문회에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나왔고,
7일 2차 청문회에는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 고영태 전 더블루K 이사, 장시호(최서원의 조카),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 등 최서원 원장 주변 인물들도 나왔다.
청와대에서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나갔다. 나도 TV를 통해 국정조사를 지켜봤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이 많았다.
‘고영태’라는 이름이나 얼굴은 이때 처음 봤는데,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국정조사를 통해 관련자들의 진술이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분위기는 더욱 악화됐다.
검찰 조사와 언론 보도도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검찰은 11월 20일 그동안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나를 공범으로 명시해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을 최서원 원장과 함께 일괄 기소했다.
이 무렵부터 정치권에서는 탄핵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검찰이 나를 공범으로 적시하면서 안종범 수석 등을 기소한 날,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의원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 야권 대선주자 6명과 정의당 대표 심상정 의원,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 천정배 의원을 포함한 8명이 모인 비상시국 정치회의에서
“국민적 퇴진 운동과 병행해 탄핵 추진을 논의해줄 것을 국회와 야 3당에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처음으로 탄핵 추진을 공개선언한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박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특권으로 형사소추를 당하지 않은 것일 뿐 구속될 만한 충분한 사유가 확인됐고,
법적으로 탄핵사유도 충분하다는 사실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신문으로 접한 ‘김무성, 탄핵 추진 앞장선다’
11월 21일 더불어민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탄핵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여당 내에서 나를 옹호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이
미 국정조사에서도 여당 의원들의 발언 수위가 야당 못지않았다.
11월 23일에는 김무성 의원이 대선 불출마와 함께 탄핵 추진에 앞장서겠다고 발언한 것을 신문 기사를 통해 접했다.
당으로부터는 어떤 언질도 받지 못했다.
그때 심정은 뭐라 형언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친박계인 이정현 의원이었지만, 당 지도부는 이미 모든 힘을 잃은 상태였고,
당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어떤 보고나 연락을 받지 못했다.
11월 28일에는 서청원, 정갑윤, 최경환 등 친박계 중진 의원들이 오찬 회동을 갖고
“개헌을 통한 질서 있는 퇴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으고 청와대에 전달했다.
나는 이런 의견들을 종합해 11월 29일 3차 사과문을 통해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해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
국회 일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국내외 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길이 옳은 것인지 고민한 결과였다.
나는 정치권이 논의해 무엇보다도 국정 혼란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국회에서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새누리당은 12월 2일 의총을 열어 나의 4월 퇴진과 6월 대선을 결정했다.
만약 임기 단축 제안이 받아들여졌더라면 한국 정치사가 크게 달라졌겠지만,
야당은 나의 임기 단축 제안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탄핵밖에 없다는 자세였다.
야당은 질서 있는 퇴진보다 나를 탄핵하는 게 정권을 가져오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촛불 시위 규모가 커지면서 여당 내 강경파도 ‘4월 퇴진-6월 대선’에 반발하며 야당의 탄핵론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결국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이 12월 3일 오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공동발의했다.
표결은 12월 9일로 잡혔다.
‘4월 퇴진’ 수용했지만 새누리당 상당수 탄핵으로 기울어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탄핵소추안은 찬성 234, 반대 56으로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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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표결을 사흘 앞둔 12월 6일 오후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청와대로 찾아와 나와 55분간 회동을 가졌다.
‘4월 퇴진-6월 대선’에 대한 나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4월 퇴진-6월 대선’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 뒤 곧바로 이정현 대표는 새누리당 의원총회를 열어 탄핵 부결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미 새누리당에서 상당수 의원이 탄핵으로 마음이 기운 뒤였다.
그래서 나는 탄핵안이 통과될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의 정당성에 대해 다퉈보는 수밖에 없었다. 새누리당에서 홍문종 의원 등
몇몇 의원이 탄핵 표결 직전까지 분위기를 바꿔보려 애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분위기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2월 9일 국회 표결에서 탄핵소추안은 찬성 234, 반대 56으로 통과됐다.
돌이켜보면 최서원 원장에 대한 언론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 사실관계를 확실하게 조사하고 보고를 받았다면
단호한 조치를 취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그랬으면 그 이후 벌어질 온갖 국정 혼란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잘 모르는 상황에서 최 원장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결과,
성급하게 사과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여론을 더 악화시키는 악수를 많이 뒀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2016년 총선에서 1당을 놓쳤던 것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경고가 한 차례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라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점을 뼈아프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