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설 잘 보내셨나요? 한 해의 처음, 음력 1월 1일 정월 초하루를 정초라고 합니다. 옛 부터 우리 민족들은 정초를 맞아 한 해를 시작하며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곤 했는데요. 스님은 정초를 맞이하여 정토회 전국 8개 지부 순회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날로 해운대법당에서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오전 10시에는 생방송으로 전국 정초기도 입재 법문을 하고, 오후 2시와 저녁 7시 30분에는 부산울산 지부 주간반과 저녁반 정회원들을 대상으로 두 차례 법문을 하였습니다.
새해 시작은 이렇게, 정초 법회
아침부터 겨울비가 내려 싸늘해진 날씨지만 입춘도 지나서인지 찬바람 속에도 봄기운이 느껴집니다. 법당으로 들어서는 대중들의 얼굴도 환한 봄꽃 같았습니다. 손을 맞잡고 새해 인사를 옹기종기 나누는 모습이 따뜻합니다. 법회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봉사자의 얼굴에도 함박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법회 전부터 행복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오전 10시, 어느덧 겨울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3일 간 정초기도를 시작하기 때문에 10시 생방송 법회에서 스님은 정초기도를 하는 마음자세와 목적에 대해 먼저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정초기도를 하는 이유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준비를 잘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옛날부터 ‘시작이 반이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시작이 반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의 뜻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금방 시작하는 법이 거의 없어요. 준비기간이 굉장히 깁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면 준비를 그만큼 철저하게 해서 시작을 해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 준비기간을 다 계산해보면 시작할 때 이미 전체 일의 절반을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준비 없이 하는 사람은 ‘시작이 반’이라고 하면 그냥 공짜인 것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준비를 잘하는 사람은 벌써 시작했다 하면 이미 절반을 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초기도를 하는 이유는 한 해를 보내는 시작점에서 마음 준비를 잘해서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딱 마음 준비를 해서 시작하면 사고가 적어요. 덤벙대고 정신없이 하다 보면 사고가 많이 생기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정초기도는 ‘항상 깨어있어라’, ‘준비를 잘해라’ 이런 의미가 담겨 있어요. 수행자는 1년 내내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준비를 잘해야 하지만, 그래도 한 해를 시작하는 3일은 특히 준비를 잘해야 해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첫째, 여러분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좀 오래 살아본 경험에 의한 거예요. 둘째, 제가 여러분보다 전 세계를 좀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1월 한 달만 해도 비행기를 14번 타고 버스는 수없이 탈 정도로 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쉬지 않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니까 세상 물정에 대해서 여러분들보다 좀 많이 알 거예요. 가수가 누구니 탤런트가 누구니 하는 소소한 건 모르지만 여러 나라의 풍속을 둘러보고 알게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세계를 둘러보면 그 나라만의 역사와 문화, 사람 사는 모습을 다양하게 볼 수 있습니다. 1월만 하더라도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인도 사람들 사는 것도 봤고, 방글라데시에 가서 방글라데시 사람들 사는 것도 봤고, 미얀마에서 로힝야족 난민 88만 명이 넘어와 산다는 난민촌에 가서 3일씩 머물면서 피난민들이 사는 모습을 봤고, 네팔에 가서 해발 3천 미터 산속 아주 가파른 곳에 계단식 밭과 논을 만들어서 농사지어 먹고사는 사람들도 봤어요. 이렇게 여러 가지 사는 모습을 보다 보면 꼭 스님이 아니라도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 들까요?
‘사람 사는 게 뭘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토끼나 다람쥐가 그저 먹고사는 것만 하듯이, 해발 3천 미터 산비탈에 붙어서 저렇게 농사짓고 사는 사람도 먹고사는 게 문제란 말이에요. 난민촌에서도 UN에서 주는 음식만 기다리면서 살잖아요. 그런 상태가 10년이 갈지 20년이 갈지 몰라요. 먹고사는 것조차 어려우면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해집니다.
그런 걸 보면 사람 사는 게 별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사람 사는 게 굉장한 줄 알아요. 밖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은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을 것 같고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복잡해요. 그런데 산비탈에 사는 사람들이나 난민들은 바깥에서 보면 너무너무 불쌍해 보이고 ‘아이고, 저리 사느니 그냥 죽지, 살아서 뭐하나? 저게 사람이야, 짐승이야’ 싶지만, 정작 본인들은 얼굴도 밝고, 얘기를 해보면 뭘 얻으려고 하기는커녕 물이라도 한 그릇 떠주려고 하고, ‘불편한 게 없으세요?’ 라고 물어봐 줘요. 그러니 자연히 ‘사는 게 과연 뭘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절하기 싫고 기도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대신에 바랑 하나 메고 히말라야 산속이나 캘커타 뒷골목을 한 번 걸어 다녀 보세요. 그러면 굳이 경전을 안 읽고 책을 안 봐도 욕심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사람들 사이에 정말 귀한 게 뭔지를 저절로 알게 돼요. 그런 고생을 하기 싫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만 절 좀 하라는데, 그것도 하기 싫다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죠.
지금 내가 시비하던 것이 죽음 앞에서도 정말 시빗거리가 될까요?
굳이 절이나 참선을 안 하더라도 이런 삶의 현장을 쭉 둘러보면 지금 내가 뭘 가지고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 나한테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됩니다.
‘내일 병이 나서 덜컥 죽는다고 할 때, 지금 나는 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내가 부부지간에 갈등하고, 애가 취직을 했니 안 했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안 일어나니 갖고 싸우고 신경질 내는데,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이 될까?’
이런 생각을 저절로 하게 돼요. 오늘 병원에 가서 암 4기라는 진단이 덜컥 나와서 살 수 있는 기간이 4개월이라고 하더라도 빙긋이 웃을 수 있을까요? 죽는다며 난리를 피울 거 아니에요. 지금 내가 시비하던 것이 그럴 때도 정말 시빗거리가 될까요?
우리 삶이 끝나는 게 내일일지 모레일지 몰라요. 당장 오늘 오후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그런 준비를 일상적으로 늘 하고 있어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정치인들이 몰락하는 거 요즘 보셨죠? 밖에서 보면 권력이란 봄날의 꽃처럼 하잘 것 없는데, 그 권력에 물이 들면 그게 금방 지나가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도 안 해요. 영원할 것 같이 생각합니다.
젊을 때는 젊음이 영원한 것 같이 생각하고, 재물을 가진 사람들은 재물이 영원할 것 같이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잃거나 재물을 잃었을 때 그 초라함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건 안 가져본 편이 훨씬 나은데, 여러분들은 그래도 한 번 가져보고 싶어 하잖아요. (모두 웃음)
스포츠 선수나 인기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그 인기가 없어졌을 때의 초라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꽃이 아름답지만 떨어지면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불을 땔 수도 없고요. 낙엽은 불이라도 때죠. 그러나 그걸 쥐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몰라요.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온 세상 사람이 그 사람을 영웅이라 칭송하더라도 그가 괴로워하면서 한을 품고 죽었다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애국자고 훌륭하다 하지만 그게 본인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거예요. 반대로 본인은 맛있게 먹고 즐겁게 인생을 살았다 해도 세상 사람에게 원망을 듣는다면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여기 두 가지가 결합해야 해요. 첫째, 내가 세상 사람에게 뭔가 조금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해요. 이런 명예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 사람은 조금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해요. 둘째, 그런 내 삶에 대해 내가 자긍심을 가져야 해요. 내가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거나, 고문을 당해 죽더라도, 비록 통증은 있지만 내가 이 삶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하고 원한을 품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수행자가 돼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수행입니다. 수행이 뭘까요?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는 게 수행일까요? 아니에요. 자기 삶이 나날이 행복해지는 것이 수행입니다. 나날이 행복해지려면 하루하루 눈뜨고 살아가는 자기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그것이 비록 고생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의미를 가져야 해요. 그래서 먼저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여러분 각자예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소중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신들과 땅의 모든 인간 가운데서 너 자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다’ 라고 하셨어요. 각자 우리 개인이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름으로도 훼손할 수가 없어요. 그런 자기 소중함을 알아야 해요. 그것이 수행이에요. 누구 때문에 내가 괴로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자리(自利)’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조금 도움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타(利他)’예요.
명절 후유증 없애는 방법
정초에 우리가 사는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조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수행자는 항상 돌아봐야 하지만 특히 정초에 좀 돌아봐야 해요. 정초에 명절 후유증 있는 사람 손 들어봐요. (모두 웃음)
명절 후유증이나 스트레스가 있었다면, 이 법문을 듣고 싹 내려놔야 합니다. 저는 잔소리 들을 부모도 없어요. 부모가 살아 있으니 그래도 잔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잖아요. 자식이 살아 있으니 그래도 찾아와서 인사라도 하잖아요. 죽으면 잔소리할 사람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아있을 때는 귀찮아하면서, 또 돌아가시고 안 계시면 ‘시원하다’ 이렇게 생각을 못하고 눈물짓고 야단입니다. (모두 웃음)
그러니 오늘부터 3일간 정진을 하시면서, 첫째, 명절 스트레스를 싹 푸세요. 둘째, 내가 작년에 시행착오 겪었던 것을 올 한 해는 반복해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무슨 잔소리를 들어도 ‘아이고, 그래도 잔소리하는 부모가 있어서 고맙다’ 라고 하고, 남편이나 아내가 뭐라고 해도 ‘아이고, 그래도 남편이 있으니 이런 소리 듣지,’ ‘그래도 아내가 있으니 이런 소리 듣지’ 라고 받아들여 보세요. 잔소리하는 건 듣기 싫지만 짐을 들 때나 밥 먹을 때는 서로 도움이 되잖아요. (모두 웃음) 이렇게 두 가지가 다 있는데 우리는 한 가지만 보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올 한 해는 그런 소소한 것에 집착해서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내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가꾸어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 보세요. 종업원이 됐으면 사장이 ‘아이고, 저 친구 덕분에 우리 가게가 유지된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주고, 사장이 됐으면 종업원이 ‘아이고, 사장님 덕분에 내가 밥 먹고 산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주면 어떨까요? 꼭 싸워서 하나라도 더 빼앗고, 하나라도 덜 줘야 속이 시원할까요?
지금 출발합니다
새해에는 좀 다른 인생을 한 번 살아봅시다. 잘 안 되더라도 연초에는 목표를 정하고 결심을 해야 할까요, 안 해야 할까요?”
“결심해야 해요.”
“결심을 해도 잘 안 돼요. 저도 안 될 거 다 알아요. (모두 웃음) 그러나 안 된다고 안 해버리면 발전이 없어요. 안 되더라도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고, 안 되면 또 도전하고, 이러면서 세월이 흐르다 보면 되는 때가 있게 됩니다.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을 해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3일간 정성을 기울여서 나 자신에게 다짐을 해보세요. 나의 정성이 저 하늘에 통하도록요.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저도 모르지만 있다고 치고(모두 웃음) 하늘이 감동을 하도록 그렇게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의 시작을 맞아 조금 더 목표를 분명히 해서 도전을 해보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명상을 하는 대중들의 모습이 사뭇 달라 보입니다. 저마다 한 해를 시작하며 오늘 들은 법문을 마음 깊숙이 저장하는 듯했습니다.
법문 후에는 다 함께 300배 정진을 했습니다. 대중들은 절을 하며 법문을 마음에 새기고 새해 새날의 마음을 정성스럽게 다졌습니다.
절을 마친 대중들은 “법문 후 300배 정진은 다리 운동이 아니라, 마음의 운동이었어요. 올해가 희망적입니다”, “오늘 처음 왔어요. 절에 다니며 정초기도 접수만 했었는데, 법문을 들으니 정초기도에 대한 마음이 정성스러워지고, 올해 목표가 다듬어집니다”며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소감을 말해주었습니다.
부산울산 지부 주간 정초순회법회
오후 2시에는 다시 정회원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울산 지부의 정회원 250명이 참석했습니다. 유수 스님의 인사 말씀을 시작으로 참가한 정토회 별로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인사를 했습니다.
특히 사하정토회 명지법당 도반들은 하모니카와 기타를 연주하며 개사한 노래를 불러서 큰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이어서 정회원들과 통일특위의 1년의 활동 영상을 보며 한 해 동안 많은 활동을 한 서로의 수고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수행을 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느라 수고했습니다. 여러분이 있어 정토회가 유지되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격려와 함께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정초를 시작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 후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의문이나 문제 제기, 새로운 제안 등 무엇이든지 편안하게 얘기해 보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누구를 비난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이런 답답함이 있고, 내 마음속에 이런 미움이 있고, 그래서 내 마음을 내어놓는다’ 이런 관점이에요. 네가 싫거나 미워서가 아니라, 너를 보면 내 마음이 답답해지는 내 문제에 대해서 내어놓겠다는 관점에서 편안하게 뭐든지 자유롭게 발언을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스님이 편안히 말해보라고 하여서인지, 정회원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고뇌와 의문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직장을 다니다 쉬게 되면서 남편에게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것도 눈치 보이고 봉사활동도 신경이 쓰인다는 질문자와의 즉문즉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수행한 지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병행했는데, 직장이 폐쇄가 되면서 6개월 동안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이제 실업 급여가 끝나서, 직장을 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됩니다. 친정어머니가 아프셔서 모시고 같이 사는데, 어머니를 모실 당시에는 남편이 어떤 마음인지 상관하지 않고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의논도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수행하면서 제가 제 모습을 좀 보고 나니 남편 눈치를 보게 됩니다. 직장을 구해서 직장 다니면서 봉사를 병행할지, 직장을 안 다니고 남편한테 팍 숙이면서 봉사를 병행할지 갈등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부모님을 모시고 살든, 모시지 않든, 내가 직장을 다니든, 직장을 안 다니든, 이건 개인의 선택에 속합니다. 어떤 것은 수행자가 가야 될 길이고, 어떤 것은 가지 말아야 될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관점을 잘못 잡고 있는 겁니다. 부모를 모셔도 되고, 안 모셔도 되고, 직장을 다녀도 되고, 안 다녀도 되고, 봉사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질문자가 좋을 대로 하면 됩니다.
직장을 다녀도 편안하고, 직장을 안 다녀도 편안하고, 부모를 모셔도 편안하고, 부모를 안 모셔도 편안하고, 뭘 해도 편안해야 수행자입니다. 어머니를 모셔 오지 않아서 혼자 고통받는 어머니를 보는 마음이 불편하다면, 착한 딸이라서 마음이 불편한 걸까요? 아닙니다. 수행이 안 된 겁니다. 어머니를 모셔 와서 내가 보살피면, 남편한테 미안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편한테 숙이는 착한 여자일까요? 아닙니다. 수행이 안 된 여자입니다.
직장을 다니느라 정토회 활동을 못 해서 정토회에 미안하다면, 착실한 정토행자여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수행이 안 된 겁니다. 직장을 안 다니고 정토회 활동만 해서 남편한테 미안하다면, 남편을 고려하는 착한 여자여서 미안한 걸까요? 아닙니다. 수행자가 안 돼서 그런 겁니다. 수행자가 되면, 이래도 편안하고, 저래도 편안하고, 뭘 하든 자유롭습니다. 이게 수행자입니다.
이거 하면 편안하고, 저거 하면 편안하지 않으니까 이걸 한다면, 이것은 중수에 해당해요. 이걸 해도 불편하고, 저걸 해도 불편하다면 하수에 해당해요. 이걸 해도 괜찮고, 저걸해도 괜찮은 것이 상수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하수 수준입니다 (웃음).
환경 실천도 하고, 전법도 하고, 모금운동도 하고, 정토회에서 하는 이런 봉사 활동들은 내 개인을 떠나서 사회 전체로 보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인이 가는 길이에요. 이런 좋은 일을 하는데도 돈을 못 벌어오는 것 때문에 남편한테 기가 죽는다면, 그것은 돈이 자신의 가치 기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로 넓은 세상을 생각하고, 하나뿐인 지구를 생각하고, 이 지구 상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나라의 평화를 생각한다면, 지금 질문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결혼을 했니 안 했니, 돈을 버니 안 버니,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소중한 일이다’ 하는 당당함과 자부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남편이 ‘돈도 못 벌면서 뭣 때문에 봉사를 하느냐’, ‘차라리 직장에 가서 돈을 벌어라’, ‘내가 벌은 돈을 왜 네가 거기에 쓰느냐’ 이런 말을 해도 아무렇지 않아야 합니다.
일제 시대에 부잣집 아들이 그 부모의 재산을 가지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 주고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부모가 볼 때는 어때요? 아들이 부모가 모아놓은 재산을 다 팔아먹는다고 난리겠죠. 그러면 그게 불효일까요? 부모 입장에서는 불효가 맞아요. 그러니 정말 이 사람이 효자라면,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좋은 일 하는데 왜 그러세요’ 이렇게 하지 않고, ‘알겠습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는다는 생각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는 가족밖에 못 보시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가족이 살려면 나라가 살아야 된다. 아버지는 모르시니까 이런 일을 못 하시는 거고, 아버지도 아시면 이런 일을 하실 거다. 모르는 아버지를 나무란다고 될 일은 아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아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독립운동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독립운동하는 곳에 돈을 좀 대서 명예를 얻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질문자는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당당하지가 못합니다. 말은 정토회 다니고 수행이 어쩌고 해도 그저 돈이 가치 기준입니다. 직장 가서 돈 좀 벌 때는 남편한테 ‘나도 번다’ 이렇게 고개에 힘주었는데, 지금은 돈 못 번다고 기가 죽어서 ‘내가 돈도 못 버는데 엄마까지 모셔와서 직장도 안 나가고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남편한테 당당하지 못한 겁니다. 자기 정체성을 돈에 두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독립운동가 대장이 진군하다가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총을 놓고 3년 상을 치른다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다 궤멸돼 버렸습니다. ‘부모가 죽어도 상관하지 마라’, ‘독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정말 이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그 길을 충실히 가는 것이 효도입니다. 효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당장 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게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한테 ‘내가 이런 좋은 일 하니까 어머니의 요구를 못 들어주겠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는 봉사를 하면 할수록 남편한테 더 겸손해야 합니다. 남편이 벌어주는 돈 갖고 내가 밥 먹고 봉사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남편이 뭐라고 하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나는 떳떳하고 당당하지만, 그분의 입장을 생각하면 ‘화낼만하다. 그럴만하다’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나 비굴하게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질문자가 돈을 못 버는 것에 대해서 남편이 처음엔 좀 불만일 수 있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이렇게 겸손한 여자를 만나겠어요?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장가를 갔니 안 갔니, 시집을 갔니 안 갔니, 잔소리를 하게 되지만, 집에 가서 ‘어머니, 죄송합니다’ 하고 집안일 거들어 주고, 내가 할 일은 딱 바로 하면, 처음에는 불만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떳떳하고 반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네가 가는 길이 낫다’ 이렇게 평가하게 됩니다.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 이런 분명함이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남편이 돈을 못 벌 형편이 되면, 내가 봉사를 그만두고 돈을 벌 수도 있는 겁니다. 정토회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정토회에 미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토회는 굶어 죽는 인도 사람도 돕고, 로힝야 난민도 돕는 곳인데, 남편이 굶어 죽는다는데 안 도울 이유가 없잖아요. 다른 형제들이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있는데 내가 모시겠다고 나서면 문제지, 아무도 모실 수가 없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내 부모이기 이전에 버려진 사람을 돌보는 것은 우리 수행자가 마땅히 가야 될 길이에요. 기꺼이 돌봐야 해요. 왜 출가한 사람이 부모를 돌보느냐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부모이기 때문에 돕는 게 아니라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돕는 겁니다.
여러분들 인생에 떳떳함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 앞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떳떳해야 해요. 잘났다고 교만하라는 게 아니라 떳떳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원하는 것을 내가 지금 해줄 수가 없습니다. 못 해주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는 떳떳해야 되고, 주관적으로는 못 해주니 겸손해야 합니다.
남편을 존중해야 하고, 부모를 존경해야 하지만, 여러분들은 남편의 노예가 아니고, 부모의 노예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주인입니다. 스님한테 여러분들이 비굴하게 굴 필요가 뭐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스님의 노예가 아니잖아요. 스님이 좋은 일을 하시니까 존경할 만한 건 존경하는 것이고, 도움을 받은 것은 고맙게 여기지만, 내 인생은 또 내 인생입니다.
남편한테도 ‘봉사하는 것이지 내가 뭐 나쁜 짓하러 다니나. 내가 돈을 허투루 쓰나. 부부지간에 이것도 이해 못하나’ 이렇게 말하지 말고, 남편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으니까 ‘미안해요’ 라고 해보세요. ‘직장이나 가!’ 그러면 ‘네, 알았습니다’ 하고 안 가면 됩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이혼하게 되는 것 아니냐? 아닙니다. 나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감이 딱 있어야 됩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겸손하지도 못하면서 목에 힘만 주고 큰소리치면서 일도 안 하면 다른 여자 찾습니다. (모두 웃음)
질문자는 지금 인생에 대한 자세가 불분명해요. 이걸 확실히 잡는 것이 수행입니다. 절만 한다고 수행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비굴해지고, 어떤 때는 교만해지는 나를 보면서 ‘오늘 내가 또 수행자로서 정체성을 놓치고 비굴했구나’, ‘내가 또 수행자의 정체성을 놓치고 교만했구나’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면서 참회의 절을 하는 게 수행입니다. 앉아서 명상만 한다고 수행이 아니에요.
관점을 그렇게 딱 가지면 직장 가고 안 가고, 어머니 모시고 안 모시고 하는 문제는 저절로 정리가 됩니다. 내가 모실 형편이 되면 모시고, 형편이 안 되면 못 모시는 겁니다. 내가 할 만큼 하면 되는데, 우리는 한다 못 한다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를 피웁니다. 그건 가을에 낙엽 하나 떨어지는 거 보면서 맨날 우는 사람과 같고, 봄에 꽃 피는 것 보고 맨날 웃는 사람과 같습니다. 때가 되면 피는 것이고, 때가 되면 지는 겁니다. 관점을 그렇게 딱 잡아야 복잡하게 보이는 세상이 교통정리가 됩니다. 그래야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이 딱 정립이 돼야 이래도 행복하게 살고, 저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절을 해도 해결이 안 되면, 사막에 떨어뜨려서 ‘물 한 방울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는 걸 겪든지, 히말라야 산속에 떨어뜨려서 ‘발만 안 얼었으면 좋겠다’ 하는 걸 겪으면, 저절로 다 해결이 됩니다. 등 따시고 배불러서 생긴 병이에요.
여러분들이 물으니까 이렇게 얘기해주긴 하지만, 직장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머니를 모셔야 하나 안 모셔야 하나, 이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렇게 하나하나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이 안 됩니다. 이거 해결하면 저게 문제고, 저거 해결하면 이게 문제예요. 그래서 항상 근본을 딱 꿰뚫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개는 흙덩이가 날아오면 흙덩이를 쫓습니다. 영리한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쫓습니다. 사람을 확 쫓으면 흙덩이가 다시 날아올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흙덩이를 쫓으면 계속 날아옵니다. 두더지 잡기 게임 아시죠? 방망이로 이거 때리면 저거 올라오고, 저거 때리면 이거 올라오잖아요. 두더지가 올라올 때마다 계속 때려야 됩니까, 전원 스위치를 확 빼버려야 됩니까?”
“감사합니다.” (모두 웃음)
법회가 끝난 후 질문자는 이렇게 소감을 전해 주었습니다.
“막혔던 하수구가 뻥 뚫린 듯 시원해졌습니다.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한 수행자의 관점을 바로 잡으면 어디서든 괴롭지 않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혼났는데 웃음이 나고 마음이 가볍네요. 신기합니다.”
질문자뿐만 아니라 수행자로서 당당하고 겸손하게 살고 있는지 참석한 모두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전에 질문하기로 신청한 사람은 5명이었지만 스님이 “오늘 그냥 가면 억울한 사람은 더 해보라” 라고 하자, 3명이 더 손을 들어 총 8명이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즉문즉설 후 스님은 정회원들에게 예산 집행 과정을 알려주고 수행자들은 ‘청정’하고 ‘화합’할 것을 강조하며 법문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중들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배를 올리고 손을 잡고 스승의 은혜를 불렀습니다.
해운대 법당에서 준비해 준 맛난 떡을 손에 쥐고 돌아가는 정회원들의 얼굴이 흐렸던 하늘이 갠 것처럼 맑았습니다. 떡도 맛나지만, 한 해를 살아갈 마음을 다시 다졌기 때문이겠지요.
해질 무렵 찬바람이 몰아치는 속에서도 300 여 명의 정회원들이 해운대법당에 모였습니다. 법회 시작 전 해운대법당에서 준비해준 맛있는 떡도 나누어 먹고 새해 덕담을 나누는 정회원들의 면면에는 행복과 법을 향한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유수스님의 여는 인사로 시작된 법회는 참가자 소개 및 정토회 별 정회원 퍼포먼스 영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노래와 꽁트가 곁들여지니 하나의 멋진 식전 공연이 되었습니다. 이어 대금 연주로 운치를 더한 식전 행사는 멋과 흥이 어우러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참가자 소개 및 정토회 별 정회원 퍼포먼스로 삼십 분을 예상했으나 웃고 즐기는 사이 어느덧 1시간이 훌쩍 흘러버렸습니다.
스님은 정회원들에게 설을 잘 보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명절 전후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대처하는지, 수행자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으로 법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에는 총 9명이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스님은 마무리 말씀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수행자의 삶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7시 30분에 시작한 법회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어느새 11시를 향하고 있었는데요. 늦은 시간이었으나 정회원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내일은 대구에서 정초법회가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도, 일주일 간 스님의 하루와 함께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을 다져보면 어떨까요?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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