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개인전 2018. 3. 14 - 3. 20 광주·전남갤러리(T.02-725-0040, 인사동)
숨은 자아 찾기, 소담히 내려앉은 감성 언어
김경원의 화면은 흰 여백에 써내려간 서정시를 닮았다. 하얀 백지를 좋아하는 작가의 성정(性情)이 작품 속 대상에 고스란히 녹아내린 탓이다.
계획적인 그림이 아닌 직관적 믿음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 그것은 작가의 숨은 내면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감상자에게 치유와 안식을 제공하는 내밀한 동력이다.
글 :안현정(예술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의인화된 꽃, 분채로 올려낸 작은 세계
화중왕 모란, 군자를 형상화한 매화, 현대를 견인하는 꽃 장미, 존재감 넘치는 화려한 꽃들을 가운데 작가의 눈을 사로잡은 꽃은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흰색의 야생화였다. 중년과 맞닿은 지점은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리기 위한 독백 같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서울보다 낮은 기온의 공기 좋은 곳(동백)으로 이사를 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2006년, 이유모를 끌림에 의해 들어간 작은 꽃집에서 작가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구석진 곳에 내던져진 야생화 형상의 들꽃이었다. 세상을 향해 던져진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그때부터 작가는 1인 다역을 해내는 자신과 닮은 작고 흰 야생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세상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야생화의 본성을 깨달은 후, 꽃은 작가가 되었고 작가는 꽃이 되었다. 그래서 작품 속 꽃들은 배경보다 두터운 붓질로 표출되면서도 화려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존재감 넘치는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내면의 소리를 일깨운 상상 속의 새
작품 속 새의 형상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출된다. 여러 감정을 노래하듯 그네들의 시선은 때론 경쾌한 때론 경건한 멜로디가 되어 마음을 움직인다. 크지 않은 작은 화단, 흰 꽃이 모여 조용히 빛을 내는 작은 공간 사이에서 꽃과 새는 동일한 크기로 만나 삶의 단면을 노래한다. 그 모습은 어떤 구속도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담았다. 걸리는 것도, 집착하는 법도 없다. 이 꽃에 앉았다가 다른 꽃으로 이동하는 자유로움 속에서 작가는 무엇 하나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네 삶을 위로하고자 한다.
현실과 맞닿은 이상화된 세계
최근 작업에서는 기존 작업에서 볼 수 없던 두 가지 요소가 가미되었다. 첫째는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꽃이 통일감 있는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의인화된 문인의 시각을 현대화된 음율(새가 시를 읊조리는 느낌)로 표방한 느낌이다. 색감 역시 전통 오방색(五方色)을 현대화시킨 모습으로 재해석 되었다. 공허하고 슬프다는 것은 참고 살아온 인생이었음을 반증한다.
둘째는 작품 안에 일종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전치(轉置), 전위)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왕좌(王座)를 떠올리는 화려한 의자 위에 새들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내려앉아 화면 속 꽃의 세계를 바라본다. 화려한 의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왕의 귀환과 같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La belle époque)’을 요청하는 동시에, 휴식 같은 여유를 취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은 꽃·새·의자 등을 표현한 초현실적 기법에 대해 ‘재봉틀·박쥐·우산과 같은 전혀 관계없는 물체들이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듯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작가의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창구, 의자는 우리에게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탈출구인 셈이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나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작품을 하면서 위안을 받았던 것처럼,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작품 속 의자 안에서 편히 쉬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작가노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