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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행]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통영 제승당.......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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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통영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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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제승당(制勝堂)!.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
찌른 한산대첩(1592. 07. 08)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적 공간으로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
하는 제승당(制勝堂) 일원의 넓은 부지에 조성된 지상 건물, 각종 비석, 문화재 광장, 조경물을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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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유랑자는 이 제승당을 다녀온지가 20여년도 넘은것같다. 당시에는 여행기를 쓰지 않아
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그러나 다시한번 추억속의 그 길을 걷는다면 기억이 되살아 나리라 기대
를 하면서 유랑자는 제승당을 가기위해 선착장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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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은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113호이다. 경 내의 면적은 약 18만여
평 광범위한 부지에, 건물은 28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영시에서 직선으로 6.7km 떨어진 한산섬
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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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기 때문에 배가 유일한 접근 수단이며, 통영항에서 배로 25분이 소요된다. 거제도에서는 배를 타
고, 추봉도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07시부터 매시간 운행하는 배편이 있어 이용은 항상 가능하다.
유랑자는 차를 가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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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한산도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위함이고 두 번째로는 한산도 대첩비를 가 보기 위해서 였다. 하
룻밤 먹을 요량으로 들어가면 도보로 다녀도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차량을 가지고 들어가는게 편리는
하다. 사실은 또 제승당과 한산대첩비 외 볼거리가 마땅찮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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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10시배편에 몸을 실었다, 비릿한 바다내음과 봄 내음이 함께 어우러진 통영 앞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유랑자의 시간만 흐른 것 갔다. 어린 학창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순신이란 걸출한 영웅담 이야기는 끝도없이 이어지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영웅임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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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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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영화로 이어지는 이순신의 활약상은 언제나 듣고 화면으로 보아도 통쾌하다,
제승당!,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이순신은 한산대첩을 통해 바다의 제해권을 구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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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제승당을 짓고, 1593년 선조 26년부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참패로 소실된 선조 30년
까지 4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
한 유서깊은 사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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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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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0년 1597년에 폐진이 되었다가 142년 후인 1739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
비를 세웠다. 1959년 정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해 왔다. 1975년 정부는
영역을 확장하여 보수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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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는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
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충무공 하면 오직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린다. 대체 그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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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제승당 까지의 길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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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永遠)한 불멸(不滅)의 이순신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
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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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후손에게 남긴 말
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그처럼 놀라운 전략과 무용으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
러다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감추고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남해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기에 이
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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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해전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영원,불멸의 존재 이순신!, 제갈량이 제아무리 뛰어
난 전술가라고는 하지만 이순신의 지략과 전술을 따를수가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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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전란 내내 당리당략에 빠진 뭇 위정자들로부터 충심을 외면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흩어진
군기를 바로 세우며 왜군과 맞서 싸웠던 충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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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그는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던 백성들의 안위를 살폈던 의인이었고, 심지어 어린 왜군 포로
에게까지 온정을 베풀었던 인도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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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난중일기]를 통해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전장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도원수 권율의 그릇된 일처리를 비난하고, 경상 좌병사 김응서의 잘못된 정세판단을
강하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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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문. 제승당으로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 :멸사봉공의 정신, 창의와 개척 정신, 유비무환의 정신을
충무공의 정신이라며 소개해둔 팻말이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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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수시로 자신을 모함하는 전라수사 원균이 음험하고 흉악하다고 표현하는 등 불쾌한 내심을 숨기
지 않는다. 절망적인 첫 백의종군 과 함께 다가왔던 홀어머니의 부음, 사랑하는 아들 이면의 비보를
접하고는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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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이순신은 장수로서 어버이로서 수시로 닥쳐오는 불행과 고통을 홀로 오롯이 감내해야 했던
한 명의 고독한 인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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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지 142년만인 1739년 제107
대 수군통제사 조경이 이곳에 제승당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 옛터에 건물을 지은 후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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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제승당에 당도한다.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지
금의 해군작전 사령부 와 같은 기능을 하던 곳이다. 건물도 안에 모신 그림도 그대로 있다. 제승당은
1592년 이순신이 창건하고 전라좌수영을 설치한 곳이며, 1593년에는 삼도 수군 통제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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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에서 승리했으며 그 후에도 해상권 장악과 동시에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 함으로써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까지 지키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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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97년 7월 16일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패할 때까지 근 3년 8
개월 동안 이곳을 삼도 수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한 역
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고, 총통과 같은 신식 무기를 제작하
여 보급하는 등 군무를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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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의 직위를 받고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을 때 그는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이순신은 운주당에서 밤낮으로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 과 작전계획을 세
우고, 전쟁에 관하여 의논했으며, 한편에서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이번 왜란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병사가 있으면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제반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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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운주당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이후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 과 작전계획을 협의했던
집무실 이었다. 1597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할 때 도주했던 배설은 한산도로 돌아와 통제사
군영의 시설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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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이곳으로 몰려온 일본군은 한산도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남해안의 바닷길은 통제영을
점령한 일본군이 다시 장악했고 전황은 악화되었다. 이후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739년(영조 15)에 통
제사 조경이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740년 옛 운주당 자리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면서 유
허비를 세우고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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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당이 복원되면서 ‘제승당’으로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1932년에 충무영당을 건립했으며 1959
년에는 제승당 일원 이충무공 유적이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10월에 중건한 제승당 건
물 내부에는 영당 과 충무공의 해전(노량해전, 사천해전, 한산대첩)과 [진중생활도]를 그린 다섯 폭
의 해전도와 현자총통, 지자총통, 작은 거북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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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도:~임진 왜란때 이충무공 께서 적선 73척을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전 전법으로 그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섬멸하신 대 승첩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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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도:~노량에서 왜선 300척 과 싸워 많은 적선을 부순 후 적의 유탄에 맞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54세로 장렬히 순국 하시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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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승리로 이끈 조선의 명장. 본관은 덕
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공으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1576년 봄 무과
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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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후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조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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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 생활도:~ 약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 주둔 하시면서 군관을 대동하고 거북선, 활,화살,화약등을 만드는 작업장을 순
시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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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충정도:~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나머지 수루에 홀로 앉아 천지신명에게 구국과 애민에 대해 기도 드리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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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해전도;~1592년 5월 29일 사천에서 왜선 12척을 격침하는 장면이다. 특히 이 해전에서 공이 창건하신 거북선을 처음
으로 사용하여 대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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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에서 적선
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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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으나 곧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고, 13
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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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투였던 11월 노량해전에서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 진중에서 기록한 <난중일기
>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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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행적비, 좌측은 공덕비
행적비는 제승당과 충무사 중간에 있으며, 이 충무공의 후손으로서 통제사, 부사 등을 역임한 분들의
선행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좌우 각각 네 개의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고 세 개의 비석을 풍우가 침
범하지 못하도록 만든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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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비 :이충무공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功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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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碑)들은 이충무공의 후손으로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던 분들중 선정(善政)을 배풀어서 칭
송을 받은 여섯분에 대하여 약 250년~130년전에 한산도와 거제도의 주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세
웠던 공덕비(功德碑)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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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제121대 통제사 이태상(李泰相, 5대손), 제138대 통제사 이한창(李漢昌, 6대손), 제168대
이태권(李泰權, 8대손), 제172대 이승권(李昇權, 8대손), 제199대 통제사 이규석(李圭奭, 10대손), 제2
03대 통제사 이규안(李奎顏, 10대손), 의 공덕비가 늘어서 있다. 비석에는 대부분 撫恤島民, 千秋不忘
(무휼도민, 천추불망) 즉 “섬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준 공덕(功德)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내
용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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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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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戍樓)는 망루의 역할을 했으며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인 이곳에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새로 건립했다. 충무공은 이곳에 자주 올라왔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고, 우
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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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오른 쪽에는 고동산, 왼쪽에는 미륵산, 뒤쪽에는 망산이 있는데, 봉화 · 고동 · 연등을 이용하여
남해안의 일본군 동향을 파악하고 전달하는 연락망의 중심지가 이곳이었다. 수루에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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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섬 달밝은 밤에…' 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 (閑山島歌)' 의 한시 (漢詩) 원본이 처
음으로 공개된바 있다. 원문시는 ‘한산도가’는 이순신이 백의 종군을 거처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었지만 무군지장(無軍之將)의 옹색한 처지에 놓였던 1597년 8월 15일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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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寒山島歌’의 원본에 분명히 ‘정유 중추(丁酉仲秋) 1597.8.15’라는 이순신의 친필이 그것을 재확
인해주고 있다. 그것을 지은 장소 역시 한산도 통제영이 아니라 전남 보성의 열선루(列仙樓)라는 사
실이다. 열선루에서 한산섬를 바라보며 지은 시다, 실제로 이순신은 1597년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17일 전남 강진의 군영구미로 떠났다. 그에 대한 근거는 역시 ≪난중일기1597.8.14
~8.1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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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한산도가(閑山島歌)]이은산 선생이 번역한시문, 원문이 나타났으니 이건 틀렸다는......
閑山島 月明夜,한산섬 달 밝은 밤에
上戍樓撫刀,수루에 혼자 올라 큰칼 불끈 잡고
深愁時何處,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에선가
一聲羌笛更添愁,들려오는 피리소리, 이내 시름 더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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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문도 새로 발견된 [한산도가(閑山島歌)]로 바꾸어 달아야 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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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된 이순신 장군의 자필 원문 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寒山島 月明夜(한산도 월명야):싸늘한 산과 바닷섬 달만이 밤을 밝히는데
上戍樓(상수루):홀로 수루에 올라
撫大刀 深愁時(무대도 심수시):큰칼 쓰다듬으려니 근심이 깊어지네.
何處一 聲羌笛(하처일 성강적):어디서 들려 오는 가 가녀린 피리소리
更添愁(갱첨수):근심만 더하여라
丁酉仲秋 李舜臣 吟 정유중추 이순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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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된 이순신 장군의 자필 원문 시 [한산도가(閑山島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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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제목은 閒山島이지만 첫소절은 寒山島 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고유지명보다는 그날 밤의
쓸쓸한 신세를 나타낸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이 시가 담겨있는 편지는 이순신이 순국 하루 전날
(1598년 11월18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에게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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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독합하’(陳都督閤下)라는 서신의 제목이 붙어있고 말미에 ‘정유중추이순신음’(丁酉仲秋李舜信
吟)이라고 적혀있다. 광주대학교 황 교수는 “과거 이은상과 문화재위원회는 이종학(원본소개)이 공
개한 정유년작 ‘한산도가’를 소전 손재형 서체로 판정했다”면서 “‘열선루’ 작시설의 근거가 되는 정유
년작 ‘한산도가’는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서체나 진린에게 보낸 서한의 한시체와 똑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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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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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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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유허비 비문 :~어허 여기는 이장군 순신의 제승당 터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
령할 제 천지 귀신도 그 정성을 굽어보고 바람 구름 번개 비가 그의 응변 술책을 도와 왜적들이 바다
에 깔려 날뛰면서도 이 집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차마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했던 것이니 어찌 그
리 장하시고 이제 다시 수백 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주니 백성들은 이
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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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막을 잠깐 쳤던 자리라고 거기 나는 아가위나무(甘棠) 한 가지
도 베지 말라는 노래를 지어 읊조리거늘 사직을 바로잡고 우리 창생을 살리심이 그 누구 힘이관대 차
마 이 터에 풀이 우거져 있게 할까 보냐.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지나가 차츰 더 아득해지면 저 어부와
목동들마저 집터를 잊어버려 물어 볼 곳조차 없어질는지 그 또한 누가 알리요. 그래서 이제 통제공
(統制公) 조경(趙儆)이 흙을 쌓아 터를 돋우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는 뜻은 실로 여기를 표해 두자
는 때문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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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한산제승당 유허비(故統制使 忠武公 李舜臣 閑山制勝堂 遺墟碑, 1739년, 제108대 통제사 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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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인제는 천하 만세에 여기가 이장군 집터였던 줄을 알게 되리라 이제 군자 이르되 통제공 조경은
과연 능히 임금을 섬기는 분이라 하리니 그 어른(忠武公)을 사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비를 세울 것
이며 진실로 사모하는지라 반드시 본받을 것이며 진실로 본받는지라. 반드시 충성되고 의로울 것이
며 충성되고 의로운지라. 임금을 섬길 따름 다른 무엇이 있을까 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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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선무공신 영의정 덕풍부원군 행삼도통제사 익충무 이공 순신 한산도 제승당
유허비(有明水軍都督 朝鮮國 贈宣武功臣 領議政 德豊府院君 行三道 統制使 謚忠武 李公純臣 閑山島
制勝堂 遺墟碑,1877년, 제199대 통제사 이규석, 이충무공 10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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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비를 세우고 글씨를 쓴 이는 통제사 조경이요 글을 지은 사람은 도사(都事) 정기안(鄭基安)이다.
제승당 유허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군사반란의 주인공 박정희가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
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비문을 국역한 한글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서기 1979년 12월, 이은상 국역 고동주 씀 경상남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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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충무사(忠武祠)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다. 본래 작은 사당이었던 것을 헐고 1976년
10월 지금의 사당을 건립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는 통영 시민들이 제사를 올리며 한산대첩기념일인
8월 14일(양력)에는 해군작전사령관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참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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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에서 청와대 화가가 된 인물화 의 대가 정형모 화백이 그린 그림,, 고 '육' 여사의 초상
화도 정형모 화백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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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는 국보 제76호 서간첩(書簡帖)의 일부와 충무공이 송나라 역사를 읽고 쓴 독후감이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다.이곳의 이순신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작품이며, 영정은 종이품 통제사의
관복(구군복) 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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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정(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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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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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시 통영해안로 234 (차량을 가지고 들어 갈수도 있다.효과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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