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梧里)
조선 이원익(李元翼)의 호이다.
梧 : 오동나무 오(木/7)
里 : 마을 리(里/0)
1573년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갈 때 일이다. 큰 내를 건너며 중인과 역관들이 맨발로 담여를 멨다. 역관들이 중국말로 투덜댔다. '지위가 낮은 이런 녀석까지 우리가 메야 하다니 죽겠구먼.'
연경에 도착해서 중국 관원과 문답할 때, 오리가 역관 없이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했다. 역관들이 대경실색했다. 그의 집은 어의동(於義洞)과 대동(臺洞) 사이에 있었다.
채벌이 금지된 소나무를 베던 소년이 산지기에게 붙들렸다. 근처 허름한 집 마당에 늙은이가 해진 옷을 입고 앉아 자리를 짜고 있었다. '여보, 영감! 내일 끌고 갈 테니 이 아이를 잘 붙들어 두오. 놓쳤다간 되우 경을 칠 줄 아오.'
산지기가 가고 아이가 울었다. '왜 안가고 거기 있니?' '제가 달아나면 할아버지가 혼나잖아요?' '나는 일없다. 어서 가거라.'
이튿날 산지기가 와서 아이를 내놓으라고 야료를 부리다가, 의정부 하인에게 혼이 나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영의정이었다.
그는 수십년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험난한 국사를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해 모든 이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막상 그는 턱이 뾰족하고 콧날이 불그레하며, 주근깨가 많은 볼품없는 외모였다.
다산은 그의 화상(畵像)에다 이런 찬(贊)을 남겼다. '사직의 안위가 공에게 달렸고, 백성은 공 때문에 살지고 수척해졌다. 외적이 공을 인해 진퇴가 결정되고, 기강이 공을 통해 무너지고 정돈되었다.'
84세 때 인조가 승지를 보내 위문했다. 그 거처에 대해 묻자, '띠집이 낡아 비바람도 못 가릴 지경입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재상 40년에 몇 칸 모옥뿐이란 말인가?'
모든 이가 그 청렴함을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나라에서 직접 집을 지어 주었다. 이 집이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의 관감당(觀感堂)이다.
영남 사람들이 이원익과 유성룡을 비교해서 말했다. '오리는 속일 수 있지만 차마 못 속이고, 서애는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그는 더도 덜도 말고 꼭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견주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한다'였다.
그의 수많은 일화에는 모든 이의 한결같은 존경이 담겨 있다. 오늘에는 어째서 이런 큰 어른을 찾기가 힘든가.
■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영남사람들이 이원익(李元翼)과 유성룡(柳成龍)을 두고 말했다. 이원익은 속일 수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가 없다. - 남학명(1654~1722), <회은집>중에서
병법에서는 지휘관을 세 가지로 나눈다.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智將),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德將), 불감기(不敢欺), 곧 감히 못 속이는 맹장(猛將)이 그것이다. 병법에 따르면 유성룡은 지장, 이원익은 덕장에 해당한다. '천벌을 받지 어떻게 그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렇게 평했다던 이원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일대는 이원익이 말년에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인조(仁祖, 1623~1649)가 하사한 관감당, 사당인 오리영우, 충현서원지, 종택 등 이원익 관련 문화재가 몰려있다. 이를 관리, 운영하는 곳이 이원익 종택에서 건립한 충현박물관이다.
박물관 내부 '충현관'에 들어서면 한눈에도 명필로 보이는 커다란 글씨를 만난다. 이것은 '인조묘정배향교서' 즉, 인조묘정에 이원익을 배향하도록 한 효종의 교서다. 그 내용중에 "아, 우리 종영(이원익)은 참으로 나라의 원로이시다.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지만 일을 만나면 패연히 여유가 있다"는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이어 이원익의 시, 편지, 문집, 유서 등을 볼 수 있고 이원익의 영정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진다. 각기 다른 시기에 제작된 4개의 영정은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영정에 나타난 이원익은 얼굴이 작고 갸름하다. 그리고 키가 작아 보이지만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실제 이원익은 키가 3척이 겨우 넘었다고 한다. 비록 몸은 가냘프지만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5번이나 영의정에 오른 큰 인물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 익녕군 이치이 4대손인 이억재와 어머니 동래군 부인 정씨의 아들로 1547년(명종 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다. `오리 정승`이라고 불리던 이원익의 업적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다.
병졸의 입번(入番)제도를 개선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안주목사(安州牧使) 시절에는 뽕나무를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 유명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세금부담을 덜어주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 탈환에 지략을 세웠으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는데 결정적으로 힘을 쓰는 등 왜란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폐시키자 이를 반대하다 귀양살이를 했고,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광해군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반대하여 유배에 그치게 했다.
이러한 무수한 업적보다 빛나는 것은 이원익의 청렴한 삶, 그 자체다. 한 나라의 재상으로 5번씩이나 영의정을 재임했으면 대궐 못지 않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하인을 거느리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소탈한 성품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퇴임 후에 이원익은 초라한 초가집에서 스스로 농사짓고 돗자리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
충현관을 나오면 최근 복원된 풍욕대, 삼상대 정자를 만난다. 밑동 굵은 소나무와 어우러진 정자에서는 조선시대 선비의 담백한 옛 풍류도 엿볼 수 있다. 정자를 지나면 관감당으로 이어진다. 관감당은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이다. 인조는 존경하는 이원익이 초가집에서 사는 것이 몹시 안쓰러웠던 것이다. 이원익이 극구 사양하자 인조는 "경을 위하여 집을 지어 준 것은 백성과 신하들로 하여금 느끼는 바가 있게 하려 함이요"라고 하여 이원익의 고집을 꺽을 수 있었다.
관감당 앞에는 탄금암(彈琴岩) 바위와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가 어울려 한국의 전통 정원(庭園) 같은 시원한 풍경을 선사한다. 탄금암은 이원익이 앉아 거문고를 튕겼다고 전해지는 바위다. 나무 그늘이 내려온 바위에 앉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 사람 중에 형제가 화목치 못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부잣집에서 그러하다. 이는 재물이 있으면 다툴 마음이 생겨 천륜을 상하게 하니 재물이 바로 빌미가 된다는 것을 알겠다. 자손들은 절대로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不仁)한 부(富)를 경영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농사에 힘써 굶어 죽는 것을 면하면 옳을 뿐이다.
이원익의 유서 중에서 자손들에게 남긴 말이다. 평생 재물을 모으지 않았던 자신의 소신이 잘 드러나 있다. 욕심이 없어 그런지 이원익은 88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가냘픈 몸에 후덕한 인품을 가진 이원익의 정치적, 육체적 장수의 비결은 청렴함과 도덕성에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청렴한 청백리를 꼽는데 이원익의 이름을 빼놓지 않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누가 이원익을 차마 속일 수 있겠는가?
▶️ 梧(오동나무 오, 악기 이름 어)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吾(오)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梧(오, 어)는 ①오동나무 ②책상(冊床), 서안(書案) ③기둥, 버팀목 ④거문고 ⑤날다람쥐 ⑥버티다, 지탱하다 ⑦크다, 장대하다 ⑧거스르다 ⑨맞이하다, 그리고 ⓐ악기의 이름(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동나무 동(桐)이다. 용례로는 오동나무 잎을 오엽(梧葉), 오동나무 그늘을 오음(梧陰), 편지를 받는 사람의 이름 밑에 써서 존경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오하(梧下), 오동잎이 지는 가을이라는 뜻으로 음력 칠월을 달리 이르는 말을 오추(梧秋), 맞서서 겨우 버티어 감을 지오(枝梧), 오동잎은 가을이면 다른 나무보다 먼저 마름을 오동조조(梧桐早凋), 오동나무 한 잎이라는 뜻으로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말을 오동일엽(梧桐一葉), 무른 오동나무가 견고한 뿔을 자른다는 뜻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오동단각(梧桐斷角) 등에 쓰인다.
▶️ 里(마을 리/이, 속 리/이)는 ❶회의문자로 裏(리)의 간체자이다. 裡(리)와 동자로 田(전; 밭)과 土(토; 토지)의 합자(合字)이다. 밭이 있고 토지(土地)가 있는 곳으로 사람이 있는 곳을 말한다. 또 거리의 단위로도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里자는 ‘마을’이나 ‘인근’, ‘거리를 재는 단위’로 쓰이는 글자이다. 里자는 田(밭 전)자와 土(흙 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밭과 흙이 있다는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란 뜻이고 이런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니 里자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里자가 마을 단위의 소규모의 행정구역을 뜻했기 때문에 1리(里)는 25가구가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을 의미했다. 또 里자는 거리를 재는 단위로 사용되기도 하여 1리는 약 400m의 거리를 말했다. 그래서 里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마을’이나 ‘거리’라는 의미를 함께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용한자에서는 주로 발음이나 모양자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里(리)는 숫자(數字) 다음에서 이(里)의 뜻으로 ①마을 ②고향(故鄕) ③이웃 ④인근 ⑤리(거리를 재는 단위) ⑥리(행정 구역 단위) ⑦속 ⑧안쪽 ⑨내면(內面) ⑩이미 ⑪벌써 ⑫헤아리다 ⑬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동네 방(坊), 마을 부(府), 골 동(洞),마을 촌(邨), 마을 촌(村), 마을 서(署), 마을 아(衙), 마을 려/여(閭), 마을 염(閻)이다. 용례로는 마을이나 촌락을 이락(里落), 일정한 곳으로부터 다른 일정한 곳에 이르는 거리를 이정(里程), 행정 구역의 이의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을 이장(里長),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삶을 이거(里居), 동네의 어귀에 세운 문을 이문(里門), 마을으로 지방 행정 구역인 동과 리의 총칭을 동리(洞里), 고향이나 시골의 마을을 향리(鄕里), 천 리의 열 갑절로 매우 먼 거리를 만리(萬里), 십 리의 백 갑절로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를 천리(千里), 상하로 나눈 마을에서 윗마을을 상리(上里), 아랫마을을 하리(下里), 해상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를 해리(海里), 남의 고향에 대한 미칭을 가리(珂里), 자기가 살고 있는 동리를 본리(本里), 북쪽에 있는 마을을 북리(北里), 지방 행정 단위인 면과 리를 면리(面里), 사방으로 일 리가 되는 넓이를 방리(方里), 산 속에 있는 마을을 산리(山里), 풍속이 아름다운 마을을 인리(仁里), 다른 동리나 남의 동리를 타리(他里),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상황을 알 길이 없음을 오리무중(五里霧中), 붕새가 날아갈 길이 만리라는 뜻으로 머나먼 노정 또는 사람의 앞날이 매우 요원하다라는 붕정만리(鵬程萬里),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을 일사천리(一瀉千里),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말이 천리를 난다는 뜻으로 말이 몹시 빠르고도 멀리 전하여 퍼짐을 언비천리(言飛千里), 바다와 육지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음을 수륙만리(水陸萬里)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