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 해미읍성 역사탐방
일시:2023년9월16일(토)오전10시30분~11시30분
장소:태안읍 해미읍성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후원:행정안전부
해미읍성 정문 진남관
해미읍성 [Haemieupseong Walled Town, Seosan, 海美邑城]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둘레 1,800 m, 성 높이 5 m, 성 안의 넓이 196,381m2이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며, 폐성된 지 오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나,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 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었다.
본래의 규모는 동 ·서 ·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뿐이다. 1418년(태종 18)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해미읍성
충남 서산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에요. 해미읍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조선 성종 임금 때 쌓은 성이에요. 읍성이란 산성과 달리 평야지대에 사람들이 사는 집을 둘러서 쌓은 성이다
해미읍성에는 천주교와 관련한 슬픈 역사가 서려 있어요.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천주교는 서학이라고 불리며 학문으로 연구되었고 그러다가 차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백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 서양 오랑캐의 종교를 믿다니!”
“제사도 모시지 않는 천주교를 금지시켜야 한다.”
선비들은 천주교를 반대하고 나섰고, 나라에서는 1786년부터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했어요. 그로부터 백 년 가까이 천주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어요.
특히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이 강화도를 침입해 온 일이 있은 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어요.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인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서양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어요.
1866년, 해미읍성에서도 천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목을 베거나 매달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돌로 쳐 죽이기도 했어요. 또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서 구덩이에 산 사람들을 몰아넣고 묻어 버리기도 했어요. “예수와 마리아를 믿지 마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어요.
“예수를 버리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어서 죽이십시오.”
서산 해미읍성 치
천주교 신자들은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였어요. 살기 위해 종교를 버리거나 도망치지 않았어요. 해미읍성 근처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어요.
해미읍성에서 천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죽었지만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70명 정도예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나 신부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해미읍성에는 평범한 백성들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해미읍성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던 것이지요.
해미읍성은 서울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기념관과 함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로 불리고 있어요.
해미읍성에 있는 호야나무
해미읍성 안에는 호야나무라고 불리는 큰 고목이 하나 있어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나무에 목매달려 죽었어요. 또 나무에 사람을 매달고 활로 쏴 죽이거나 돌을 던져 죽였다고도 해요. 지금도 호야나무 가지에는 그때 사람들을 묶어 두었던 밧줄 자국이 남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