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70년대가 진짜 진짜 반한 ‘국민 여동생’
우리 영화사에서 10대 관객이 흥행의 주요변수로 떠오른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75년 활극영화의 제작이 제한받는 등 유신정권의 검열이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해졌을 때, 하이틴 영화는 까다로운 검열을 비켜갈 수 있는 장르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특히 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 진짜 잊지마·사진>는 6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10대 관객층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하이틴 영화 붐의 중심에 배우 임예진이 있었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임예진의 등장은 70년대 유신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릴 만큼 신선한 사건이었다. 임예진은 앳되고 순수한 외모로 10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들에게 소구력을 가지며 소위 ‘국민 여동생’으로 떠올랐다. 아이돌스타의 첫 탄생이자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적인 스타의 탄생이었다.
임예진은 74년 김기영 감독의 <파계>로 데뷔했다. 이 작품에서 파르스름하게 머리를 깍은 비구승으로 등장해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임예진이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일련의 하이틴 영화를 통해서다. 75년 김응천 감독의 <여고 졸업반>에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여고생으로 출연한 데 이어 <진짜 진짜 잊지마>에서 이덕화와 짝을 이뤄 당대 최고의 하이틴스타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진짜 진짜 미안해> <진짜 진짜 좋아해> 등 ‘진짜 진짜’ 시리즈에 연이어 출연해 전형적인 ‘여고생스러움’으로 대중의 우상이 되어갔다.
대학가에서 통기타, 미니스커트, 생맥주, 장발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가 폭발했다면, 임예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는 하이틴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소소하게 담아갔다. 비록 청년문화가 보여주는 저항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10대 관객들이 소비의 주체로 부상해 자신들의 판타지를 투영할 수 있는 영화와 배우에 열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이틴 영화 속의 임예진은 <진짜 진짜 잊지마>에서 반항기 가득한 남자 아이들을 선도하고, 홀로 있는 아버지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등 국가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하이틴 영화가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극중 수업에서 유신이념을 칠판 가득 써놓고 설명하거나, 교련수업을 필요 이상으로 장시간 스크린에 담아내는 등 당대 하이틴 영화가 지닌 정치적인 한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런 탓에 임예진은 극중에서 항상 ‘반듯한’ 이미지를 고수한다. 임예진이 보여주는 ‘반듯함’은 기존 세대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있지만, 이전 세대의 부정과 속됨을 환기시켰다. 일종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상기시켜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진짜 진짜 미안해>에서 어린 시절의 상처로 비뚤어진 태일을 바로잡기 위해 노심초사하는가 하면, <진짜 진짜 잊지마>에서 시를 읊고 철길을 걸으며 낭만을 얘기한다.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는 하얀 목련꽃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등 임예진은 당대가 원하던 순수한 첫사랑의 원형이자 여고생의 표상이었다. 기존 질서를 따르는 ‘반듯함’과 10대들의 판타지, 첫사랑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낭만성’이 임예진을 당대 최고의 스타에 오르게 한 가장 큰 이유였던 셈이다.
77년 이후 엇비슷한 하이틴 영화가 반복되고, 하이틴장르가 우수영화 선정에서 제외되면서 하이틴 영화의 제작과 인기가 시들해지자, 임예진도 성인 연기자로 변신을 모색한다.
이대근과 호흡을 맞춘 홍파 감독의 <불>에서 수줍은 새댁으로 출연했으며, 78년 이원세 감독의 <땅콩껍질 속의 연가>에서는 누드 사진 촬영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이틴 영화 붐이 쇠퇴하고 성인 연기에의 도전 등을 거치면서 임예진은 활동무대를 스크린에서 TV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칫 부담스러울 법한 ‘국민 여동생’의 기억을 뒤로 하고, 세월의 깊이만큼 한 뼘 더 속깊은 배우가 됐다. 한국영화사에서 임예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배우인 셈이다. |
첫댓글 시간이 갔고, 나이도 먹었고, 인생사 이맛 저맛 보았으니 배우로선 성공했으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