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0.목요일
화성
MBC 엄기영 사장이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낸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방문진 이사장인 김우룡이 낸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김우룡 이사장은 엄사장에게 <가카를 위해 MBC는 무엇을 할 것인가?>란 숙제를 내주고 2주에 한번씩 숙제검사를 해왔으나, 원하는 만큼의 가시적인 성과가 없자 사퇴를 종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번 엄사장의 사표제출은 방문진 이사를 뉴라이트계열로 대폭 교체하고 김우룡을 이사장 자리에 앉힐 때부터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KBS 정연주 사장의 경우와 비슷한 수순을 밟을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띈다. 사표를 엄사장 혼자 낸 게 아니라 김세영 부사장(편성본부장 겸임), 송재종 보도본부장, 이재갑 TV제작본부장, 김종국 기조실장 등 MBC의 핵심요직이라 할 수 있는 8명이 같이 냈다는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모든 책임은 사장인 나에게 있다' 며 사장 혼자서 폼나게 사표를 내면서 아랫사람은 보호하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조직의 관례인데, 이번엔 반대로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으로 나오니... 이건 뭔가 찜찜하지 않은가.
게다가 사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진 처음에는 엄사장의 사표가 수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엄사장은 유임이 되고 보도본부장등을 비롯한 몇명만 수리될 것이라는 말들도 솔솔 나오고 있다.
결과는 오늘(10일) 오후면 밝혀질테지만, 슬프게도(?) 난 엄기영사장이 유임될 것으로 본다.
왜? 그 이유를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보자.
먼저, 엄기영 사장의 그동안의 행보를 보자. 엄기영 사장은 그동안 사실 나름대로 열심히 숙제를 해 온 인물이다. 방문진이 교체되고 난 후에 스스로 '뉴MBC플랜'이라는 안을 만들어서 가카와의 코드를 맞추기 위해 노력을 했으며(물론 KBS와는 다른 강성 노조 때문에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어필도 방문진에게 했으리라 본다) 그 결과 의미심장한 클로징멘트를 날리던 신경민 앵커를 1년 만에 뉴스데스크에서 짤랐고, 가카에겐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던 손석희 교수를 자진 퇴진이라는 방법으로 모양새 좋게 하차시켜 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마전에 있은 '가카와의 대화'에 손석희 교수 후임인 권재홍기자를 메인 MC로 내세워 가카를 열심히 빨아줌으로써 '예전의 MBC가 아님을' 각인시키려 애썼다는 점이다.
김우룡 이사장은 출생지가 일본으로 가카와 동향 출신이다
방문진 교체 초기, 말로는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있게 일을 하겠다, 라고 했지만 사실 생각해보자.
엄사장은 대한민국 앵커 사상 최장수 앵커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80년대부터 20년 가까운 기간동안 '철저한 중립'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자기 자리를 지켰다는 말도 될 수 있으며, 그의 경력 어디에도 그의 전임자였던 최문순 전사장이나 얼마 전 물러난 손석희 교수처럼 MBC 노조나 언론노조 등에서 활동했다는 경력은 단 한줄도 없다. 한 마디로 엄사장은 정권은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대립각'을 세워본 적 없이 순탄하게 승승장구해온 인물이다.
엄사장의 사퇴설이 나오자 그가 내년 지방선거에 강원도지사 선거에 야당간판을 달고 나올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이건 정말 웃기는 예상에 불과하다. 앞에서 밝힌대로 엄사장에겐 정치색도 없고 특별한 기반도 없다. 더군다나 그는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압도적으로 여당 손을 들어준 만년 여당 텃밭인 강원도 출신이다. 설사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서 그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당선될 가능성도 지극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반대로 여당 간판을 달고 나온다면? 아니면 남은 임기 1년을 마저 채우고 가카의 품으로 슬며시 들어가 국회의원이나 혹은 다른 요직 하나를 차지하고 이후를 노린다면? 대권까지는 힘들다해도 적어도 따뜻한 노후는 보장되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방문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방문진이 노리는 것은 엄사장의 사퇴가 아니라 MBC다. 가카 하는 일에 딴지 걸지 않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MBC. 4대강 사업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세종시의 수정안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관영방송 MBC다. 그래서 KBS때처럼 방문진을 교체하고 MBC경영진을 교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을 진행하다보니 KBS 정연주 사장때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먼저, 정연주 사장은 전 노무현 정권의 코드 인사였지만, 엄기영 사장은 정치색이 거의 없는 중립적 노선의 사람이다. 중립적이라는 말은 언제든지 내 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고 시험삼아 칼자루를 휘둘러 봤더니 의외로 고분고분한게 잘만 하면 이용가치가 높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나.
둘째로, 방문진의 목적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 엄기영 사장이 아니라 MBC의 강성 노조다. 설사 엄사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사장을 임명한다 해도 노조와 사측간에 맺어진 단체협약 때문에 KBS의 경우처럼 쉽지가 않을 것이고 괜히 잘못하다간 노조의 강한 반발만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셋째로, 얼마 전 정연주 前 KBS 사장 해임이 부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은터라, 이번 까지 무리하게 사장을 교체하려 들다간 여론이 불리해져서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중요한 지방선거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여권의 불안감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에서도 밝혔듯이 '가카와의 대화'에서 보여준 MBC 권재홍 기자의 가카에 대한 '깍듯함'이 가카의 닫힌 마음을 여는데 단단히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카와의 대화가 끝나고 막걱리 뒷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자리에서 '예쁘게 좀 봐달라'는 엄사장의 메시지가 가카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간만에 기분이 좋아진 가카는 최시중을 시켜 김우룡에게 엄사장을 한번 만나보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방문진이 말하는 공영방송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여, 엄사장과 김우룡이 은밀히 만나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이번의 임원진 일괄사표제출이라는 카드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표를 제출한 임원진 중에서 가장 말 안듣는, 친노조쪽 몇 사람만 사표를 수리하고 나머지는 유임시킴으로써 겉으로는 정권의 유연함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별 잡음없이 MBC를 통으로 집어 삼키겠다는 꼼수 말이다.
물론 이것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엄기영이라는 한 사람을 함부로 매도하는 섣부르고 위험한 추리일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이러한 내 추측이 빗나가길 바란다. 지난 30여년간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켜온 그의 자존심이 이번 일로 추하게 훼손되는 걸 보고싶지 않고, 또 마지막 남은 MBC까지 저들의 손에 넘어간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임기를 보장 받기 위해, 또 그 임기 이후를 대비하기 위하여 자신을 따랐던 핵심 인사를 적들에게 내어준 교활한 사장 엄기영의 모습이 아니라, 떳떳하게 해임을 당하고 노조와 함께 국민과 함께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싸우는 인간 엄기영의 모습을 보고 싶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 오후에 열리는 방문진 이사회의 결과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