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목요일>(2023. 3. 9. 목)(루카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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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고 가르치시자(루카 16,13),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루카 16,15)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꾸짖기 위해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그래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일차적으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드러나게 표시 나는 죄는 짓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겉으로만 자선을 실천하는 위선자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표시 나는 죄가 없으니, 그들은 스스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고 있고, 속마음은 어떻든지 간에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경건한 신앙인이다.” 라고 잘난 체 하고 있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자선 실천도 잘하고 있으니, “나는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다.” 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과 허영과 착각이 그들의 ‘큰 죄’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비참한 상황을 말씀하신 것은, ‘부자의 죄’를 부각시키기 위한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그 부자가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말은, 날마다 잔치를 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구약성경 욥기 1장 4절에 나오는 잔치가 연상됩니다. ‘욥’은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고(욥 1,3),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습니다(욥 1,8). 사람들 가운데에는 욥이 ‘큰 부자’였다는 것만 생각하고, 욥처럼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기에 언급된 잔치는 욥의 잔치가 아니라 아들들의 잔치입니다.) 라자로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말은, 부자가 오며가며 라자로에게 빵조각을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부자는 그렇게 하면서 자기는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착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랑 실천이 아닙니다. 개에게 던져 주듯이 빵조각을 조금 던져 주는 행위 자체가 이웃을 모독하는 일이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큰 죄’입니다. 개들까지 와서 라자로의 종기를 핥곤 했다는 말은, 부자의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자가 던져 주는 빵조각을 개들이 빼앗아 먹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부자가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그것은 개들이 잘못한 것이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이중 삼중으로 죄를 지은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개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그런 뜻이라면, 그 ‘개들’은 부자의 반려견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한 이방인들(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은, 그자들이 라자로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면서 괴롭혔다는 뜻이 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살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라자로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참아라. 하느님 나라에서 복을 누리게 될 테니.”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실제로 라자로 같은 처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웃이, 또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숙제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라자로가 곧 예수님입니다. <내가 지금 라자로 같은 처지에 있다면?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고, 또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너무 힘들어서 희망을 버리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더라도, 절망과 포기도 큰 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가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루카 16,23), 분명히 사는 동안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그 벌은 그 자신이 자초한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지은 죄를 처벌하는 일보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스스로 하느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 부끄러움이 가장 큰 형벌이 될 것입니다. 회개는 우선 먼저 자신의 죄를 찾아내고, 그 죄를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출처]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