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직후 서부전선 일대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한민국 국군 부상병 다수는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서울 시내의 여러 병원에 분산 후송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심한 부상을 입은 중상자였다.
6월 28일 아침 9시
결국 조선인민군이 서울 미아리를 뚫고 중앙청을 지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들이 닥친다.
이때 병원을 끝까지 지키던 국군 1개 소대가 결국 전멸을 하게 된다. 소대장 남 소위, 선임하사 민 중사, 부대원 전부가 1시간만에 전멸을 한다.
당시 서울대병원은 현재 대 본관이 있는 자리에 1 , 2 , 5, 6동의 병동이 있었고, 침대수는 800석 이었다.
◆ 학살 현장인 서울대병원
그러나 개전 3일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서울에 남아있던 대다수 민간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져 피난길에 올랐으나 환자가 있는 병원 근무자들이나 경비병들은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급하게 서울을 빼앗기는 상황이라 체계적인 후송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부상병들과 경비병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의료진, 그리고 일반 환자들과 가족 병수발을 위해 남아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서울대 병원에 남아있었다.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이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다.
"원수놈들의 앞잡이가 여기 누워있다."
한 북한군 중좌가 선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월북했던 의사가 북한군 군의관이 되어서 북괴군을 따라 다니며 학살할 대상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한다.
당시 병원 내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환자들로 만원이었으며, 병원 경비를 위해 남아있던 국군 보병 1개 소대와 움직일 수 있는 전상병 80여명이 소대장의 지휘하에 뒷산에서 응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저항하는 국군을 전멸시킨 북한군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병력을 산개시켜 병원을 둘러쌌다.
이제 병동 안에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비무장의 의료진과 민간인 환자들, 그리고 환자 가족들만이 남아있었다.
"원수놈들의 앞잡이가 여기 누워있다."
한 북한군 중좌가 선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월북했던 의사가 북한군 군의관이 되어서 북괴군을 따라 다니며 학살할 대상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병동을 순회하며 침대와 바닥에 누운 환자들에게 총을 갈기고 총 맞고도 죽지 않은 이들은 총검으로 확실히 죽였으나, 이게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나중에는 환자들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어 병실 구석으로 몰아넣고 한꺼번에 총을 쏴 죽였다.
학살의 소음이 울리자 다른 병동에 남아있던 환자들은 급히 대피 시도를 했지만 죄다 북한군 보초들에게 걸려 참혹한 꼴을 당했고, 일부는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권총을 가지고 있던 장교들은 병실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되거나 자살하기도 했으며, 흥분한 북한군은 심지어 위문차 남아있던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살해했다.
이 학살의 명분은 일단은 한국군 응징이었으나 사실 군인이나 일반인이나 환자복을 입은 채로는 별로 구분이 가지 않아서 일반인들도 다수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나 명단은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아있지 않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국군 부상병이 있는 곳이 아닌 정신병동까지 들이닥쳐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죽였다는 것이다.
아마 정신병동이고 뭐고 구분할 생각도 없었을 거고, 언뜻 보기에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 위장한 국군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 시간 동안 부상병을 찾아내어 죽이고 나서도 아직 놓친 부상병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병원 안을 샅샅이 뒤져 부상병들을 찾아낸 다음 밖으로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을 쏘아 죽이고 생존자를 총검으로 확인사살 했다.
이때도 일반 환자나 가족 등 민간인이 다수 살해당했다. 이렇게 죽이고 나서도 병원 안에 남아 있는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악착같이 잡아내서는 보일러실로 끌어가 10톤의 석탄 더미에 생매장하였다.
◆ 서울대병원앞 창경궁
학살을 당한 시체들은 한여름인데도 병원 마당에 쌓인 채로 20일 동안 방치되어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다. 자기들도 더 이상 못 견디게 된 북한군이 시체들을 병원 앞 큰길인 창경궁 앞 길에다가 시체를 쌓은 뒤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 현충탑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우리측의 기록에는 부상병 100여명으로 되어 있고 서울대병원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1000여명으로 되어있다.
편차가 아주 크지만, 이는 전시에 제대로 기록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환자들이 죽은 뒤 병원은 북한군 부상병들의 후송 기지로 쓰였고,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된 뒤에야 끔찍한 참상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게다가 밀려나기 직전에 또 한차례 학살을 벌인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두 번째 학살극은 대한민국을 위해 끝까지 협박하는 북한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자나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민간인과 언론인 등이 그 대상이었다. 숫자는 무려 백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 군의관, 의무병 상당수가 북한에 납치되어 북한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저항하던 일부는 본보기로 광장에서 서울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참혹히 살해 당했다
◆ 서대문 적십자 병원
돈의문(서대문)의 적십자병원(위 사진)에서도 한국군 부상병이 대량 수용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서울대병원처럼 곧바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기는 한국군 경비병도 없어서 인민군이 느긋하게 병원을 점령한 다음 "동무들은 죄가 없다. 치료가 끝나면 다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장교가 나서서 안심을 시키고 남아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계속 부상병들을 돌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장 그날 오후에 북한군 부상병에게 침대를 비워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여기 그대로 있으면 학살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직감한 일부 장병이 탈출을 시도, 성공했다. 이 때 이미 군의관은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 병사들이 탈출한 이후에 병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다. 남아있던 부상병들은 전원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곳 이 밖에도 서울 시내 여러 병원들과 환자를 수용하고 있던 교회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살이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으나, 정확한 희생자들의 명단과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후에 전주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학살극이 있었다.
서울 점령의 선두에 선 세 부대 중에서 직접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벌인 부대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오는 "울프독의 War History" 포스팅에 따르면 학살의 범인은 105전차여단으로 추정되는데,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해당 필자가 당시의 정황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한 것이다.
105 전차여단은 소련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주축인데다 여단장 류경수부터가 김일성 직속 항일빨치산 출신의 무지하고 잔인한 인간이라 거리낌 없이 국군 부상병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105여단은 낙동강까지 내려가면서도 수시로 포로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런데도 류경수는 포로 학살을 금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서울 대병원에 보관중인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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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보다 더했든 덜했든 그게 저 사건이 더 비난받거나 덜 비난받을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저 사건은 그 자체로 전쟁범죄이므로 강력히 비난받아야 합니다.
이승만의 학살은 그거 나름대로 비난하면 될 일이구요.
같은 동포들끼리 무슨 한이 서려있다고 이리도 잔악하게 행동했는지 너무나도 아픈 역사네요.
일본이 뿌린 씨앗이 오는날까지 이리도 한민족을 목죄일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