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 스키부대 모습(사진=위키피디아)
겨울철 한파와 관련해 흔히 쓰이는 표현인 '동장군(冬將軍)'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실패에 따라 만들어진 단어로 알려져있다. 앞서 발트해를 놓고 스웨덴과 겨뤘던 대북방전쟁은 물론 훗날 나치독일과 치른 2차대전에서 러시아는 모두 동장군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래서 흔히 '추위는 러시아를 보호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추위가 보호하는 러시아조차 동장군의 위력 앞에 참패한 전쟁이 있다. 바로 1939년, 핀란드와 벌였던 '겨울전쟁(Winter War)'이다. 겨울전쟁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1939년 11월30일부터 1940년 3월13일까지 딱 겨울동안 벌였던 전쟁이라 붙은 별칭이다. 또한 러시아가 13세기 몽골군의 침입 때 패배한 이후 역사상 두번째로 겨울에 참패한 전쟁이기도 하다.
오늘날 핀란드 일대 모습. 1939년 11월 당시 앞서 발트3국을 병합한 소련은 러시아혁명 때 떨어져나간 핀란드를 재병합시키기 위해 전선 전역에 걸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사진=구글맵)
겨울전쟁은 러시아혁명 당시 러시아제국에서 독립한 핀란드를 당시 소련의 스탈린정권이 재병합하기 위해 벌인 전쟁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소련측은 물론 전세계 대부분 국가들은 당연히 소련이 아주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개전당시 소련군은 25개 사단, 54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비해 핀란드는 전체 인구가 370만명 정도로 현역병은 물론 퇴역군인, 소년 징집병까지 탈탈 털어도 30만이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전차 숫자는 더 격차가 컸는데, 소련군은 개전당시 2500여대의 전차를 동원했으나 핀란드군은 고작 30여대에 지나지 않았고 항공기의 경우엔 소련군 3800여대, 핀란드군은 110여대가 고작이었다. 핀란드군은 소총도 부족해서 개인화기조차 통일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수치상으로만 봤을 때, 소련군은 그냥 진격만해도 이길 것으로 전망됐고, 이에따라 소련군은 보급품도 10일치만 준비해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진군했다고 한다.
전선을 구축하고 소련군을 기다리는 핀란드군 모습(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핀란드와 소련사이 국경은 1200km에 이를 정도였지만, 곳곳이 숲과 호수로 막혀있었고,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해 핀란드군은 악착같이 방어에 나섰다. 핀란드의 우수한 저격수들이 버티는데다 폭설로 좀체 진격이 어려워진 소련군 전차는 핀란드군이 던져대는 화염병에 불타올랐다. 이 화염병은 당시 소련 외교관으로 나치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성사시켰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에게 보내는 칵테일이란 야유의 의미를 담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 불렸다.
이렇게 진격이 막힌 상황에서, 12월 말로 넘어가면서 끔찍한 동장군이 소련군을 할퀴기 시작했다. 러시아도 전통적으로 추운 나라지만 러시아 주요지대보다 위도가 훨씬 높은 핀란드의 혹한기는 처참했고, 더구나 겨울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대부분은 당시 소련 남부인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 병사들로 한파를 잘 몰랐다고 한다. 영하 43도까지 내려간 혹한 속에 결국 소련군은 12만7000명이 죽고 18만9000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진격만 하면 이길 줄 알았던 전투가 참혹한 결과를 남긴 셈이다. 이에비해 핀란드군은 2만5000명의 전사자와 4만5000명의 부상자를 기록해 소련군과 대비해 훨씬 적은 피해를 입었다.
겨울전쟁 당시 혹한에 동사한 소련군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에 소련의 스탈린정권은 전선 돌파를 목표로 무려 90만명의 병력을 추가로 쏟아부었다. 결국 더이상 버티기 어려웠던 핀란드군은 소련과 평화협정에 나섰으며 영토의 11%를 넘겨주는 선에서 국권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소련이 발트3국을 병합하는 동안, 엄청난 전력 열세에도 살아남은 핀란드의 겨울전쟁 이야기는 전쟁사에서 두고두고 전설처럼 남게 됐다.
비록 전쟁은 현격한 국력차이를 무기로 목표대로 이겼지만 전투에서 참혹한 결과를 본 소련군은 이후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체질개선에 나서게 된다. 겨울전쟁에서 배운 방어전술은 전후 15개월 뒤 발생한 독일의 소련침공을 극복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핀란드로 향하는 소련 스키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