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말 미국 150달러를 조선 엽전으로 환전하면 ?
조선시대 19세기 말, 미국기자가 생활비로 쓰려고 150달러를 엽전으로 환전한 양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이 엄청난 엽전 더미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동전은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던 기자가 사용할 취재 경비였다.
던은 한국 화폐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졌는지 알지 못하였고,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일본인 통역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저녁 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 더미를 보고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였으며 1달러를 환전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콜리어스, 1904.6.4.).
「정부의 화폐정책 부재로 동전 가치는 갈수록 추락했다. 나라의 앞날은 생각지 않고 '동전과 백동전을 과다히 만들어 세상에 펴놓으매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 때는 은전을 받고 살 때는 동전을 주며, 대한 사람들도 점점 은전을 거두어 혹 감추며 일시 이익을 도모하니 세상에 남는 것은 추한 당오전(當五錢)과 무거운 동전뿐'이었다.」(독립신문, 1899.2.3.).
당오전은 거두어들이고 동전을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남대문 앞 장터
▷ 1891년 한양의 물가 ◁
☞ 환산 가격은 5전짜리 장터국밥을 4천원으로 환산해서 계산한 것입니다.
※ 도미 10마리 - 51냥(약40만 8천원)
※ 술값(탁주 한,두잔 추정) - 4~5전(약 3,200~4,000원)
※ 냉면 - 1냥(약 8,000원)
※ 장터국밥 - 5~6전(약 4,000~4,800원)
※ 부조 - 10냥(약 8만원)
※ 가마꾼(현대의 콜택시) - 2냥 4전 ~ 9냥(약 1만 9200~7만 2000원)
※ 두루마기 세탁/다듬이질 - 6냥(약 4만 8,000원)
※ 쌀 한 섬(180kg) - 215냥(약 172만원)
-> 80kg 한가마로 환산시 약 76만 4,000원
※ 밭을 간 품삯 - 2냥(약 1만 6,000원)
※ 사채 이자 - 월 3푼 선이자(연리 36%에 해당)
※ 관상 - 5냥 4만원
남대문 앞 장터
길 가운데 검은 것들은 소나 말들의 변이다.
지금의 마포, 만물상
닭장수
항아리 장수
다듬이 방망이 장수
다듬이질에 쓰는 다듬잇 방망이를 깎는 노인.
남의 집 앞에 좌판을 벌였다. 연장으로 나무를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통을 만드는 장인이 담장 앞에 좌판을 열고 통을 만들고 있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능숙한 솜씨로 연장을 써서 나무를 만진다. 앞에는 견본품이 놓여 있다
소쿠리, 빗자루 장수 아이 둘이 장사에 나섰다.
한 아이는 소쿠리를, 다른 한 아이는 빗자루와 짚신을 둘러멨다.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팔러 동네를 한바퀴 도는 중일 것이다.
갓 공장(工 匠).
남자가 성인이 되면 상투 튼 머리에 갓을 썼다.
신분에 따라 갓의 종류도 다르지만, 대부분은 말총이나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만들었다. 단발령으로 갓의 수요가 줄었을 텐데도 좌판에서 갓을 고치고 만드는 공장(工匠)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하다.
엿판을 멘 엿장수가 가위로 엿을 자르고 있다. 단것이 귀하던 때여서 ‘엿장수 마음대로’ 잘라주는 엿 맛에 홀린 동네 아이들이 이제 곧 모여들 것이다.
물장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마실 물을 사먹어야 했다. 하천의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장수들은 이른 새벽부터 단골집에 깨끗하고 맛난 물을 배달했다. 물지게는 등태에 가로로 길게 댄 막대기 양 끝에 양철통이나 나무통을 매달아 사용했다.
배추장수가 배추를 밭에서 출하하는 광경이다.
밭주인인 듯 보이는 이는 검은 안경에 궐련을 피고 있고, 담뱃대를 문 장정이 지게에 배추를 잔뜩 얹어 일어서려 하고 있다. 김치의 주재료로 사용된 배추는 일찍부터 수요가 많은 채소였다.
나무 장수들의 지게
나무장수
연료로 쓸 만한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던 시절, 많은 이가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삿갓을 쓴 나무장수가 장작바리를 사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땔감으로 쓸 솔가지를 황소 등에 싣고 시장에 나온 나무장수.
혹시라도 소가 달아날까 고삐를 꼭 잡고 있는 사내는 농한기에만 땔감을 해서 장에 내다 파는 농부인지도 모르겠다. 뒤로 성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성읍 인근이다.
물동이 장수
소달구지
달구지는 소가 끌기도 하고 말이 끌기도 했는데, 바퀴가 두 개인 것도 있고 네 개인 것도 있었다. 대체로 북한지방에서 바퀴 두 개 달린 달구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은 손님을 기다리는 소달구지들.
밥상을 멘 장정
네모 반듯한 소반을 지게에 진 장정들이 웃고 있다. 소반이 널리 사용된 것은 독상이 주로 쓰인 데다 이동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치를 집에 밥상을 빌려주러 가는 길인지 밥상을 팔려고 장에 나온 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소달구지
성을 배경으로 소달구지꾼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있는 순검과 아낙들의 신기해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굴건을 쓴 것으로 보아 소달구지꾼은 상중(喪中)이었던 것 같다
양주를 손님에게 먹이는 주모가 젊다.
1900년이전에도 양반 자제들은 양주를 마셨다.
주막에서는 보통 음식값만 받고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 1 ~ 2칸의 방에 보통 10여명이 묵었다고 한다.
구한말의 주막
밥 그릇 크기가 모두 예사롭지않다
구한말의 주막
잡화점
1920년대 잡화점의 모습으로 갓신, 나막신, 짚신, 가위, 안경집 등 온갖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상투를 틀고 긴 담뱃대를 문 주인의 모습이 이채롭다
서대문앞 장터
짚신 장수
대장간 대장장이가 풀무에 달군 쇠를 두드려 연장을 만들고 있다. 뒤로 보이는 소년이 풀무에 바람을 넣어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당시 사람들은 농기구나 연장이 필요하면 장날 대장간에 들러 주문하곤 했다.
장으로 가는 길목에 한 소년이 좌판을 열었다. 오지그릇 안에 가로세로로 돌기를 만들어 물건이 잘 갈리도록 한 오지확을 늘어놓았다. 손님이 없을까 걱정하던 소년에게 지나던 장정이 흥정을 붙이고 있다.
장터에 노점이 늘어섰다. 지게꾼들이 보이고 아낙들이 모여 있다. 햇살이 따가웠는지 우산을 펴둔 좌판 아낙에게 머리에 물건을 인 아낙이 흥정을 벌이는 듯하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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