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편지 / 장이지
어떤 사랑도 기록할 수 없다면 사랑을 쓸 수 없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각자 태워버린 편지는 되돌아올 수 없어도 우리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지 얼마만큼의 하늘이 있어서 전화해도 받을 수 없는지 쓰고 싶어요 편지지를 고르면서 제가 저녁 하늘의 그라비어를 보고 있을 때 당신이 있는 곳은 몇시인가요? 우리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는지 결혼하지 않고 사는지 그런 것은 쓸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랑 없이 사는 것이 대체 가능한 일인지 말하기 어렵지만 사랑이 지나갈 때 벚꽃처럼 보이는 재, 불타버린 편지가 어디까지 그뒤를 밟다가 부서져 흙이 되는지 흙이 되어 꽃이 되는지 쓰고 싶어요 사랑을 쓸 수 없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 2023.12) ---------------------
* 장이지 시인 1976년 전라남도 고흥 출생, 성균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0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 『편지의 시대』 등 시선집 『안국동울음상점1.5』, 문학평론집 『환대의 공간』 『콘텐츠의 사회학』 『세계의 끝, 문학』 영화평론집 『극장전: 시뮬라크르의 즐거움』 2012년 김구용시문학상, 2012년 바움젊은시인상 수상 현재 성공회대, 성균관대 등에 출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