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이 시는 사슴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고독과 향수를 다룬 작품이다. 시인은 사슴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켰다.
첫째 연은 사슴의 현재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며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단절되어 고독하게 살아가면서도 귀족적인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둘째 연에서는 고독에 잠겨 있던 사슴이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높은 족속"이었을 때의 행복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깊은 향수에 젖는다. 그러나 그 과거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잃었던 전설"이기 때문에 사슴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먼데 산을 쳐다본다." 둘째 연에서도 전설 속의 나르시스처럼 자기 안에 갇혀서 과거의 향수에 젖어 사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