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건 웃지요
옛 사람의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간결하게 할말만 하고, 때로 아무 말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예전 중국의 곽휘원郭暉遠이란
이가 먼데로 벼슬 나가 있다가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착각하여 백지를 넣고 봉하였다.
그 아내가 오랜만에 온 남편의 편지를 꺼내보니 달랑 백지 한 장 뿐이었다.
답시를 보냈다.
碧紗窓下啓緘封 (벽사창하계함봉) 푸른 깁창 아래서 봉함을 뜯어보니
尺紙終頭徹尾空 (척지종두철미공) 편지지엔 아무것도 써 있질 않더이다.
應是仙郞懷別恨 (응시선랑회별한) 아하! 우리 님 이별의 한 품으시고
憶人全在不言中 (억인전재불언중) 말 없는 가운데 그리는 맘 담으셨네.
청나라 원매의 『수원시화隨圓詩話』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내의 난데없는 답장을 받아든 곽휘원은 아마 그때까지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경우이긴 하지만, 일껏 편지를 써놓고 백지를
봉해 부치는 곽휘원의 약간 모자란 듯한 멍청함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정작 원매도 쓰다
달다 말없이 단지 그녀의 답장만을 실어놓고 말을 멎고 말았다. 정말 마음이 통하는 사람
사이에 언어란 원래 불필요한 것이다.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진晋나라 환이桓伊란 사람은 피리를 잘 불기로 유명했다.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가
시냇가에 배를 대고 있는데, 환이가 언덕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때까지 서로
인사가 없던 터였다. 왕휘지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듣자니 그대가 피리를 잘 분다는데,
나를 위해 한 곡 연주해 주겠는가." 환이는 당시 높은 신분이었지만, 그 또한 왕휘지의
명망을 듣고 있었다. 두말없이 수레에서 내린 그는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그를 위해 세
곡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말없이 다시 수레에 올라 그 자리를 떠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마디의 말도 직접 오가지 않았다.
예전 카알라일과 에머슨이 처음 만나 삼십 분 가량을 아무 말 않고 앉았다가는 오늘은 퍽
재미나게 놀았다며 악수하고 헤어졌다는 싱겁고도 이상한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閒 (소이부답심자한) 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가거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또 다른 세상일래, 인간이 아니로세.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다.
산속에 묻혀 사는 나에게, 왜 답답하게 산속에 사느냐고 묻는다.
묵묵부답,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한들 그가 내 마음을 어이 헤아릴 것이랴.
또 낸들 무슨 뾰족한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나, "왜 사냐건 웃지요"밖에는.
복사꽃이 물위로 떠가니, 상류 어디엔가 무릉의 도원이 있지나 않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