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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 33] 시중에 나돈 ‘탄핵 찬성’ 62명…날 힘들게 한 명단 속 그 이름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때 나는 청와대 관저에서 홀로 생중계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심정은 담담했다.
탄핵안 가결 직후 수화기를 들어 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참모진에게 지시했다.
“이번 국무회의를 간담회 형식으로 소집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직후 최재경 민정수석의 사표도 수리했다.
사실 최 수석의 사표를 수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최 수석은 탄핵안이 가결되기 16일 전인 11월 23일 사의를 표명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뒤를 이어 10월 31일 임명됐으니 한 달도 채 안 돼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한 달도 안 돼 물러난 민정수석
최 수석은 검찰 특수수사본부(특수본)가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11월 21일 발표하면서,
내가 최서원 원장 등과 상당 부분 공모관계에 있다고 밝힌 것을 두고 “책임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에 민정수석이 청와대 내부에서 중심을 잡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더 계셨으면 좋겠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최 수석은 자유롭게 외부에서 재판 등을 돕는 것이 오히려 제약이 없을 것이라고 나를 설득했고,
나는 사표를 수리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2016년 11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에서 최재경 민정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최 수석은 임명장을 받고 닷새 뒤인 11월 23일 사의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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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참모들은 내게 면담을 요청해 최 수석의 사표 수리를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참모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민정수석까지 사표를 내고 나가면 마치 가라앉은 배가 된 것같이
외부에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다른 참모는 “위기인 만큼 일단 민정수석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야 실시간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요청이 이어지면서 나도 당분간 사표 수리를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돼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면서 사표 수리를 더는 미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 수석은 후임으로 조대환 변호사를 추천했다.
처음에는 민정수석을 공석으로 두고 선임비서관인 민정비서관으로 수석 역할을 대행시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한 참모는
“권한 정지가 되면 구체적으로 민정수석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기 때문에 굳이 수석을 임명하지 않고
민정비서관으로 대행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의견을 줬다.
또한 조 수석 임명을 두고 참모진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당시 조 수석을 임명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슴속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12월 9일 오후 담담한 마음으로 비공개 국무회의를 소집했는데,
함께 고생한 국무위원들의 얼굴을 보자 감정이 북받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청와대에서 국무위원 간담회를 소집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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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덕이고 불찰입니다.
국가가 혼란해져 송구합니다.
국회와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 혼란을 잘 수습해 주기 바랍니다.
헌법과 법률의 절차에 따라 헌법재판소 심판과 특검 조사에 차분하고 담담하게 임하겠습니다.
합심해서 국정 공백을 최소화시키고, 취약계층의 삶을 잘 살피고, 민생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해 주십시오.
국민은 공직자를 믿고 의지합니다.”
국무위원들은 다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준식 교육부총리, 윤병세 외교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등의 순서로 발언했고,
황교안 국무총리도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그런 국무위원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정치는 모든 것을 아우러야 하고, 정책은 그런 정치의 중요한 부분이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정책으로 표현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입만 살아서 “국민을 위한다”고 백 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국민을 위한 반듯한 정책 하나를 내놓는 것이
정치인과 관료의 자세라고 믿어왔다.
부처 장관들과 나는 탄핵안이 가결될 때까지 그 정책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나는 장관 한명 한명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고,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애써 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국민에게 필요로 하지만 당장은 티가 나지 않는 일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그들을 더는 대통령으로서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으로 피눈물이 흘렀다.
나는 장관 한분 한분을 거명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당부의 말도 함께 전했다.
회의장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일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한번 미안함을 전했다.
“마음이 아플 줄 알았지만, 마음속 피눈물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대통령으로서 국정 과제를 하지 못하게 되고, 힘이 돼주지 못해 피눈물이 납니다.
이제 대통령 몫까지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내가 가야 할 길은 멈췄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흔들림 없이 해주십시오.”
회의가 끝나고 자리를 돌면서 일일이 참석자들과 악수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장관들과 사실상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날이었다.
탄핵 찬성 명단 보고 새삼 느낀 정치의 무정함
관저에서 머물면서 마음을 추스르는데, 탄핵안이 가결되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가결 3일 전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청와대를 찾아와 면담한 일이 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탄핵안 표결을 당론으로 정하지 않고, 자유투표에 맡기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 대표와 정 원내대표 모두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거기에 대고 대통령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묵묵히 듣고 있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며칠 뒤 탄핵안이 가결되고, 찬성한 의원 62명의 명단이 시중에 나돌았다.
과거 이른바 ‘친박 무소속 연대’ 소속이었고,
이후 친박임을 자처하며 활동해 온 3선의 A의원이나,
내가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던 2012년 총선에서 자신이 위태롭다고 지원 유세를 간곡하게 부탁해
곁에서 도왔던 수도권 재선인 B의원 등이 찬성 명단에 들어있는 것도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 외에 2012년 총선 때 경기 지역에서 내가 시장통을 구석구석 돌며 유세를 도왔던 재선 정책통 C의원,
그리고 역시 ‘친박 무소속 연대’ 소속으로 친박임을 강조하던 4선의 D의원의 이름도 나를 힘들게 했다.
당시 탄핵안 표결은 당론 없이 자율투표로 진행됐고, 나 역시 표결 결과를 존중하고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대통령으로서 국회에 미안함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의원들은 누구보다도 ‘친박’임을 강조하면서
이를 발판으로 선거에서 승리하고 의원직을 이어갔던 이들이었다.
정치란 참으로 무정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탄핵안 가결 직후 칼 빼든 검찰
검찰은 탄핵안 가결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12월 11일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최 원장을 구속기소했다.
이를 지켜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검찰이 절차에 따라 수사하고 있는데,
내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2016년 12월 12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이정현 대표(왼쪽).
이날 비박계의 퇴진 요구를 일축한 그는 나흘 뒤인 12월 16일 다른 최고위원들과 함께 사퇴했다.
중앙포토
5일 뒤인 12월 16일에는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사퇴했고, 최고위원들도 일괄 사퇴했다.
사실 이 대표가 어느 시점에서 물러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그렇게 곧바로 사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직무정지 상태에서 관저에 칩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답답했다.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절차는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듯했다.
12월 19일 최서원 원장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에 대한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렸다.
나 역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 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2월 29일에는 탄핵심판 법률 대리인단 9명 전원을 상견례차 청와대로 초청해 만났다.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도 고문 자격으로 참석했다.
대리인단은 사표를 내고 물러난 최재경 전 민정수석이 구성했다.
최 수석은 청와대 밖에서 나름대로 애써서 대리인단을 구성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당시 최 전 수석과 대리인단은 탄핵심판과 특검 수사를 분리해 대응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대리인단 측과 이른바 특검에 대응하는 변호인단을 분리하지 말고 통합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양측을 분리한 뒤 재판이나 탄핵심판을 진행하면서 여러 차례 소통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사건에 대한 이해도가 양측의 변호인단이 제각각이라 협력하는 데도 애먹었다.
변호인단은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어쨌든 초기에 양측을 분리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인 건 나의 오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무성·유승민 신당 창당, 고질적 이합집산
탄핵안 가결 뒤 정치권도 술렁대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 27일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현역의원 29명이 새누리당을 집단 탈당해
개혁보수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왼쪽)가 2016년 12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보수신당추진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유승민 의원. 중앙포토
이 소식을 듣고 나는 또다시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이합집산 행태가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만약 일반 회사라면 구성원들이 이념 가치가 달라도 얼마든 함께 일하고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은 구성원 간에 세부적으로는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더라도,
적어도 추구하는 큰 틀의 가치와 이념은 일치해야 하지 않을까.
또 싸우더라도 당을 깨고 나갈 것이 아니라 정당의 틀 안에서 싸우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2020년 총선에서 이들이 다시 미래통합당으로 복귀한 것을 보고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보수 진영을 언급할 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예전부터 반 전 총장을 참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탄핵 사태 전부터 나는 그가 보수 진영의 차기 대선 주자로 떠오를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보수 진영에서 확실한 차기 주자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던 상황이라, 반 전 총장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탄핵안이 가결되고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보수 진영에서는 반 전 총장을 차기 대선 주자로 만들어
위기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새누리당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한 정치인이 탄핵 전 미국으로 건너가 반 전 총장을 만났다는 소문도 돌았다.
귀국 후에야 전화 온 반기문
그렇게 해가 바뀌어 1월 1일이 됐다.
반 전 총장은 원래 새해가 되면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고, 서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날은 무슨 일인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시 내가 직무정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했다.
이후 반 전 총장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1월 12일 귀국해 인천공항에서 A4 용지 2장 분량의 입장문을 읽으며 사실상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정치적 대통합, 경제·사회적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1월 14일에는 서울 광화문 도심에서 이뤄지던 촛불집회에 참석할 의향이 있느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기회가 되면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 본인의 판단에 따른 답변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착잡함이 없지 않았다.
2017년 1월 15일 경기도 평택의 제2함대를 방문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천안함에 헌화ㆍ참배하고 천안함과 기념관을 둘러본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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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반 전 총장으로부터 뒤늦게 전화가 왔는데, 아무래도 형식적인 대화밖에는 나눌 수 없었다.
이전 신년에 통화했을 때는 남북 문제 등 여러 현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10분 이상 대화를 한 적도 있지만,
이날 대화는 2분을 넘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화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형식적인 통화였다.
반 전 총장은 그렇게 대선 주자로서 시동을 걸었지만, 좌파 진영의 거센 공격에 직면했다.
그리고 귀국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던 2월 1일, 정치 교체의 뜻을 접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으로 보수 진영에서는 아노미에 가까운 혼란 상태가 이어졌다.
당시 탄핵에 찬성했던 보수 정치인 중 상당수가 반 전 총장 캠프에 몸담았는데,
반 전 총장의 급작스러운 사퇴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들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이 나와 출마에 대해 상의한 것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다소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의견을 낼 상황은 아니었다.
반 전 총장의 낙마보다도 탄핵안 가결 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쉬운 신년 기자간담회와 유튜브 인터뷰
직무정지 상태로 맞은 새해 첫날,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신년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배성례 홍보수석이 “언론인들과 만나 진솔하게 심경을 밝히시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고,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당시 나는 최서원 원장이 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언론에 보도된 의혹 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내가 삼성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다른 누구의 문제도 아닌 내 문제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허위 의혹이 마치 사실처럼 퍼지고, 잘못된 뉴스가 확산하는 것을 보고 빨리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나는 내가 파악하고 있는 선에서 여러 의혹이나 취재진의 궁금증에 관해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간담회를 열었던 것은 다소 성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최 원장의 일탈 등 전체적인 그림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의 의혹을 해명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이후 검찰 조사를 받거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알게 된 최 원장의 범죄 혐의는 충격적이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사전에 제대로 파악하고 간담회에 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1월 25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정규재tv' 운영자인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규재TV
2017년 1월 25일 진행한 유튜브 ‘정규재TV’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이 인터뷰도 홍보수석실의 건의로 이뤄졌고, 탄핵심판 변호인단도 적극적으로 출연을 건의했다.
다만 변호인단 중 한 분만 내가 정규재TV와 인터뷰하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그는 내가 아직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파악이 되지 않았고,
또 최 원장이 대통령 몰래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방송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고 위험부담도 크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인터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지금 와서 취소는 어렵다고 양해를 구했다.
사실 당시 주류 언론에선 나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튜브 채널을 활용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과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모르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인터뷰에 응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전체적인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 보니 국민께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이재용 구속, “다음 타깃은 나구나” 직감
특검 수사에 속도가 붙으면서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1월 17일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장관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조사를 받고 21일 구속됐다.
당시 나는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이 어떤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구속까지 된다는 게 참 의아했고, 충격이 컸다.
재임 동안 옆에서 애쓴 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은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판의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구속된 이는 또 있었다. 특검은 1월 16일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됐다.
하지만 3주 만에 증거를 보강해 영장을 재청구했고, 2월 14일 이 부회장이 구속됐다.
이 부회장 구속 뒤 우리 변호인단에서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 역시 그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을 뇌물 공여자로 보고 구속했고,
동시에 내가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제 다음 타깃은 나일 테고, 나를 구속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겠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나는 결백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내가 의결권이 있는 국민연금공단에 찬성표를 던지라고 지시하고,
그 대가로 최 원장과 함께 433억원(기소 때는 592억원으로 증가)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게 특검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합병과 관련해 공단이나 참모진에게 어떤 지시도 한 적이 없고, 어떤 형태로든 관여한 적이 없다.
단 한 푼의 뇌물도 받은 적이 없다.
또한 보건복지부를 통해 공단이 어떤 결정을 하리라는 보고를 사전에 받거나 그것에 대해 내 의견을 제시한 적도 없다.
단지 사후 보고를 받았을 뿐이다.
또한 당시 복수 여론조사에서 합병에 찬성하는 국민 여론이 더 우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특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뇌물죄로 엮으려고 했고,
나는 특검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담담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2017년 2월 13일 뇌물공여 등 혐의를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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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특검이 나를 뇌물과 연결짓는 데 혈안이 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을 탄핵시키려면 반드시 뇌물죄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렇듯 나를 향한 특검의 칼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긴장도 됐지만,
동시에 함께 일했던 이들이 붙잡혀 들어가 고초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도대체 이 정도의 사화(士禍)가 있었나 싶었다.
당시 특검의 수사 및 언론 대응 방식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팩트가 확인되지 않은 특검발 기사들이 쏟아졌고,
특검에서도 수사 진행 상황이나 의혹 등을 홍보하듯 공개했다.
특검이 한마디 할 때마다 나라가 들썩댔고 국민이 흥분했다.
너무나 급하게 진행된 헌재의 탄핵 변론
그런 와중에 헌재의 탄핵심판 변론은 쉼 없이 진행됐다.
1월 13일 1차 변론기일을 시작으로 2월 27일까지 무려 17차 최종 변론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나는 변론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서면 의견서를 냈다.
변론에 불참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해명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비판이 나온 것으로 안다.
몇몇 탄핵심판 변호인 사이에서도 최종변론에는 내가 직접 참석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변론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최서원 원장이 대체 바깥에서 어떤 일을 벌이고 다닌 것인지, 또 거기에 누가 연루돼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언론에서 매일 최 원장과 관련한 의혹 보도를 쏟아내는데 정작 나는 처음 듣는 내용이라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라며 황당해 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변론에 나간다면 사건에 대해 정확한 입장을 밝힐 수도 없고,
오히려 국민을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헌재의 탄핵심판은 너무 급하게 진행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이정미 재판관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재판관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선고를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재판은 무엇보다도 공정하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이 중요한데,
특정 재판관의 임기에 재판 일정을 짜맞춰야 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탄핵심판을 앞두고 청와대 내부에서는 재판관 8명 중 4대4 또는 5대3으로 탄핵이 기각될 것이라고 전망한 보고도 있었고,
반드시 인용될 테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보고 내용이 제각각이라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일단 헌재의 결정을 기다려 보자는 생각이었다.
운명의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