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6: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개역개정판)
잠언 26:25 그런 자가 듣기 좋은 말을 할지라도 믿지 마라. 일곱 가지 혐오스런 것들이 그 마음에 들어 있다. (쉬운성경판)
잠언 26장 24절에는 원수가 나오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악의를 품은 사람, 남을 미워하는 사람 등으로 등장한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일단 원수 마귀... 그 놈은 나쁜 말을 할때도 많지만 좋은 말로 속이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분노에 가득한 사람들이나 남을 조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들 수도 있겠다.
하긴 제품이나 상품, 서비스 팔 때도, 뭔가 하자가 있을 경우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문제는
이 구절을 대할 때 거의 나 자신을 청자(聽者)의 입장에 두고
상대가 선한지, 악한지 내가 판단하려고 든다는 점이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서도
주인공 장그래가 자신이 처한 업무 환경을 두고
바둑의 대국을 연상하며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물론 상대방의 선악에 대해 판단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형국에 대한 판단은 정확하다.
내가 그 친구(?)에게 배울 점이라고는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하고 말한다는 점이다.
뭐가 그리 급하고도 바쁜지
별로 지혜가 없는 우리는 말하기에도 급하고 바쁘다.
그래서 실수가 많다.
실패로 이어지기 쉽다.
그래.. 사실은... 내가 화자(話者)일 경우가 더 중요한 듯 하다.
일단 내가 좋은 말을 하고 있는가? 그것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좋은 말을 하는 의도는
나의 목적을 위해 남을 속이기 위함인가?
아니면 선한 목적인가?
그 말을 하는 내 속에 일곱 가지 악이 있는가?
그 악한 요소는 어떠한 것들인가?
내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제거가 가능하다.
열왕기하 13장의 늙은 선지자는
여로보암 왕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돌아가는 무명의 선지자를 붙잡아
천사 이야기까지 동원하여 그를 속였다.
결국 곧바로 유다로 가야했던 불쌍한 선지자는 그 속임에 걸려넘어갔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만다.
이 늙은 선지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분열될 때 남유다로 내려갔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은채
벧엘에서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하나님의 사람이 반가웠는지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일면식도 없던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서
그를 만나는데 성공하고
그를 속이는데도 성공(?)한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주로 만나는 이들은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이지만
주로 말하는 이들은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다.
나는 그들을 잘 속인다.
그거 하나는 잘 하는 것 같다.
하긴, 그들에게는 내게 속았다는 사실 자체가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겠지만
또는, 나도 그들에게 많이 속아넘어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역량(그 하찮은 역량)을 총동원하여
내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행동이 아닌... 말로...
아니 어쩌면
나는
그들이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어도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상대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보기도 어려울 듯 하다.
나처럼 의전용 멘트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속아넘어간다.
여로보암 앞에서 300년 뒤 요시야를 예언했던
그 위대한 무명의 선지자도 속아넘어갔다면
나는 남들에게, 또 자신에게
얼마나 잘 속아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프랑스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프랑스 요리를 시키고
프랑스어 몇 마디를 한다고 해서
프랑스인이 아닌 것처럼
(중국집에 들어가서
중국집 코스 요리를 시키고
중국말 몇 마디 알아듣는다고
중국인이 아닌 것처럼)
교회 예배에 출입하며
교인답게 말하고
교인다운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한다고 해서
교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속지도 속이지도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