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은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오 9,27-31)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Let it be done for you according to your faith.”
And their eyes were
opened.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대한 반전이 오리라고 예언한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이 듣고, 눈먼 이들이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겸손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제1독서).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신 뒤
그들의 눈에 손을 대어 치유하신다. 이 일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졌으나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독일 아헨 교구의
교구장으로서 온화한 인품의 훌륭한 사목자요 뛰어난 혜안을 지닌 신학자였던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는 어느 대림 시기에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통해
자신의 교구민들에게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하나의 창문/ 대성당의 찬란하고 장엄한 유리창/ 그러나 빛이 없다면 이런 창문들이 무슨 소용이랴// 성탄절에 빛이 솟아오르네/ 성탄절에 나의
삶을 비추시는 그분이 태어나시네/ 비록 내가 아직 나의 삶에서 오직 어둠만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제 그분의 빛 속에서 나의 삶을 두 손에
가만히 품고 싶다네/ 그 창문은 곧 빛나는 색채로 환해지겠지/ 그리고 많은 이들이 빛을 보게 되겠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 둘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실의에 잠긴 하느님의 백성에게 ‘거대한 전환’이 오리라고
예언합니다. 눈먼 이들의 눈이 어둠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빛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존재의 창이 비로소 빛으로 밝혀지는 것을 갈망하는 때입니다. 빛이신 그분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삶은 눈먼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빛이신 분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참된 변화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꿈꾸지도 못하며 그 빛 안에서
기뻐하지도 못할 테니까요. 이제 창의 먼지와
그을음을 지우고 본연의 찬란한 색채를 주님의 빛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고 닦을 대림 시기에 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는 주님의 빛을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는 귀한 존재라는 진리일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어둠 속에 묻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빛은 어둠을 이기고 삶을 찬란하게 한다는 믿음을 어떤 처지에서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묵상 2014-12-05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배달하 신부 인생 대역전 오늘 제목은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의 소제목 ‘대역전’ 그대로입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인용해 보면, “이제 조금만 있으면 …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정녕 이런 대역전의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며 이제 복음으로 눈을 옮겨봅니다. 성경의 역사비평이나 문헌비평과 같은 전문적인 분야를 살짝 덜어내고 보면, 마태오복음 5―7장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강령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8―9장은 그 강령들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현장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다양한 환자들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눈이 먼 두 사람입니다. 그들은 길에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들의 외침에 예수님의 반응은 집안에 이르러서야 나타납니다. 그분이 물으시기를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예, 주님!” 우리 삶의 대역전은 이렇듯 내 믿음과 그 응답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은 스스로의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의탁입니다. 끝까지 졸졸 따라가는 긴 어리석음 끝에 “예, 주님!” 하고 짧게 답하는 단순함입니다. 인간은 살아온 만큼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날수만큼의 경험과 지식들이 쌓여서 실로 복잡한 계산과 무거운 속내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대림절이 필요합니다. 깎아내고 메우는 작업이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그분을 따라나설 수가 없습니다. 타인의 시선과 나의 체면이 엉켜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가위눌린 듯 말입니다. 생사의 문제 앞에서조차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구원되고 눈을 뜨려면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습니다. 허영, 비교, 사치, 체면과 같은 마음의 군더더기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이 대림절이 좋은 기회입니다. 인생 대역전의 기회 말입니다.
~~~~~~~~~~~~~~~~~~~~~~~~~~~~~~~~~~~~~~~~~~~~~~ <너희는 믿느냐?>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아마도 그들은 구걸을 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지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말은 몇 푼의 돈을 청하는 말이지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청하는 자비는 눈을 뜨는 것,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또 영혼의 구원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믿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그런 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 새로운 인생을 주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 등을 뜻합니다. 지금 이 질문은 "나를 믿느냐?"가 아니라, "나의 권능을 믿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과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사악의 탄생을 예고하셨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아브라함과 내가 모두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창세 18,12). 그때 하느님께서는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라고 꾸짖으셨습니다(창세 18,14). 사라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사라처럼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예수님의 권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랐고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희는 믿느냐?" 라는 질문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고쳐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마르 8,22).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믿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그들에게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원래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 속으로(마음만으로, 또는 생각만으로)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자기의 믿음을 겉으로 고백해야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박해 때에 속마음으로는 믿고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 안 믿는다고 거짓말을 해서 살아남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그냥 배교자가 됩니다. 자기는 안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그 행위 자체가 배교라는 것입니다. 박해자들이 그것을 노리고 "거짓말이더라도 안 믿는다고 말하면 풀어 주겠다." 라고 유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느냐는 질문에 최소한 침묵이라도 지키면 살려 주겠다고 유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으로는 안 믿으면서도 믿는다고 말해서 죽은 경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죽을 사람은 실제로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있었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자살입니다.) 또 믿음은 고백을 통해서 더욱 강한 믿음이 됩니다. 이것은 지금이라도, 또 누구라도 금방 체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자기의 믿음을 감추면 감출수록 믿음이 더욱 약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사람들에게 "너희는 믿느냐?" 라고 물으신 이유 가운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놓치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고, 삶 전체가 고백이 되어야 하고, 증언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앙 고백은 '삶'으로 구체화되어야 하고(실현되어야 하고), 그래서 신앙인의 삶 자체가 고백과 증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적인, 또는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삶은 그렇지 않은데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선거에서 당선될 목적으로, 또는 교회가 시행하는 어떤 공사를 맡으려고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내세우는 경우 등이 그것인데, 그것은 입술로만 고백하고 주님의 뜻은 실행하지 않는 죄가 될 뿐입니다(마태 7,21-23).> 송영진 모세 신부 ~~~~~~~~~~~~~~~~~~~~~~~~~~~~~~~~~~~~~~~~~~~~~~~
오 늘 복음은 ‘들음’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고 계실 때,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이라며 구세주이심을 고백합니다. 볼 수도 없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한마디로, 듣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음’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 비를 베풀어 주십사는 이들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응하지 않으신 채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까지 따라 들어갑니다. 사실 눈먼 이들의 처지에서 특정한 사람을 따라가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집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들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때로는 돌부리에 걸리거나 사람들에게 부딪치면서도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흔적 을 ‘들으려’ 하는 이들의 애절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보게 해 주십니다. 오 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은 입으로만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귀를 빳빳이 세우고 그분의 소리를 들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소음 속에서도, 많은 거짓된 소리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까? 우리도 진정으로 눈을 새롭게 뜨려면 그분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 날 중세시대 때의 지도를 보면 요즘 시대의 현대 지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물론 지도 만드는 기술이 현재보다 많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사람들이 한 번도 살지 않은 땅에 대한 처리 문제 때문이라고 하네요.
당 시 지도학자들은 지도를 만들다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미지의 땅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냥 미지의 땅으로 표시해야 하겠지만, 사람도 살지 않는 땅을 굳이 표시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땅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미지의 땅을 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위험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범위를 좁혀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안전한 땅만 표시하는 편이 모든 이들에게 낫겠다 싶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판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의 탐험 역사가 수세기나 늦춰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이 빠지지 않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하지요. 제발 그러한 시간이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러한 시간이 오더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후다닥 지나갔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피하려고만 한다면 어떨까요? 앞서 인류 탐험의 역사가 늦어지는 것처럼, 나의 성장 역시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 리들은 종종 어렵고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집니다. 또 다른 이들의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도 ‘벌 받는 것 아냐?’라는 식으로 섣부른 판단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간들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오 늘 복음에서 보면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이에 굴하지 않고 쫓아 들어가 계속 청하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 약 이들이 앞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까요? 예수님의 별 반응 없음에도 상관없이 끝까지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간절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렵고 힘든 상황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믿음을 키울 수 있었던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 렵고 힘든 일, 정말로 피하고 싶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 그러나 이 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끝까지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이루어지니까요. ~~~~~~~~~~~~~~~~~~~~~~~~~~~~~~~~~~~~~~~~~~~~~~~~~~~~~~~~~~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이 적진에서 포위된 채 숨어 있었습니다. 양식이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들이 적군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꼼짝없이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곧 구출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달랐습니다. 한편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다른 한편은 힘 있는 자신들의 조국인 미국이 구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국의 힘을 믿고 있던 한편은 미군이 적군들을 물리치고 곧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오늘일까 하고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실망해야 했고 결국 절망하여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믿음을 두고 있던 군인들은 늘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만이 마지막까지 살아 목숨을 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두 ‘눈먼 이’를 고쳐 주시면서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세상의 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 것에 먼저 믿음을 두고 삽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능력을 하느님보다 더 깊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보다 세상의 논리와 가치를 먼저 선택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늘 불안해하고 삶에 지쳐 가는 이유입니다. 한편 주님에 대한 믿음은 힘을 솟게 하고 평화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기적을 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목소리에는 애원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너무나 짧은 대답입니다. 주님 앞에서 무슨 긴 말이 필요할는지요? 그들은 즉시 눈을 뜹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큰아버지는 그를 양자로 삼고 사업을 물려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수도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36세의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됩니다. 성인은 고해 신부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위선과 착각을 꿰뚫어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겸손했고, 유머와 해학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선물했습니다. 영적 생활은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통념’을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딱딱함과 ‘옹졸함’에 분명 변화를 일으켰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시대를 앞서 살았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모르면 볼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고집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눈 뜬 소경’입니다. 삶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언제나 많은 법입니다. 우선은 ‘홀로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할 때, ‘눈 뜬 소경’을 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이러한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70억 인류 중에서 이 사람을 만나고 사는 것은 암이 치유된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암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또한 치료하기 힘든 암을 극복하고 치유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해도 아마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사는 것보다는 높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이는 70억분의 1의 확률을 뚫고서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커다란 기적을 안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란 모든 것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재해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살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순간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매순간 기적과 같은 놀라움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성무일도 기도를 바치다가 우연히 성무일도의 앞부분에 있는 이동축일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성무일도 책은 1990년에 그러니까 제가 신학생 때 처음으로 나와 구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부분에 이동축일표라고 매년 날짜가 바뀌는 재의 수요일, 부활대축일, 승천, 성령강림, 대림1주일의 날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짜는 2008년까지 되어 있지요. 저는 그 당시 그러니까 1990년에 이 2008년을 과연 내가 맞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 초반인 그 당시 2008년은 너무나도 멀어 보이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해가 몇 년이지요? 맞습니다. 2011년입니다. 성무일도에 표시된 이동축일표의 마지막 해를 넘긴 지 벌써 3년이나 되었습니다.
지나갈 것 같지 않은 시간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훌쩍 지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만약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는데 이 시간이 지나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를 맴돌고 있으면 어떨까요? 살아갈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시련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 역시 기적입니다.
생각하면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원하는 눈 먼 사람 둘에게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떠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더 확실할 것 같은데, 예상외로 예수님은 믿는 대로 되라고 말씀하시지요. 다행히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치유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뜰 수 있었지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굳게 믿기만 한다면 매 순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체험하는 영광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큰 공간일지라도 설사 그것이 하늘과 땅 사이라 할지라도 사랑은 모든 것을 메울 수 있다.(괴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양승국신부- <?XML:NAMESPACE PREFIX = O /> <사랑과 확신에 찬 응답>
공생활 기간 내내 지속되었던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활동,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불치병 환자들,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던 임종환자들에 대한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여러 이론과 상상을 동원해 다양하게 정의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그곳은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울부짖음이나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곳, 우리의 모든 결핍과 아쉬움, 죄와 죽음이 모두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앞에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버리는 곳, 우리의 오랜 병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치유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 그 자체로, 당신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에너지로 환자들을 치유시킴을 통해 그토록 은혜롭고 축복된 하느님 나라의 한 실상을 미리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적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섰던 불치병 환자들의 행렬들과 마주서셨습니다. 조금도 귀찮은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오랜 병고를 말끔히 치유시킴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한 인간이 더 이상 행복해할 수 없는 상태가 구원이 아닐까요? 그 상태는 아마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구원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 품 안에 머무는 것, 그분 큰 사랑 안에 푹 잠기는 것,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태초에 지녔던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회복하는 것, 원래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치유입니다. 영혼의 치유, 육체의 치유, 상처의 치유, 죄의 치유, 감정의 치유...
그런데 우리가 지속적으로 치유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믿음, 하느님은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 하느님은 나를 치유하신다는 강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 둘의 태도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대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두 눈먼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향한 상당한 믿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불편함 정도야 쉽게 고쳐주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메시아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 자비를 힘입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목숨 부지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 그분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자신들이 오랜 병고를 떨치고 일어서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시원시원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동의하는 그들의 믿음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반드시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를 통해 육체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함께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그들의 확신을 한번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낫기를 원하느냐, 나와 내 능력을 믿느냐는 예수님에 대답에 두 눈먼 사람들처럼 사랑과 확신에 찬 응답이 필요합니다.
“예, 주님!”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당신은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가련한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임을 믿습니다.”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나와 동행하실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당신을 사랑 그 자체이심을 믿습니다.”
보고 듣게 만드는 기다림 -김현-
기다림은 눈과 귀를 밝게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알아볼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나는 애인을 기다리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창밖에 나타나면 목을 길게 빼겠지요. 출입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짤랑거릴 때마다 혹 그이가 아닐까 고개를 들어 얼굴을 찾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걸음소리만으로도 그가 왔음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이를 기다릴 때에는 시각, 청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이용합니다. 그만큼 집중합니다. 그러니 기다리는 사람은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그만큼 더 예민한 사람이 될 겁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계신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특성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오실 그분’,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은 그분’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분을 발견하기까지의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에 민감한 눈과 귀는 그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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