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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우리가 지체되지 하느님은 지체하지 않으신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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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6 05:40
- 우리가 지체되지 하느님은 지체하지 않으신다.
오늘 주님께선 우리의 기도를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하는 기도와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체하더라도 들어주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기도하는 즉시 들어주신 경험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들어주실 뿐 아니라 지체없이 들어주신다니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께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빨리해주고 싶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지체가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지체하시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둑으로 치면 장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인간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면 장고에 장고를 거듭합니다.
어떤 때는 수를 찾느라 이삼십 분 끙끙대고 그런데도 못 찾기도 하지만
인공 지능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수를 찾아내는 데 1초도 안 걸립니다.
이것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인가? 말 것인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그래서 미적거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체치 않으신다는 것은 미적거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거나 들어주셔도 지체하신다면
당신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이유 때문에 안 들어주시거나 지체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거나 우리 믿음이어야 하는데 우리 믿음이
그러하지 못함을 잘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들어주시거나 안 들어주시거나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들어주신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들어주지 않으실 이유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들어주심이 우리에게 더 사랑이기 때문에 안 들어주시는 거라고 믿는 겁니다.
우리도 자식이 안 좋은 것을 달라고 하면
예를 들어 지금 고도비만인데 먹을 달라고 하면 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청은 아예 안 들어주는데 그것이 사랑이고 더 사랑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더 잘 아시는데
그렇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거나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다면 응답이 지체되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때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 마음은 조급하여 당장 들어주시길 바라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중이 더 좋다는 것을 아시기에 지체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보통 새벽에 나타나십니다.
밤을 꼬박 지새우고 새벽에야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밤새 풍랑과 싸우던 제자들에게 새벽녘에 나타나시고,
부활하신 뒤 밤새 고기잡이 한 제자들에게도 새벽녘에 나타나셨지요.
기진맥진할 때를 기다리시고 갈망이 깊어지고 희망이 단단해질 때를,
그때를 기다리신 것이고 진정 그때까지 애타시며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큰 갈망이 없이 청하고 기다리고 그래서 희망이 단단하지 않으며
그래서 안 들어주신다고 쉽게 실망하고 더 나아가 절망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애타시며 기다리십니다.
빨리 갈망이 깊어지고 희망이 단단해지기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지체하니 그것 때문에 우리보다 더 애타 하십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 싶으면 지체없이 들어주십니다.
아시시로 돌아가면 당신 뜻을 알려주실 거라고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고 실제로 산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알려주셨습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이 말씀을 1205년에 프란치스코가 들었는데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기까지 3년여가 더 걸렸고,
그 후에도 그 깨달음이 계속되었던 것을 보면
완전한 깨달음까지는 프란치스코도 지체됐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미흡하여 지체되는 것이지
하느님의 판단 능력이나 사랑이 부족하여 미적거리거나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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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군대 제대 후에 신학교 복학 전에 사회 현장 체험을 하라는 성소국장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주유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 주유소에서 제일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경유와 휘발유를 구분해서 넣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승용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경유를 넣어야 하고, 또 어떤 RV차는 경유를 넣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휘발유라고 합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분에게 꼭 물어보았습니다. “경유 넣을까요? 휘발유 넣을까요?” 그러면 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면 몰라?”
운전면허증도 없었을 때였고, 차라고 하면 버스, 택시밖에 모를 때였으니 당연히 보면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고서도 모른다고, 주유소 직원이 왜 그러냐면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때의 일이 이렇게 떠올려지는 이유는 지금도 보고서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고 있습니까? 나의 무지가 하느님의 일을 잘못 이해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유소에서 일할 때는 스스로 모른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물어보아서 실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모르면서도 아는체하며 경유와 휘발유를 바꿔 넣었다면 차주의 소중한 차를 망가트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행동하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망가트리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매달리는 과부에 관한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귀찮도록 매달리는 과부의 청에 결국 올바른 판결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삶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 하느님의 창조를 깨뜨리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밖에 많은 이유를 들어 기도하지 않습니다. 정작 이렇게 기도하지 않음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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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이나 행복은 자신에게 충분히 준 다음 자연스럽게 남에게 흘러가는 것이에요(김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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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동반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2,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이미 제 마음 안에 와 계신 당신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늘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이 저의 희망이 되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늘 제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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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기의 기도가 들어 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느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더 많이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가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카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내린 결단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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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는 ‘에너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초기 인류는 자연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삶을 이어갔습니다. 태양, 불, 물 등의 자연 에너지를 통해 생존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런 원시 에너지 사용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였지만, 인류 발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에너지 사용이 업그레이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석탄과 석유의 대규모 사용은 인류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화석 연료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촉진했고, 이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환경 오염과 에너지 자원 고갈이라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등장한 핵에너지는 전력을 생산하는 강력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원자력의 위험성과 윤리적 고민을 동반했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 태양열, 풍력, 수력 등 재생 에너지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에너지를 바라보는 철학과 윤리적 태도를 재정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한테서 왔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빛은 에너지의 근원이자,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모든 에너지는 신이 창조한 세상의 일부로, 인간이 받은 선물이자 자원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에너지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라"라는 사명을 받고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에너지를 사용하는 데도 책임감과 절제, 지혜를 요구받습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는 청지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창조의 돌봄과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부유한 국가들이 과도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면, 빈곤한 국가들은 최소한의 에너지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배치되며, 에너지 자원도 이웃을 위한 나눔과 배려를 통해 관리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전합니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지구와 미래 세대를 위해 새 창조를 향한 책임 있는 준비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생태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는 사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종종 ‘불’로 상징되며, 이는 하느님의 능력과 힘을 의미합니다.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연관 지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능력이 창조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에너지를 관리하고 사용하는 방식은 신앙인으로서 창조의 청지기 역할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에너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에너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에너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많이 배웠던 율법 학자도,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던 사제도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아도, 제사를 지내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으면 강도당한 이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난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을 베풀면 향기가 만리를 간다고 합니다. 2024년의 달력도 이제 1장 남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남은 1장의 달력을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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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말씀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 안에 참 중요한 지위를 가집니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수많은 유혹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이 신앙의 길 위에서 수많은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낙심’이라는 유혹입니다. 처음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이런 ‘낙심’의 유혹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낙심’은 기도하며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에게 오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급으로 나누자면 ‘낙심’은 상급 유혹입니다. 상급이다 보니 그만큼 강력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이 ‘낙심’의 유혹에 빠지면 하느님을 쉽게 등질 수 있습니다.
‘낙심’의 유혹은 이런 때에 찾아옵니다. 기도 안에서 기쁨이 아닌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 하느님께로부터의 응답이 원하는 만큼 들리지 않을 때. 신앙의 길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낙심’의 유혹이 왔을 때 그것을 뚫고 나아갈 방법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안개는 태양이 뜨면 사라지기 마련이고 장대비도 시간이 지나면 그치기 마련입니다. 밤도 시간이 흐르면 낮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낙심’이라는 유혹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다만 기억하세요. 그때가 바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낙심’하는 우리 마음을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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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이야!
저는 한 달에 한 번 묭실(미용실)에 갑니다.
벌초(헤어 커트)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날도 묭실 의자에 앉아 벌초를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 한 부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늘 싸웠습니다. 싸울 때마다 이런 말로 시작하거나 끝맺었습니다.
너 때문이야!
이것도 너 때문이고, 저것도 너 때문이야!
늘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비방했습니다. 내 탓은 없고 모두 상대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을 밖으로 향하는 것은 쉽습니다.
안으로, 나에게 향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오.’가 참으로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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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히 항구히 기도합시다
<진리의 협력자>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112,1)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대(大) 젤투르다로 불리는 성녀는 1256년 1월6일 독일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 헬프타 시토회 수녀원 학교에 입학하여 15세 학교를 마치고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그는 성녀 멕틸다 수련장 밑에서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타고난 지능과 열망으로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등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는 1281년 1월27일 예수님 발현을 체험한후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 전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체험의 연속이었으며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습니다.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로 불리는 그는 예수성심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사도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13세기 독일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독일의 데레사’라 불려집니다.
1288년 제투르다는 합병증을 앓아 병상에 눕게 되며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그녀는 1302년 11월16일 향년 46세에 바로 오늘 선종합니다. 무려 병상 생활 14년후 그녀는 아름다운 임종어 “아! 신랑께서 오신다!” 부르짖으며 선종합니다. 그녀는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시성식을 거치진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아 공경을 받았으며, 167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성녀에게 ‘위대한(Great)’ 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대(大) 젤투르다 기념일을 제정하여 모든 교회가 성녀의 기념일을 지내도록 지시합니다.
11월은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입니다. 성녀는 연옥영혼들에 대해 항상 연민과 동정심을 느꼈으며 예수님이 발현하여 가르쳐준 기도를 매일미사후 바칠 것을 권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때 마다 1000명의 연옥영혼을 구해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에 있는 모든 죄인들과 온 세상 교회에 있는 죄인들과 내 집안과 가정 안에 있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 드는 모든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의 가장 값진 피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아멘.”
성녀 젤트루다는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야 말로 ‘진리의 협력자’입니다. 제1독서의 사도 요한이 가이오스에게 전하는 서간이 참 품위있고 아름답습니다. 얼마전 바오로가 필레몬에게 전한 서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가이오스의 환대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그를 ‘진리의 협력자’란 영예로운 칭호도 부여합니다
“나는 그대를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마디, ‘진리의 협력자’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주교가 되었을 때 사목표어이기도 했습니다. 교황님이 살아 계실 때 감동적인 인터뷰 기사를 나눕니다.
“교황님의 묘비에 무엇이 새겨지기를 바랍니까?”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주교가 되었을 때 진리의 협력자란 사목표어는 어떻게 지었나요?“
-진리의 협력자라는 말은 요한의 셋째 서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감동하여 더욱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진리에 봉사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며, 그 진리를 위해 협력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임 베네딕도 교황에 대한 존경과 사랑, 신뢰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두분의 아름답고 품격있는 우정도 감동적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마음을 지키면 보존되고, 놓으면 사라진다. 때없이 들고 나기에 그 거처도 알 수 없다.”<맹자>
마음을 지키는 첩경의 지름길은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자신을 “진리의 연인”이라 불렀습니다. 참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순교에 까지 이르게 되고, 저절로 진리의 협력자가 되며 기도 역시 간절하고 항구할 수 뿐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를 들려줍니다. 고집불통의 완고한 재판관도 지칠줄 모르고 물러설줄 모르는 과부의 목숨을 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에 항복합니다. 진리의 협력자가 되려면 이정도의 영적탄력 좋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워하여 진리의 협력자가 되려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는 믿음이 정말 절대적입니다.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도 있듯이 기도하다 죽을 지언정 결코 기도를 포기해선 안됩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다보면 기도도 정화되어 ‘원하는 것에서 필요한 것으로’ 올바른 판결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고 날로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닮아 주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며 저절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세월흘러 나이들어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은, 신망애(信望愛)의 탄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뿐이요 이래야 평생 진리의 협력자로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적탄력을 날로 좋게 하시어 당신 진리의 협력자로 충실히 살아가게 하십니다.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시편11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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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올바른 판결을 내리소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8)
의로우신 하느님
제가 의롭다면
더욱 의롭게 하시고
제가 불의하다면
가차 없이 내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의로우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깨끗하신 하느님
제가 깨끗하다면
더욱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더럽다면
가차 없이 쓸어내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깨끗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제가 자비롭다면
더욱 자비롭게 하시고
제가 매몰차다면
가차 없이 물리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비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온유하신 하느님
제가 온유하다면
더욱 온유하게 하시고
제가 거칠다면
가차 없이 꺾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온유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살리시는 하느님
제가 살린다면
제가 더욱 살리게 하시고
제가 죽인다면
가차 없이 저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살리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함께하시는 하느님
제가 예 하며 따른다면
더욱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제가 아니오 하고 거부한다면
가차 없이 저를 팽개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함께 하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당신처럼 되라 하시는 하느님
제가 당신을 닮는다면
더욱 믿고 바라고 사랑해주시고
제가 당신을 지운다면
가차 없이 저를 버리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모든 것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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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2024.11.16 08:2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우리가 원할 때 그것을 바로 이루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데에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더 좋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과부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결코 좋지 않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꾸기를 원하셔서
지금 당장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것을 언젠가는 이루어 주실 것인데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이
힘들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해야 한다는 뜻으로
루카복음에서 전에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한밤중에 빵을 꾸는 친구에게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과 오늘 말씀의 차이가 있다면
오늘의 상황은 기도라는 점입니다.
즉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고 받는 그 순간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받기 전에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것을 받고 나서도 열심히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를 위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것을
담보로 잡으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기도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시는 것을 담보로 잡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그 관계 안에 머물 때
순간 순간 마주하는 어려움을
우리는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씀드린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하기도 합니다.
버티기 힘든 상황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려는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품고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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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8)
흔히 우리가 자주 쓰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는 속담은 요즘에는 주로 연애와 결혼 혹 사업과 취업의 관점에서 많이 적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라는 속담은 십벌지목十伐之木이라는 중국의 한자 성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속담은 <계속 인내심을 갖고 하다 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혹은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뜻을 이룰 수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속담을 오늘 복음에 견주어 봐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18,2) 조금은 거만한 재판관도 올바른 판결를 내려 달라고 찾아와서 자신을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의 끈기와 인내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올바른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재판관이 판결을 차일피일 미룬 것은 다른 쪽의 사람에게서 어떤 향응이나 물질적 금품을 수수했는지 아니면, 받지 아니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밤낮으로 졸라대는 그 과부의 집요한 간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과부는 어떤 누구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다만 자신의 온몸과 마음을 던져 끈질기게 매달린 것은 그 재판관의 올바른 판결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있었던 겁니다. 마치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뚫고, 부드럽게 흐르는 물이 모난 돌을 깎아 둥글게 만드는 것처럼 영적인 일, 기도도 역시 그렇게 집요하고 끈질기게 인내심을 갖고 간절히 하느님께 간청한다면 들어 허락받지 못할 기도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과부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기도란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과 아쉬움을 하늘에 호소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살을 깎듯이 처절하고 절절한 몸과 마음으로 하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스스로 한 방물의 물이 되어 전혀 마음이나 생각을 바꾸려고 들지 않은 무심하고 냉정한 재판관의 마음을 끈기 있게 매달려 애원하고 간청함으로써 자기 뜻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지는 않지만, 기도하는 영혼도 이 과부와 같은 심정으로 하느님께 집요하고 항구하게 매달려 간청할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어찌 마음을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지성이며 감천이라는 표현도 오늘 복음에 썩 잘 어울리는 속담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는 뜻으로 무슨 일에든 정성을 다하면 어려운 일도 순조롭게 풀리어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말이고 흔히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다 하늘에 가서, 하느님의 마음에 닿아 하느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늘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기도가 하늘에 닿고 하늘의 응답을 듣기 마련입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아니 베풀어 주실 것을 베푸시는 게임을 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믿음으로 눈물 흘리며 간절하게 끈질기게 애원하는 사람의 간청에는 마음을 움직이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10번에 걸친 아브라함의 요구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거두시었고, 이집트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로 울부짖는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던 하느님은 분명 지성이면 감천이다, 는 속담처럼 하느님 마음을 움직이시고 뜻을 바꿔 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전 광주로 소임지가 바뀌면서, 광주 일곡동 수도원에서 새롭게 시작한 사도직이 바로 토요 묵주기도회입니다. 이젠 제 자리를 잡아 많은 분이 매주 토요일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 기도회에 꾸준히 참석해서 봉사하는 자매는 물론 많은 분이 기도의 능력과 기도의 은총을 충분히 체험하고 있다고 체험담을 제게 들려줍니다. 함께 기도했을 때, 저의 기도를 필요한 분들의 지향을 성모님께 바치는 제 마음은 마치 야뽁강에서 하느님과 씨름했던 야곱의 심정과도 같았습니다. (창32,24~25) 그 씨름은 단지 그 자신의 운명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친 절체절명의 씨름이었고, 이 씨름에서 야곱은 비록 환도뼈를 다치는 고통과 아픔을 감수해야 했지만 끈질기게 집요하게 하느님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간청한 덕분에 그가 원하던 축복을 받게 되었잖아요. 물론 그는 도중에 포기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이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기에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심정으로 기도하다 보면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고, 이런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저의 기도를 통해서 제게 기도를 부탁한 분들의 기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설사 그 청함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청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을 바꾸어 나가면서 오히려 마음을 비워, 그 비워진 마음에 하늘을 품고,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다면 그런 제 마음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제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주님, 당신 뜻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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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기도는 모두에게 유익인 될 공동선으로 /
박윤식 [big-llight] 241115. 21:02 ㅣNo.177639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드시면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이렇게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어쩌면 우리는 죽기 살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저 과부마냥 끝까지 저리 그 재판관에게 괴롭힐 정도로 기도하는지? 사실 그 재판관은 누가보아도 불의한 자다. 그렇지만 그 과부의 요구는, 그야말로 절실하다. 그리하여 그 과부의 간청이 재판관의 마음을 되돌린다.
소원 빈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어떤 행위이다. 자신이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조차도 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절대자에게 절실히 소원을 빌 때가 있단다.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신다. 이렇게 그분은 끊임없는 끈기를 요구하신다. 꾸준히 드린다면 하느님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정말 큰 용기를 준다.
기도는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힘을 끌어 주시는 거다. 그러려면 먼저 차분한 마음이어야 한다. 아무리 할 일 많고 감정이 복잡하더라도 그걸 제쳐 둘 수 있어야만 할 게다. 어쩌면 그 불의한 재판관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만한 인물이었지만, 그러한 그도 죽기 살기를 각오한 과부의 청원에는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도 기도한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를 돌아보자. 예수님께서도 그 과부처럼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단다.
당시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시비를 법정에서 가리지 않고 원로들에게 가 중재를 부탁했다. 그러다가 어떤 쟁의를 재판에 넘기면, 담당 재판관은 로마 총독이 임명했다. 그들은 뇌물에 눈이 멀어 공정을 기대하기는 쾌나 어려웠다나. 한편 과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그러니 공정한 판결을 기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 힘은 바로 끈질김이었으리라.
사실 우리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잊고 지내다가 어려운 일에는 하느님께 매달린다. 곤경에 처할 때에 기도하는 게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만 기도한다면, 너무 이기적이다. 늘 기도하는 이야말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복된 이일 게다. 이처럼 재판관은 불의하고 탐욕스러운데도 그 끈질김에 못 견디어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야 의당 꼭 들어주시리라.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신뢰하며 끝까지 청하는 거다. 그것만이 인간 마음을 넘어 하느님마저 돌려놓을 게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기도의 내용이다. 기도는 먼저 하느님 찬미로 시작해야 한다. 이어 공동체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기도하자. 그 뒤 바라는 바를 진솔하게 청하자. 우리가 이처럼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자기 직분에 부합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 뜻에 걸맞게 진솔하게 기도드리자.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는지를 되돌아보아야만 할게다. 오로지 나 자신만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닌지. 나아가 나에게 다소간 득이 될 것이라 여겨지더라도, 어쩌면 결국은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것이 아닌지도. 이처럼 기도는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공동선을 찾아 청해야만 될게다. 이리하여 기도는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속 좁아서는 결단코 안 될게다. 우리가 간청하는 기도내용이 하느님 뜻인지를 늘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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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청원 기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모두 다 이루어진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의 청원이 올바르지 않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첫 번째로 그 청한 것이 올바른지 살펴보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끈질긴 과부의 비유는 바로 기도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 “올바른 판결”을 요구합니다.
한 번의 요구로 그치지 않고, 거듭하여 요구합니다.
과부는 올바른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갈 것이고, 재판관은 마침내 과부의 요구를 들어줄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것을 청할 줄 아는 지혜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인내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청원 기도에 대하여 조금 더 깊게 묵상해 보면, 끈질기게 요구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보다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원하는 쪽은 언제나 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끈기 있고 한결같이 청하지 못합니다.
정작 성실하고 한결같이 청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한결같이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닮아 가며, 주님께서 우리의 청원에 빠르게 응답하시듯 우리도 그분 청원에 재빠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청원을 기억하여 청원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일치의 기도가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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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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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때로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그렇게 어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 마디 그대로,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묵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적당하게가 아니라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처럼 하느님이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무 괴롭고 귀찮아서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뉘앙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기도 지향, 미사 지향의 대부분은 가화만사성, 명문대 합격, 좋은 직장 취직,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승승장구, 무병장수... 등등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계와 결핍 투성이인 한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 든든했던 그,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으로 확신했던 그가 점점 약해지고 작아집니다.
결국 나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갑니다.
유일한 희망이요 미래라고 여겼던 자녀가 갈팡질팡 흔들립니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내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바치는 기도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휘황찬란한 대상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네 인생도 한 순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로장생,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핍과 모순 투성이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신앙 여정의 충실한 동반자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나를 인도하게 계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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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과부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가난한 과부의 끈질김이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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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계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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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하느님 뜻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1-8)”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가르침은, “세속에서는 끈질기게 졸라야만 마지못해 들어 주는 일이 많은데,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고,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8).
이 말씀에서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고, 주신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기도’는, 내가 원하는 그것을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잘 받을 준비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그것’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내가 싫어할 수도 있고, 그래서 조금도 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들이 ‘기도의 어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와 성모님의 응답은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2) 기도를 할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느끼거나, 하느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면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그 뜻이 내 뜻과 다르다고 해도 순종하면 되는데, 아예 그 뜻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나는 내가 올바른 것을 청하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즉 내 기도의 지향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는데,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는 내 기도의 지향이 올바른지, 잘못된 것인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기도하고,
내 기도의 지향이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우니까 기도합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5-27).”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도 ‘기도’입니다.
3) “하느님은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이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그것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응답이 없거나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만, 또는 자기 편 사람들만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또 우주 전체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에서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바로 ‘나에게(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이고,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때입니다.
그 ‘때’는, ‘지금’일 수도 있고, ‘조금 뒤’일 수도 있고, ‘먼 훗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를 모릅니다.
모르니까 기도하면서 잘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1절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기도하고 있다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다 보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시간을 깨달아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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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8,1-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거의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 점은 천주교도 마찬가지지요. 하느님과 영적으로 나누는 대화인 기도를 자주 바쳐 그분과 사랑으로 깊은 친교를 맺으라고 권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꾸준히 바친다는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는데 나 혼자만 열심히 떠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 내가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나도 그분으로부터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는데 대체 내가 얻는 게 뭔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청하는데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고 원하는게 이루어지지도 않으면 지치고 싫증이 나서 다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래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지는 그 때가 바로 우리에게 하느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기울어져있던 마음이 그분의 침묵에 대한 반발심으로 튕겨져나오기 직전인 그 때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의 응답이 자기가 바라는대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이 기도한 내용에 대해 즉시 응답받지 못하면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거나,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분노하거나, 심지어 내 기도를 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다른 신’(?)을 찾아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기도는 내가 원하는 걸 원하는 때에 이뤄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기도의 참된 모범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호피 인디언 부족이 지내는 ‘기우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척박한 애리조나 사막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었는데, 그들은 땅에 씨를 뿌리고 나서 그 물을 얻기 위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몇 번 하다가 만 게 아니라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 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기우제를 ‘100%의 확률’로 원하는 걸 얻어내는 ‘성공한 기도’의 사례로 꼽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원하는 걸 얻어내는 성공률의 관점으로 인디언 기우제를 바라보는 건 잘못된 시각입니다. 그들의 기우제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가지지요. 첫째, 그들이 청한 것은 ‘비’였습니다. 일확천금이나 부귀영화처럼 세속적인게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세상에 내리는 비를 청한 겁니다. 이는 오늘 복음 속 비유에서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청한 것과도 일맥상통하지요. 그 과부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하지 않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대로, 나에게 이익이 되게 해달라고 떼를 쓸 게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갖은 ‘올바른’ 것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자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바라시는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청할 수 있어야 내 기도가 100% 바라는대로 이루어지는 ‘성공한 기도’가 되는 겁니다.
둘째, 그들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자기들이 바친 기도가 이루어져야 할 시간을 제멋대로 정하지 않고 그 주도권을 하느님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모든 일에 그 적당한 ‘때’를 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언제 들어주실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대로 따르겠다는 순명의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채고 재촉한다고 해서 빨리 들어주실 하느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모든 여건과 상황이 갖추어져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무르익은 그 때에 들어주십니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인이 지녀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지닌 이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종말의 때에 ‘구원’이라는 올바른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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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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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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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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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6.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경건의 능력을 갖춘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
<2024.11.16> 아침을 여는 묵상 (딤후 3:1~9절)
❝경건의 능력을 갖춘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형식화된 신앙에서 벗어나 경건의 능력을 갖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사역자로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 고통의 환경이 따름을 인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절).
바울은 말세를 고통의 때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끊임없는 환난과 고난을 겪게 됨을 말해줍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인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고통’은 ‘견디기 힘든, 험한, 격렬하다’는 뜻으로, 배를 삼킬 듯이 몰아치는 폭풍과 같은 위기 상황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역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의 때를 잘 분별하여 인생의 위기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사탄의 교묘한 술책에 빠져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현실이 주는 고통의 순간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어쩌면 사역자로서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으로 인식하여 지혜롭게 시대를 이기는 사역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그릇된 신앙의 형식을 벗어나는 삶이어야 합니다(2~5절).
바울은 말세의 징조와 특징에 관해 설명해 줍니다. 먼저 자기 사랑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하며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부모를 거역합니다.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도 아니합니다. 무정해지고 짐승처럼 사나워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2~4절). 그리고 나서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5절)한다라고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행위들을 말합니다. 신앙적인 행위들은 많지만 정작 내적인 성숙이나 인격의 변화나 성령의 열매등은 전혀 없고, 그 어떤 영적인 변화도 없는 지극히 형식화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b절)고 당부합니다.
사역자로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살아가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사람들과 세상의 문화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되 경건의 모양만 갖춘 그들의 삶에 영향을 받지 말고, 그들을 철저히 경계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극히 형식화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경건의 모양만 그럴싸하게 갖춘 삯군 목자가 아닌 경건의 능력을 행하는 선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분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6~9절).
바울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남의 집에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항상 새로운 말씀을 배우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7절,쉬운성경).. 어리석은 여자들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모든 면에서 불안정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항상 배우기는 하지만, 구원에 이르는 참 진리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는 애굽의 마술사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신기한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믿음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자들입니다(8절). 결국 그들의 거짓되고, 어리석음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고 말 것(9절)입니다.
신앙적 경험과 성경적 지식이 풍부하다고 교만하거나 우월감에 빠져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는 일에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행동이 경건의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이라면 이는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함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살아가는 거짓된 교사들의 실체는 분명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고, 오직 선을 행하며,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신앙의 열매를 맺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거짓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며, 경건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경건의 모양만 그럴싸하게 갖춘 속이는 사역자가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갖춘 진실한 사역자로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말씀의 사람답게 주를 경외하는 사람답게 고통의 때를 이기는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딤후 3: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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