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사우란 붓‧벼루‧먹‧종이를 말하는 것으로 선비들에게는 분신과 다름없이 친근한 존재였다. 오죽
하면 벗[友]이라고 불렀겠는가. 문방사우 외에 서가‧책상‧문갑‧필통‧필가(붓걸이)‧필세(먹이 묻은 붓
을 빠는 그릇)‧묵상(먹을 올려놓는 받침)‧서진(종이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눌러두는 도구)‧지통‧
연상(여러 문구를 벌여두는 작은 책상)‧연병(먹물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벼루 머리에 치는 작은 병
풍)‧연적‧서판(글씨를 쓸 때 먹이 번지지 않도록 종이 밑에 받치는 두터운 종이) 등도 선비들이 아끼
는 기물이었다.
문방사우 가운데서도 선비들이 가장 아끼는 붓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1
988년 경남 창원의 다호리 고분군에서 다섯 자루의 붓이 출토되면서 학설이 바뀌었다. 이 붓은 2000
년이 넘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때 한반도 남부지역은 중국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입
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자가 유입
되기 전에 이미 붓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니,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에 별도의 글자가 존
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종이는 풍화되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조선 선비들의 붓에 대한 애착은 유별났다. 기호도 까다로웠다. 붓은 사덕이라 하여 첨‧제‧원‧건의 조
건을 갖춰야 했다. 첨은 끝이 뾰족할 것, 제는 붓이 펴졌을 때 모양이 가지런할 것, 원은 털 윗부분이
꽉 차고 잘 매여서 모양이 둥그스름할 것, 건은 털이 탄성이 있어서 획을 긋고 난 뒤 모양이 제대로
세워질 것 등을 이른다. 붓을 만들 때는 양‧토끼‧노루‧족제비‧살쾡이‧이리‧범 등의 털, 쥐의 턱수염, 돼
지 갈기, 꿩의 꼬리 등을 사용했다. 한 종의 털을 가운데 심고 다른 털을 위에 입혀 만들기도 했다. 선
비들이 최고로 친 붓은 단연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필(또는 황모필, 황서필)이라는 붓이었다.
선초의 최고 명필은 안평대군(1413~1453)이었는데, 그가 백추지에 황필로 쓴 글씨는 오직 한석봉(15
43~1605)만이 그 깊은 뜻을 알아봤다고 할 정도로 신묘했다. 고려 때부터 만들어 쓰기 시작한 황필
은 ‘가늘기는 화살대 같고 털의 길이는 1寸 남짓하며, 붓끝은 뾰족하면서도 둥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필이 인기를 끌어 비싼 값에 팔리자 모조품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정조실록』에는 ‘왕실에 바치
는 황필에 속임수가 있을까 하여 다섯 자루를 풀어 검사해보았더니, 그 중 한 자루는 중간에 나쁜 털
을 끼워 묶은 것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황필은 중국인들도 매우 귀하게 여겨 고가에 거래되었다. 정조 14년(1790) 청나라 황제 생일
축하사절로 다녀온 사은부사 서호수의 문집에는 ‘생일선물로 황필 30자루를 황제에게 바쳤다’는 기
록도 있다.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뼈에 사무친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외국의 진기한 물건
이라 반겼을 뿐 실제 애용하지는 않았다’며 국산인 황필을 폄하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물건이 청
나라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황필은 억세고 뻣뻣하여 제멋대로 날
뛰는 철없는 아이와 같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종이는 생산량이 매우 적어서 요즈음 가치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가에 거래되었다. 선비
들 사이에서도 종이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오죽하면 실록 편찬을 마친 사초를 태워버리지 않고 세
초(洗草)하여 재사용했겠는가. 종이 가운데서는 눈에 묻어서 표백시킨 설화지(雪花紙)가 가장 고급
이었고 값도 가장 비쌌다. 주로 궁중에서 사용했다. 판소리 <흥부가>에도 흥부가 탄 박 속에서 ‘설화
지로 묶은 불사약’ 얘기가 나온다. 판소리 <수궁가>에서 별주부가 토끼의 화상을 그린 종이 역시 설
화지였다. 여말(麗末) 문신 이규보의 시에도 설화지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설화지는 고려시대에도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얇지만 질긴 죽청지(竹淸紙)는 왕비‧세자‧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교명(敎命)을 적는 종이로 사용되었
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어진(御眞)도 죽청지에 콩죽을 여러 번 올려 말린 기름종이에다 그렸
다. 조선시대에는 그 밖에도 궁전지‧능화지‧백면지‧상소지‧상화지‧선익지‧시전지‧초도지‧화문지 등 용
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시전지(詩箋紙)는 선비들이나 부녀자들이 시나 편지를
쓰는 데 가장 많이 사용했다. 시전지는 화려한 문양이나 색상을 입혀 사용했는데, 부녀자들은 사군
자‧연꽃‧길상무늬‧새 등의 문양을 가장 선호했다.
먹 가운데서는 송연먹을 으뜸으로 꼽았다. 고려 초기에 개발된 것으로 전해오는 송연먹은 소나무를
태워 만든 그을음에 사슴가죽을 고아 만든 아교를 섞어 제조했다. 금속활자가 발명된 뒤부터는 그을
음을 기름에 섞은 유연먹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연먹 가운데는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되는 유
매먹을 최고로 쳤다. 그을음을 참기름에 섞은 먹이다. 글을 많이 쓰는 선비는 한가할 때 먹물을 많이
만들어 묵호(墨壺)에 담아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썼다. 묵호는 붓‧종이 등과 함께 선비가 출타할 때
반드시 지니고 떠나는 필수품이기도 했다.
벼루는 백제와 신라의 고분에서도 다량 출토될 정도로 연원이 길고 널리 사용되었다. 벼루의 종류는
흙을 구워 만든 토연을 시작으로 흙으로 빚어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陶硯), 돌로 깎아 만든 석연, 쇠
로 만든 철연, 옥돌로 만든 옥연, 단단한 나무로 만든 목연, 상아연, 동물 뼈로 만든 골연, 점토를 고
온에 구워 만든 전연, 찰흙을 기와처럼 구워 만든 와연, 고운 흙을 구워 만든 니연 등이 있었다. 나무
줄기의 한가운데 연한 부분에 옻칠을 한 목심칠연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연
이 선비들로부터 가장 각광을 받았다.
조선 말기에는 충청도 보령에서 생산되는 오석연과 경상도 안동에서 생산되는 단계연이 가장 인기였
다. 오석연은 청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사신단의 주요 물목에도 포함되었다. 역관 가운데는 오석연
밀거래로 떼돈을 번 자들도 있었다. 평안도 위원에서 생산되는 자석연도 인기가 높았다. 벼루와 이웃
사촌인 다양한 연적(硯滴)도 선비들의 애장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연적은 벼루에 먹을 갈기 위해 물
을 담아두는 자그마한 그릇이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수필은 청자연적’이
라고 한 바로 그 연적이다. 선비들 가운데는 수백 가지의 벼루와 연적을 수집하는 자들도 흔했다. 도
포 소매에 연적을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완상하는 자들도 있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낮동안의 날씨가 따뜻하여 묵진한 겨울옷을 벗고 나섰는데 저녁 친척 문병을 다녀온 귀가길은 무척 추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봄철 감기가 드나 봅니다. 이런 밤 동안 의 추위를 견디어 내며 화사한 꽃을 피우는 개나리, 벚꽃등이 아련히 이쁘기만 합니다. 순천, 광양, 여수,하동 의 봄을 찾아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 가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