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한양에는 세 군데 큰 상설장터가 있었다. 지금의 종각 근처인 운종가, 광장시장 일대인
배오개, 서소문동 일대인 소의문장터였다. 한양에서 제일가는 장사꾼들의 점방으로 전국 각지에서
온갖 진기한 물화들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관대(冠帶)‧의복‧신발‧식료품‧기타 생필품 등
저마다 필요한 물건을 사갔다. 그 사이사이를 건달과 소매치기와 거지들이 누비고 다니며 각자의 방
식대로 목숨을 이어갔다. 장터의 품은 그처럼 넉넉했다.
가장 규모가 크고 거래량도 많은 운종가의 상점은 시전이라 불렀으며, 조정에서 공랑(公廊)을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공랑세를 징수했다. 운종가에는 육의전이라고 하여 세종대로사거리
에서 종로 3가에 걸쳐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면포전‧면주전(綿紬廛)‧지전‧저포전(樗蒲廛)‧내어물
전‧청포전(靑布廛)이 있었다. 육의전은 전매특권과 국역부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명주‧비단‧
모시‧무명‧종이‧어물 등을 독점 판매하는 대신 조정에서 요청할 때는 필요한 양을 구해 납품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배오개와 소의문은 순수한 사설 장터였다. 이들 3대 시장 외에도 한양 전역에
는 소규모 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3대 시장과 별도로 서소문과 남대문 사이에는 칠패시장이 있었는데, 강경포구에서 집산되어 서해를
거쳐 한강을 올라온 각종 어물과 미곡 등을 거래했다. 칠패시장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1808년에 편
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순청동‧만리재‧돌모루까지 장터가 펼쳐졌다고 되어 있다. 나중에는 청
파‧용산‧서빙고‧마포까지를 칠패시장의 권역으로 꼽았다. 이때부터 농촌 인구가 한양으로 집중되어
칠패시장 권역에만 11만 6371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배오개라고 부르는 지역을 문자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관료들은 한사코 이현(梨峴)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종로구 인의동 광장시장 일대다. 조선 초기에는 숲이 무성하여 여우와 도깨비가 출
몰한다고 하여 도깨비고개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백성들이 고개 입구에 배나무를 많이 심
은 다음부터 배오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배오개시장은 동부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상품들이
1차적으로 집산되는 곳이었다. 동대문 밖에서 재배하는 각종 채소와 함경도에서 잡히는 각종 해산물
이 이곳을 거쳐 공급되는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경도잡지』에는 ‘소의문 장터는 가짜 물건을 파는 소굴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통(구리와 니켈
의 합금)을 은이라고 속이고 염소 뿔을 대모(玳瑁. 바다거북의 껍질)라고 우겼으며, 개가죽을 초피
(貂皮. 담비의 모피)라고 속여 팔아먹었다. 부모형제 간에 값을 흥정하는 것처럼 꾸며 어수룩한 백성
에게 비싸게 팔기도 했다. 소매치기도 많아 귀중품의 자루나 전대를 예리한 칼로 찢어 물건을 빼내갔
다. 소매치기를 잡으로 쫓아가다 보면 한패인 광주리장수가 ‘광주리 사려’ 하며 앞을 가로막아 놓치
기 일쑤였다. 시장이 성행하자 놀이와 재미도 사고팔기 시작했다. 그 중 전기수(傳奇叟)는 옛날 얘기
책을 구수하게 읽어주고 돈을 받는 예능인이었다.
남촌에는 돈 많은 시전상인들이 많이 몰려 살았고 북촌에는 가난하지만 의협심이 강한 선비들이 모
여 살았다. 그 영향으로 남촌에는 전통주를 잘 빚는 술집이 많았고 북촌에는 떡집이 많아 남주북병
(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오늘날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떡집이 많은 것은 남주북병의
전통 일부가 살아있는 것이다. 남촌의 술 가운데서는 장흥동과 회현동에서 빚어내는 명주를 제일로
쳤다. 빛깔이 곱고 맛도 뛰어난데다 뒤끝이 깨끗하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한양 전역에서 찾아오는
백성이 많았다. 불행히도 한일강제합방과 함께 왜놈들이 남촌을 차지하면서 전통주는커녕 본래의 거
주지 모습도 왜색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약국은 지금의 을지로입구 일대인 구리개에 밀집해 있었다. 당시에는 언덕길이 온통 진흙이라 비만
오면 몹시 질척거렸기 때문에 구리개라고 불렀다. 약재상이 그곳에 집중된 것은 조선 500년 동안 백
성들을 치료해주던 혜민서가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국 앞에는 만병회춘이니 신농유
업이니 하는 현수막을 내걸어 고객을 불러모았다. 『한양가』에는 구리개의 약국에서 팔던 수십 종
의 약 이름과 효능이 기록되어 있다. 『청구야담』에는 가짜 약 소동도 소개되어 있다.
약국에서 약을 파는 사람을 봉사(奉事)라고 불렀다. 봉사는 원래 관상감‧전옥서‧사역원 등에서 근무
하는 종팔품 관직명이었다. 약을 파는 사람 가운데 장님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장님을 높여서 봉
사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애꾸눈이‧귀머거리‧벙어리‧언청이‧곰배팔이‧앉은뱅이‧절름
발이‧곱사등이 등 장애인들을 멸시했는데, 유독 눈먼 사람은 ‘님’ 자를 붙여 장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약을 파는 장님을 봉사라는 관직명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장님을
한층 더 높여서 상굿도 종사품 관직인 소경(小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유한 고관대작들은 집
에 약방을 차려 필요한 약제를 구비해두고 사용하기도 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병헌
과 김태리가 연애편지를 교환하던 약방은 김태리네 가문의 사설 약방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장터와 시장과는 그 정감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시골장터 의 시끌벅적한 호객이 그렇고 갖다 내놓은 파는 물건 의 옛스러움이 그러 합니다. 장날 찾아 가까운 수도권 근교를 찾아 보는것도 솔솔한 재미 입니다. 모란 5일장도 그나마 도심에서 볼수 있는 옛 장터의 풍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