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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을 현실화하다
제 1 차대전 솜전투에서 처음 실전 등장한 전차는 이후 전장에서 전선의 주역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대전차무기의 발달때문에 전차무용론과 같은 극단적인 일부주장까지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지상의 왕자라는데 대체로 이견은 없습니다.
[ 솜전투에 등장한 최초의 전차 ( 1916 년 )]
전차를 처음으로 실전 투입하고 리델 하트 Liddell Hart 나 존 퓰러 John Fuller 처럼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기갑부대의 집중 운용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제기 하였던 나라는 영국이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실전에서 응용하여 빛을 발한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보통 제 2 차대전 당시 독일군 하면 무적의 기갑부대를 연상 할 정도로 세계인에게 각인을 시켰고, 현재도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을 독일전차군단이라고 부를 만큼 독일의 기갑부대 운용은 그 역사를 선도 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 하인츠 구데리안 ]
밀리터리에 대해 잘 아시지 못하는 분들은 독일기갑부대 하면 아마 롬멜 Rommel 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물론 롬멜 또한 기갑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던 장군이기는 하였지만, 독일 기갑부대의 창설과 전술을 체계적으로 세웠던 사람은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Guderian ( 1888 ~ 1954 ) 장군이었습니다. 그를 독일 아니 세계 기갑부대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지략가였습니다.
제 1 차대전의 참호전을 경험하였던 구데리안은 전쟁의 승리는 신속하고 지속 가능한 기동력을 확보한 선봉대가 전선을 급속히 돌파하여 적 배후에 위치한 전략거점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위해서 집단화된 충격군 Shockwave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독일 기갑부대의 후기 모습 - 기록화 Harmon ]
바로 독일군의 트레이드마크인 전격전의 주역인 기갑부대의 필요성을 리델 하트나 존 퓰러의 저서에서 찾아낸 구데리안은 기갑부대야 말로 장차전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차의 개발과 기갑부대의 전략에 대해 연구를 하였습니다.
[ 히틀러에게 감명을 준 뉘른베르그 시범훈련 ( 1937 년 ) ]
구데리안이 열과 성을 다하여 창설한 독일기갑부대는 1937 년 뉘른베르그에서 히틀러의 참관 하에 시범훈련을 보여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는 실전에 투입 할 전차의 개발이 완료 되지 않은 관계로 차량에 캔버스를 언저놓아 전차의 시늉을 낸 어설픈 것이었지만 히틀러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 주게 되었고, 1939 년 대 폴란드 개전 시 구데리안이 이끄는 기갑부대는 선봉부대가 되어 작전을 완수합니다.
[ 프랑스를 석권하는 독일 기갑부대 ( 1940 년 ) ]
후속 보병부대가 진격속도를 맞추지 못해 전차부대가 고립되는 등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실전에서 선보인 집단화된 기갑부대는 그 효용성이 높은 것으로 판정 되었고 그 꽃이 피게 된 것은 대 프랑스 전선의 신화였습니다. 제 1 차대전 때 참호를 넘지 못해 수 많은 병사의 무덤이 되었던 서부전선을 불과 한달만에 돌파하여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무적 독일 기갑부대의 명성을 온 세계에 떨치기 시작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Achtung Panzer !
하인츠 빌헬름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의 이름에 von 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아마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독일제국 장교의 아들로 1888년 6월 17일 현재의 폴란드 영토인 西프로이센의 쿨름 Kulm에서 태어났습니다.
[ 최근의 쿨름모습입니다. 전형적인 중북부유럽의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
가정적인 영향인지 개인적인 신념 때문인지는 모르나 구데리안은 13세인 1901년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1907년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군무에 몸을 담은 곳은 제 10 하노버 저격병 대대였는데 공교롭게도 대대장이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 제 1 차대전 참전은 구데리안에게 많은 경험을 쌓게 합니다 ]
제 1 차대전 때는 참모부대와 통신부대에서 참전을 하였는데, 이 당시 戰場에 있어 통신의 중요성을 절감하였고 이러한 그의 경험은 이후 독일의 전차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유능한 직업 군인이었던 그는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 독일군이 10만명으로 제한되는 과정 중에서도 계속 남아 군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하였는데 (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 보면 심한 질투심을 느낍니다 -.- ) 이 당시 앞전에 설명한 영국의 퓰러 J.F.C. Fuller 와 하트 B.H. Liddell Hart 의 저서를 탐독하게 되었고 대규모 기갑부대의 창설을 역설하였던 또 하나의 위인인 프랑스의 드골 Charles de Gaulle 의 논문을 섭렵하였습니다.
[ 퓰러 ( 좌 ) 와 기갑사단장 시절의 드골 ]
그는 이들의 저작에 감명을 받아 이를 독일에 응용하고자 이론 정립과 연구에 힘써 1937년 기갑부대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돌격 기갑부대 Achtung Panzer 라는 기념비적 저작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저작물의 기본 핵심은 앞의 글에 설명한 것처럼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신속하고 지속 가능한 기동력을 확보한 선봉대가 전선을 급속히 돌파하여 적 배후에 위치한 전략거점을 제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병을 지원하는 분산된 기갑부대가 아닌 집단화된 충격군 Shockwave 형태의 대규모 기갑부대가 필요하며 때문에 전차 및 화력을 지원 할 자주화된 포병 그리고 이와 함께 일선을 돌파 할 차량화 된 보병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 공중포대 역할을 담당할 공군이 더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 오스트리아 합병 시 히틀러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
이러한 그의 이론은 제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략을 대변하는 전격전 Blitzkrieg 으로 정립하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유효한 전술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는 앞서 설명한 이론가들과는 달리 이론을 정립하면서 1934년 차량화보병부대의 참모로 취임과 동시에 이를 기갑부대로 개편하는 직접 실제부대에 적용하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창설한 두개의 전차사단을 지휘하였는데 그 당시 그의 계급은 불과 중령이었습니다.
[ 파리의 OKH 지휘부 - 그러나 처음부터 전격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
이런 그의 노력은 비록 실전은 아니지만 1938 년 오스트리아 합병 시 신속히 부대를 전개 시킴으로써 히틀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이론은 오히려 고루한 전통을 고수하려는 독일군부자체 내에서 수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참모총장 할더 Franz Halder 는 구데리안에게 " 장차전의 주역은 역시 보병 " 임을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 기갑부대는 보병의 보조전력 이어야한다 " 고 주장하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참호를 뛰어 넘다
그러나 할더를 비롯한 독일 지휘부가 이렇게 주장하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신무기의 개발이 늦었던 독일은 1930년대만 하여도 사실 제대로 된 전차가 없었습니다. 1937년에 있었던 뉘른베르그 시범훈련 때 차량에 캔버스를 덧씌워 훈련을 하였을 정도였으니까요.
[ 위의 빈약한 전차들이 전격전의 주역이 됩니다 ]
우리가 흔히 독일기갑부대를 하면 떠올리는 5호전차 팬더, 6호전차 타이거, 킹타이거는 전쟁후반기에 출현한 전차들로 전격전의 주역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초기 독일의 전차는 제대로 개발도 되지 않았고 주변국 ( 특히, 프랑스 ) 의 전차와 비교한다면 1 : 1 로 맞서기도 민망한 수준의 오늘날 보병수송차량 ( APC ) 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물건이었습니다.
[ 독일 전차보다 고성능의 프랑스 Somua 重전차 ]
때문에 할더와 같은 지휘부는 이런 미약한 기갑부대를 한곳으로 몰아 운용한다면 적에게 아군의 모든 전력을 한꺼번에 노출시키게 되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기갑부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본격적인 제 2 차대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 때 구데리안은 심혈을 기울여 창설한 제 19장갑군단을 이끌고 참전을 하여 이론으로만 정립되었던 그의 계획을 실전에 적용하여 보았습니다. 결과는 기갑부대의 단독적인 돌파로 전차부대가 고립되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후속하여 돌파구를 확대할 보병부대가 쫓아오지 못할 정도의 쾌속진군을 선보여 승리의 주역으로 집단화된 기갑부대의 능력을 과시하게 되었습니다.
[ 對 폴란드전을 통하여 실전에 적용됩니다 ]
그러나 이러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독일 육군 지휘부 OKH 는 아직까지도 공격의 주역으로 집단화된 기갑부대를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대프랑스전을 앞둔 OKH 는 주공의 선정과 공격로의 선택을 놓고 갑론을박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만슈타인 Manstein 이 제안한 낫질작전을 히틀러가 전격 수용함으로써 대규모 기갑부대가 돌파를 담당하는 작전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對 프랑스전에서는 신화가 됩니다 ]
낫질작전에 따라 기갑부대는 자연스럽게 공격의 선봉에 설수 있었고 구데리안은 작전의 선봉장으로써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제 19장갑군단뿐만 아니라 좌우에서 함께 병진 할 호트 Hoth 의 제 15군단, 라인하르트 Reinhardt 의 제 41군단 및 이들을 통합 지휘한 기갑집단 사령관 클라이스트 Kleist 또한 구데리안 못지않은 기동전의 대가들이었습니다.
[ 전선을 돌파하는 3호전차 하지만 이 놈도 만족 할 만한 성능은 아니었습니다]
결과는 제 1차대전 당시 참호를 뛰어넘지 못해 수백만이 숨져간 대 프랑스전선을 불과 한달만에 마무리 지은, 전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승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돌격 속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를 소개하겠습니다.
선봉 구데리안의 진격이 얼마나 빠른지 클라이스트가 후속부대와 연결을 위해 진격속도를 조정하라고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론을 확신한 구데리안은 명령을 무시하고 더욱 속도를 내어 적의 종심을 향해 돌진하여 들어갔고, 후에 즉시 복직이 되기는 하였지만 항명에 분노한 클라이스트가 구데리안을 면직시켜 버렸을 정도였습니다. ( 계속 )[ august 의 軍史世界 ]
너무 넓은 러시아평원
對 프랑스전선의 신화는 1호, 2호 전차처럼 장난감같은 전차라 하더라도 대규모로 집단화하여 급속 돌파하는 것이 각개 분산된 둔중한 중전차로 전투에 임하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의 전술은 트레이드마크처럼 세계에 각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실험적인 1호, 2호 전차와 본격적인 전차로 등장한 일부의 3호, 4호 전차로 전격전의 신화를 이루었지만 여기에 안주하려던 독일이 그들의 한계를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 독소전 초기 돌파의 주역 ]
1941년 6월 전격전의 신화가 광대한 소련 영토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갑부대를 선봉에 내세운 독일군은 소련의 방위선을 돌파하여 광활한 소련 국토를 가로질러 모스크바로 질주하여 나가게 되었고 작전개시 한 달 만에 100 만 여명의 소련군을 생포하는 눈부신 전과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독일군 기갑부대의 신화였습니다.
[ 서부전선의 신화가 재현 되는 듯 하였습니다 ]
인류 최대의 전쟁이었던 독소전에 대해 분석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독일이 전쟁 초기 2,000 Km 를 쾌속 진군하였고 소련에 비해서 더 많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결국 패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쟁은 현재도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때까지도 장비의 업그레이드는 미미하였습니다 ]
그중 하나가 모스크바라는 전략적 목표를 향해서 신속히 진격하여야 함에도 키에프 대회전처럼 굳이 병력을 돌려 공격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었냐 하는 점도 많이 거론 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august 는 독일이 키에프 등에서 딴지를 걸었던 것이 전체 독소전 판도를 좌우 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august 가 생각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물론 정답은 절대 아닙니다 ) 그것은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이룩한 전격전의 신화를 재현하기에는 소련이 너무나 넓었고, 소련의 전쟁동원 자원이 독일의 공격력을 능가할 만큼 너무 막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 거대한 평원은 기동력만으로 제압하기 어렵고 기후도 또 하나의 적이었습니다 ]
지금도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에 대해 많이 거론하지만 현대에 비교한다면 당시 독일 기갑부대의 편제나 장비는 구데리안이 꿈꾸던 전격적인 돌파를 감행하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 넓은 러시아 벌판의 독소전에서 독일이 동시에 운용하였던 전차는 3,000 대를 넘지 못하였습니다. ( 참고로 독소전선의 1/20 도 되지않는 지금 한반도 DMZ 양편에는 합계 6,000 대의 전차가 포진하고 있습니다. -.- ; )
[ 보급 능력이 제한을 받았습니다 ]
거기에 하노마그로 대표되는 수송차량 또한 턱없이 모자랐고 대부분의 수송 및 병참지원은 철도나 군마에 의존하였습니다. 종심이 짧은 프랑스에서는 이런 후속지원의 문제점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러시아 평원은 독일이 진격하면 할수록 이런 문제점이 더욱 크게 노출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초전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되자 기나긴 병참선과 추위 그리고 소련의 결사적인 반격을 극복하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고 구데리안을 비롯한 독일군 지휘부는 전략적 후퇴를 감행합니다. 그러나 현지 사수를 엄명한 히틀러는 격분하여 구데리안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을 면직 시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독일 기갑부대의 고민
사실 그동안 베르사유 체제에 얽매어 있어 개발이 늦었던 독일의 전차들은 성능이 미흡하였습니다. 더구나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대규모 생산 씨스템 체제가 아니어 연합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생산량도 적었고 때문에 값도 비쌌습니다. 비록 3호, 4호전차가 생산되었지만 이들의 성능이 만족 할만한 것은 아니어서 독일은 점령지의 프랑스전차나 체코의 38t, Hetzer 같은 전차들을 대규모 동원하였습니다.
[ 체코제 Hetzer 입니다. 그 성능이 좋아 독일이 대량 채택합니다 ]
독소전 당시 수량으로는 소련의 전차가 항상 독일의 전차보다 많았습니다. 초기 소련은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BT 계열 전차나 T-26 같이 어찌 보면 독일의 1호, 2호전차 처럼 실험적 성격이 강한 양철 드럼통 모양의 전차들이었고 전술교리 등이 독일에 한참 뒤져 있던 결과 독일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T-26 입니다. 이런 종류의 전차로 독일군을 막아내기 힘들었습니다 ]
독일은 프랑스전을 거치면서 그들이 보유하였던 전차보다 상대적으로 강력하였고 수량으로 많았던 프랑스의 중전차부대를 유린하였던 경험이 있었던 바, 소련의 이런 허접한 전차부대는 상대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선이 소련 깊숙이 들어가 형성되었을 때, 저급한 하류인종으로 취급하였던 소련이 만든 회심의 전차가 전선에 등장하였습니다.
바로 희대의 걸작 T-34 였습니다. 초기에 T-34 와 교전하였던 일선의 부대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상부에 하여왔습니다. “ 소련측에서 새로운 전차를 투입하였는데, 그 성능이 아군전차보다 좋은 것 같다. 화력, 기동력, 방어력 모든 면에서 아군의 전차보다 뛰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 소련의 T-34 는 독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소수여서 어렵게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이들이 대규모로 전선에 투입 될 경우 상황을 낙관 할 수 없었습니다.
[ 희대의 걸작 T-34 가 전선에 나타납니다 ]
그러한 예상이 현실이 되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1941년 10월 6일 독일 중부집단군 예하 제 4기갑군의 선두부대가 T-34전차로 중무장한 소련 제 4전차여단의 공격을 받고 43대의 전차를 잃었지만 적이 입은 피해는 T-34 6대뿐이었습니다
[ 당시 독일 최고의 4호전차로 대적하기 힘들었습니다 ]
독일이 3호, 4호전차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해 차세대전차 개발에 서둘렀지만 노획한 T-34를 살펴 본 독일은 그 성능에 경악하였습니다. 구데리안은 " 우리 전차보다 기술적으로 앞서있으며 제작하기도 쉬운 세계 최고의 성능이다 " 라고 실토하였을 정도였습니다.
* 결국 독일은 5호전차라 불리는 판더 ( 下 )를 급하게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T-34 ( 上 ) 의 카피판 ( 특히, 경사 장갑을 채택한 외형 등 ) 이라고 여겨질 만큼 개발 사상에 T-34 가 많은 영향을 끼친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독일의 충격은 대단하였습니다.
비록 구데리안을 면직시켰지만 이런 일선의 다급한 상황과 재능을 알고 있던 히틀러는 1943년 장갑군총감 裝甲軍總監 에 구데리안을 임명하고 전차의 개발, 생산, 배치, 기갑부대의 재편성 등의 임무를 부여 합니다만 사실 전세는 그의 노력만으로는 회복 할 수 있는 시점이 이미 지난 때였습니다.
[ 독일 특유의 기갑복을 입은 구데리안 ]
1945년 5월10일 미군 포로가 된 구데리안은 전후 전범으로 구속됐지만 공식 기소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히틀러의 두터운 신임에도 불구하고 나찌의 정치적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고, 히틀러에게 맞서 말싸움을 벌였던 몇 안 되는 철저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직업 군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엔지니어의 감각을 지닌 지휘관
집단적인 기갑부대의 운용등과 같은 전술이론은 구데리안이 최초로 고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상적 동지들이라 할 수 있는 만슈타인, 클라이스트, 롬멜, 호트, 만토이펠 같은 뛰어난 야전 지휘관들이 있었기에 독일군의 전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구데리안을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보는 이유는 전차의 개발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 구데리안은 부하에게 신망이 높았던 지휘관 이었습니다 ]
베르사유조약의 굴레로 병기개발에 대한 제한이 많았던 독일은 1930 년대 들어와 구데리안의 지휘 하에 비밀리 전차개발에 착수 합니다. 그 때 탄생한 1호, 2호전차는 폴란드 전선 등에서 활약하기는 하였지만 실험적인 성격이 컸고 이런 운용 결과를 바탕으로 3호, 4호전차와 같은 차세대 전차 개발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데 이중 대부분은 현대의 전차 개발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현재도 미치고 있습니다.
[ 현장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 하였습니다 ]
첫째, 차후 확장성에 대한 고려입니다. 주포의 개량 등이 이루어져서 전차의 성능을 업그레이드 할 경우 차후 개조가 용이하도록 넉넉하게 공간을 확보하여 전차를 개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탄생한 독일의 3호전차 이후 전차들은 계속적인 개량을 하면서 오랜 기간 전선에서 활약 하였습니다. 우리의 K-1 전차의 경우 사실 이 부분을 간과 하였던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확장이 가능하여 다양한 버라이언트로 전차를 개조 할 수 있었습니다 ]
둘째, 전차의 3대 요소가 화력, 방어력, 기동력인데 그중 방어력과 기동력은 서로 반비례하는 요소 입니다. 때문에 이런 모순관계를 극복하고자 전차의 무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교량을 통과할 수 있는 무게까지 전차를 개발하기로 결정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전쟁 후기에 개발된 타이거는 이런 제한을 넘어서는 重전차였지만, 기동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격전을 염두에 두었던 당시에 구데리안은 절묘한 한계점을 제시 하였던 것입니다.
[ 절묘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습니다 ]
셋째, 전차 승무원에 관한 최적의 인원을 산출 하였는데 그것은 전차장, 장전수, 포수, 조종수, 통신수의 5명이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당시 전차들은 승무원의 수가 일정치가 않았는데 5명으로 구성된 승무원이 전투효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이런 조합은 현재도 유효합니다. 다만, 통신장비와 사통장치의 발전으로 해당인원이 줄어 들었을 뿐입니다.
[ 전차 승무원에 대한 최적의 인원을 산출 하였습니다 ]
넷째, 모든 전차에 무전기와 내부 통신용 마이크를 장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수 있겠지만, 당시 전차는 지휘관 차량 외는 무전기가 없었고 전차부대는 깃발을 이용한 수신호로 통제 하였습니다. 또한 소음이 심한 전차내부 승무원간의 마이크 통신도 전차운용에 효과적이었습니다. 독일의 이런 발상은 집단화된 전차부대를 통제하기가 용이하였으며 통신장비를 갖춘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와의 대결은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다섯째, 터렛에 360도의 시계 확보가 가능한 전차장 전용 큐포라를 설치하여 전차장이 안전하고도 쉽게 전후방 상황을 파악하여 전차를 통제하며 일사불란한 작전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전 전차는 승무원들이 자기가 보이는 위치에서만 시계가 확보되어 중구난방적인 정보 수집만 가능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히 효과적인 구조였습니다.
[ 무선장비 및 시계확보 방안을 연구하였습니다 ]
여섯째, 터렛 내부에 Basket 을 매달아 놓고 조종수와 무전수를 제외한 포탑 내 전투병들이 포탑 회전과 함께 같은 곳으로 회전할 수 있는 내부 구조를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대 전차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구조는 승무원들이 항상 전투 준비태세를 갖도록 할 수 있었으며 포탑의 회전 시 내부 구조물에 승무원들이 부딪혀 다치는 사고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 현대 전차도 Basket 구조로 제작 되고 있습니다 ]
이러한 구데리안의 전차개발 사상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으로도 생각 할 측면이 많은 부분도 있었지만, K-1A1 전차처럼 K-1 전차의 개량에 많은 애를 겪었던 예를 보아도 미리 조건을 염두에 두고 전차 개발에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뛰어난 혜안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말로는 쉽지만 콜롬부스의 달걀처럼 실제로 그 방법을 찾아내고 실현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구데리안은 군인이기 전에 뛰어난 엔지니어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노력가 였습니다.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렇게 이론을 정립하고 직접실행에 옮긴 사람은 사실 세상사에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구자의 노력을 칭찬하기 보다는 항상 깎는 데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우리사회에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P.S 독일군의 명장 중의 한명인 구데리안입니다.
P.S2 다음은 총통의 소방수인 모델!?
P.S3 출처는 역시나 blog.chosun.com/xqo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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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대단한 사람이네요. 전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다니... 프랑스전 초기에 독일의 놀라운 진격속도는 구데리안의 전술이라해도 할말 없겠네요.
사실 전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건 영국, 예전에 책세상에서 밀리터리클래식이라고 전쟁서적등을 번역한 기획이 있었지요. 거기서 찰스 풀러의 '기계화전'을 번역했지만 구입하지 못했습니다아ㅠㅠ 전차와 같이 독일이 다른 국가가 정립한 이론을 잘 사용한 사례는 공수부대가 있습니다. 공수부대는 이탈리아가 최초로 잠재력을 인식했고 소련이 이를 대규모로 시연하지요. 당시 지휘관들은 공수부대의 시연에 깊은 인식을 받았으나 전술적 가치엔 무지했으나 독일 OKH를 비롯한 독일 공군은 이에 깊은 감명을 받고 전격전을 수행하기엔 공수부대가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됩니다.
이렇게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이라는 팔슈름야거가 탄생하죠. 이들은 이후 독일의 진공에 상당한 공을 하게됩니다. 폴란드, 노르웨이 전에 정찰대로 강하하고 벨기에 전엔 에벤 에마엘 요새와 알베르 운하에 강하하여 확보함으로서 제6군의 벨기에 진공에 큰 역할을 하지요. 이렇게 최정예로 승승장구하다가 크레타 공략전때 다 말아먹고ㅡㅡ 지상군으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상군으로도 악귀같은 전투력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소련과 맞선 동부전선에선 대전차포도 없이 육탄으로 전차부대를 방어하고 북아프리카에선 롬멜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그중의 백미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 방어전인데, 이때의 활약으로 팔슈름야거는 연합군에게 "몬테 카시노의 녹색 악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죠ㅋㅋ
헉@.@ 독일은 공수부대도 ㅎㄷㄷ 했군요.
프랑스제가 초기 독일제보다 우수했는데 프랑스제는 놀랍게도 무전기가 없어서 집단구타로 각개격파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옙 사실 프랑스제 무기들만 봐도 독일에 비해서 후달리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가 까이고 까여 너덜너덜해지지만. 솔까말 할말이 없는게 프랑스는 그전력가지고도 발렸으니 말이지요. ㅡㅡ;;
프랑스는 그전력가지고 폭풍처럼 발렸으니 뭐 할말없죠.
오오~ 구데리안 덕분에 전차군단이란 애칭까지 붙게 되었군요. 역시 명장~!! 현재까지 독일측 순위 1위 롬멜, 2위 만슈타인, 3위 구데리안...
롬멜도 명장이긴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잘 싸워서 문제였죠.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를 도와 현상유지만 하면 될걸 전장을 늘려버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보급과 지원을 해줘야했지요. 독일군부로선 소련과의 일전을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켜야했는데 언론을 통해서 롬멜이 엄청나게 떠버렸으니 지원을 끊기도 뭐하고 참 난감했을테지요.
2차대전에 오스만 투르크라니... 1차대전과 혼동하신 것 같군요. 그리고 터키는 당시 중립을 유지하며 연합국과 추축국의 등골을 빼먹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1차대전이 적절히 혼동되신듯
으아..참 바보같이ㅋㅋ
이런 소수의 병력으로 대승을 여러번거뒀으니 , 2차세계대전당시 독일군이 널리 회자되는 이유가 있었군요
제노 브레이커님 감사합니다.
어제 만슈타인 글 보고 이분의 블로그가서 2차대전때의 독일군 장수편은 다 보았다는..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봐도 독일이 2차세계대전 초기에 연합국(특히 프랑스)을 밀어붙인 것을 보면 정말 후덜덜.
그 것도 열악한 1호2호전차가지고 말이죠.
후에 현대전에서 통신의 중요성이 무지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2차세계대전의 교훈이 아닐까 싶습니다.
각 전차마다 통신기능이 설치되게 한것도 독일 기갑군이 시초죠.
당시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을 제외한 전부가 그런기능이 없었던
걸로 압니다. 소련도 초기에 그냥 관광당하구요... 후에는 소련이
통신기능을 장착해 독일을 역관광 보내긴 합니다만....
제노브레이커님/ 저도 ebs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팔슈름야거편으로 독일공수부대의 신화적인 활약을 잘 봤습니다.
기갑전 최고 본좌죠. 기갑전만 따지면 만슈타인도 구데리안 눈아래 듭니다.
구데리안 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