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5:6~15 좋은 열매 맺는 삶
2009년 6월 12일 중앙일보에 나온 기사의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중 이영애씨가 했던 “너나 잘하세요”란 대사는 영화 전체를 한 마디로 응축한 명대사·명장면중의 하나였고,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나, ‘말아톤’의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친구’의 "내가 니 시다바리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도 아직까지 회자되는 명대사입니다.
드라마에도 명대사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허준에서는 “의원은 병자를 보지 병자의 신분을 보지 않는다”(허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상도), “물도 그릇에 담으면 음식이다”(대장금) 이런 대사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이 기자가 작가와 감독들과 인터뷰를 한후 내린 결론은 명대사는 그저 작가나 감독의 펜 끝에서만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배우가 좋은 연기력으로 대사를 살리거나 잘 전달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 작품 전체를 대변하는 명대사는 그 작가와 감독의 인생을 대변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살아온 삶의 굴곡과 인생의 깊이들이 그 대사가 뱉어지는 순간 드러난다는 거죠.
오늘 야곱은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20여년동안 많은 일을 겪고 나서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겁니다. 6절과 7절을 보면 야곱이 벧엘에 와서 처음 한 일은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벧엘은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그리고 불순종하여 애굽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때도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던 곳입니다. 야곱도 그전에 여기서 하나님을 만났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즉 제단이 계속 쌓아지고 기도가 드려지던 곳에서 또 예배가 드려진다는 겁니다. 한번 하늘문이 열린곳에 계속 은혜가 부어지고 다시 제단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단을 회복하자 9절부터 12절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내용이 원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복과 언약의 축복 그대로입니다. 먼저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완전히 바꿔주십니다. 실제로 이 이후로는 야곱 자신의 이야기보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 열두형제 특별히 요셉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많은 자손들과 왕들이 야곱에게서 나며 이 가나안 땅을 모두 주리라는 약속도 다시 해주십니다. 그리고 14절 15절에는 어디서 많이 봤던 행동이 나옵니다. 야곱이 처음에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처음 은혜 받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돌기둥을 세우고 그곳에 정식으로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이름이 없던 그곳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다 잘된거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지 않은 나머지 35장의 이야기는 꼭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일단 35장 16절에서 20절에는 얼마뒤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임신해 있던 라헬이 죽게 됩니다. 라헬은 이미 요셉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중 다른 애기가 태어나게 되고 난산이어서 산모인 라헬이 죽게 됩니다. 라헬은 자기가 너무 아프고 죽어가면서 나은 아이에게 원래는 ‘고통의 아이’라는 뜻의 ‘베노니’라는 이름을 지어줬지만, 야곱은 ‘내 오른팔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냐민으로 바꿔줍니다. 야곱은 이름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라는 걸 자기 삶을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왜 라헬이 인생을 이렇게 마무리 했을까요? 기억나시는 분도 계실텐데 창세기 31장에서 야곱가족이 라반에게서 도망쳐 나올 때였습니다.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서 나옵니다. 그때 31장 32절에 야곱이 화가 나서 한 말이 있었는데, 누구든지 그 신을 훔친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물론 설마 라헬이 그걸 훔쳐왔을거라고 야곱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라헬이 죽은 것이 야곱의 선포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의 말 자체에 힘이 있었거든요.
케빈 제다이의 간증에서 보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말을 되돌릴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을 들음을 통해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에게 지금부터라도 축복의 말을 선포해줄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헬이 오직 그 말 한마디 때문에만 이렇게 된 것은 아닐 겁니다. 라헬은 시기가 많았고, 거짓말에도 능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삶과 선택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환경속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야곱에게 큰 고통을 주었을 겁니다. 야곱이 제일 사랑한 여인이 라헬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벌어진 사건은 21절 22절에 나오는데, 바로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작은 어머니인 빌하와 간통을 한 겁니다. 결국 르우벤은 이 일로 장자의 직분을 감당못하게 되고, 유다가 영적인 장자가 되고 유다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게 됩니다. 르우벤의 일은 야곱의 가족의 영향도 무시할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인 야곱이 아내가 두명이고, 첩이 두명, 부인이 네명이나 되었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디나의 강간사건이나 르우벤의 간통사건에 야곱의 영향도 있었던 겁니다. 물론 이 사건도 야곱에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리인데 큰 아들이 범죄하고 수치스럽게 된 것은 야곱이 수치스럽게 된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번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입니다. 8절에는 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고 되어있는데, 학자들은 리브가가 이미 그전에 죽었다고 해석하고 있고, 29절에 보면 아버지 이삭이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도 야곱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20여년간 고생고생하고 고향에 와보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얼마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면에서는 야곱의 삶과 행동의 열매들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생각할수가 있습니다. 그가 형의 장자권을 속여서 빼앗으려 하지 않았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삶을 살아왔을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들의 갈등이 없었을테니, 르우벤은 다른 길을 걸었을수도 있고, 라헬도 자식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야곱의 잘못은 아니지만, 야곱의 선택들은 좋은 열매만 맺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열매가 35장에서 여러 가지 맺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언급한 명대사 이야기처럼 야곱의 삶의 모습과 열매는 일정 부분 이전까지 야곱의 삶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길 때 우리는 보통 누구 잘못인가? 내 잘못이 아닐까 생각이 되거나, 도대체 왜 이런 일 이런 상황이 생긴 걸까? 궁금해질수도 있을 겁니다. 저희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제가 참 마음이 괴로웠던 부분도 이것이었는데 바로 혹시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못 살아서 그런가? 하는 죄책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야곱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장단점이 다 있었고, 자기 꾀를 따라 살았고, 자기 중심성도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강약의 차이만 있습니다.
여러 사건과 삶을 통해 신앙생활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죄와 허물에 집중하기보다, 그 사람의 선택과 태도를 계속 보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야곱도 선택했지만 라헬과 르우벤도 선택을 통해 삶이 이어졌고 결과도 나타났습니다. 야곱도 허물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삶은 서서히 변화됩니다. 야곱이 많은 고통 속에 자신의 선택과 약점을 통해 영향을 받은 사건들 속에, 회개하고 겸손해지고 다른 삶으로 바뀌기 시작한 겁니다. 다행히 야곱의 삶은 35장에서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바로를 만날 때 야곱은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고 성장하게 됩니다. 열국의 아비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호칭을 이어받을만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지금 일어난 사건들로 우리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우리 삶의 열매가 지금 안 좋다고 해서 영원히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뀔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힘들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고, 내가 아픔을 겪을때 남의 아픔을 헤아릴수 있고,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위로할수도 있고, 무엇보다 정말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배울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 사건들속에 우리도 겸손하고 성숙해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사랑할줄 아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