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대한민국 서울물'이라면 청계천(개천)은 '조선 한양물'이다. 서울 한강이 강남과 강북을 나누듯, 개천(開川)은 한양 남북을 갈랐다. 청계천 주변을 중촌이라 하고 그 이북을 서촌, 북촌, 동촌, 그 남쪽을 남촌이라 하였다. 현재 강남과 강북이 그렇듯 청계천 북쪽과 남쪽은 당파와 문화, 생활 수준이 달랐다.
▲ 응봉과 동촌 동촌의 산 낙산에서 바라다본 응봉과 동촌의 모습이다. 사진 왼쪽부터 인왕, 북악, 응봉이다.
해방 후 이승만(1875-1965)이 머물렀던 이화장(梨花莊)은 낙산아래에, 신익희(1894-1956) 사저인 낙산장(駱山莊)은 동숭동에 있었다. 제2공화국 총리를 역임한 장면(1899-1966) 집과 박헌영(1900-1955)이 거주한 혜화장(惠化莊)이 혜화동에 있었다. 조선 전기부터 해방 후까지 부침은 있었지만, 동촌은 권력 중심에 있었던 동네였다.
장(莊)이란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 해방 후 거물급 정치인들이 살던 저택이나 가옥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광한의 집이던 이화장은 예부터 조양루, 석양루와 함께 모두 집이 크고 화려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낙산장은 호남 갑부 김종익이 근대양식으로 지은 대형사저로 이 터에 1981년에 고급빌라, 광명 가든 레지던스가 들어섰다.
혜화장은 익산함라 3대 갑부 중 하나인 김안균의 형, 김해균이 소유한 집이다. 김안균 집안의 재력을 고려하면 혜화장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장면의 집도 혜화동에 있다 하여 혜화장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장면 집은 혜화사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서촌에는 송강, 겸재, 동촌에는 고산, 표암
▲ 장면 가옥 혜화동에 있다하여 혜화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혜화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가에 있다.
동인 김효원의 정치 라이벌, 심의겸(1535-1587)은 인왕산 아래 서촌 정릉(현 정동)에 살아 서인으로 불렸다.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한 이승만은 돈암장, 마포장을 거쳐 1947년 10월 18일부터 이듬해 8월 12일까지 동촌 이화장에 거처하였고 김구는 1945에서 49년까지 서촌 경교장(京橋莊)에 머물렀다. 지역색에서 나온 동인과 서인은 아니더라도 두 거물 정치인이 동시대에 동촌, 서촌에 거주하였으니 모진 연이로다.
서촌 못지않게 동촌도 예기(藝氣)와 문기(文氣)가 넘치는 동네다. 정치색을 걷어내고 문인으로 보면 정철(1536-1593)과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시가 문학에서 쌍벽을 이룬 거봉들이다. 서촌이 정철을, 동촌은 윤선도를 배출하였다. 정철은 서촌 청운동에서 태어났고 윤선도는 동촌 연지동에서 출생하였다.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있다.
▲ 윤선도 생가 터 윤선도는 동촌에서 태어났다. 생가터를 알리는 돌비석이 마로니에공원에 있다.
서촌에 겸재 정선(1676-1759)이 있었다면 동촌에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이 있었다. 동숭 아트센터 근처에 살았던 표암은 날마다 낙산에 올라 그림소재를 찾았다 한다. 낙산의 유방(乳房)이라 불리던 신대약수에 그의 필적, 홍천취벽(紅泉翠壁)을 바위에 남겼으나 땅에 묻히고 말았다.
소설가 김훈이 유년기를 보낸 곳도 이화동이고 소설가 한무숙(1918-1993)은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혜화동 장면가옥 근처에 한무숙 문학관이 있다.
▲ 한무숙문학관 동촌에 몇 채 안 남은 근사한 한옥집으로 소설가 한무숙이 살았다. 지금은 한무숙문학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과 70년대까지 서울대가 있었던 동촌, 동인이라는 큰 정치 세력과 해방 후 정치 실세들이 운집한 권력집단 마을이었다. 그러면서 뼛속까지 서민 동네였다. 예나 지금이나 빈부 격차나 지위와 신분 차이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 가운데 동촌은 그 격차가 심한 동네였다.
한양을 건설하면서 태조는 백정은 혜화동, 명륜동에, 갖바치는 동숭동에, 공장인과 방물업자는 충신동과 돈의동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균관 주변에는 반촌(泮村)이라 하여 요즘 대학촌과 비슷한 마을이 있었는데 성균관 유생을 돌보는 노비가 중심이었다.
▲ 반촌의 오늘 성균관대학교 앞 정경으로 예전에는 반촌이었다. 사진 속 도로는 예전에 반수(泮水)가 흐르던 흥덕동천이었다.
영조 대에 이르러 한양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서울에 거지들이 넘쳐났다. 살 곳이 없는 이들은 동대문 주변에서 청계천 준설 흙으로 만든 가산(假山)에 땅을 파고 살았다. 이들은 '땅거지', '땅꾼'으로 불렸다.
영조는 불한당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이들에게 뱀을 잡아 팔 권리를 주었다. 이들은 성 밖에서 잡은 뱀을 청계천 다리 밑에서 삶아 팔았다. 한동안 청계천 다리 밑에 뱀탕집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부터 뱀 잡는 사람도 땅꾼이라 불렸다.
한양에 몰려든 거지들은 '서울깍쟁이'라 불렸다. 깍쟁이라는 말은 원래 거지라는 뜻이었다. 서울에 거지가 많아지자 서울 사람을 얕잡아보며 서울깍쟁이라 불렀다는 것이다(전우용의 <서울의 동쪽>에서 인용). 거지들(깍쟁이패)은 구걸을 하거나 남의 집 장례(葬禮) 일을 거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 중 몇몇이 요샛말로 약빠른 '깍쟁이' 짓을 하여 서울깍쟁이 말이 퍼지지 않았나 싶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살길을 찾아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동대문 주변 인구는 계속 늘어났다. 이들은 개천가나 낙산기슭에 흙과 나무토막, 가마니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토막'에 살았다. 반면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리나 사업가, 지주는 주로 동대문 남쪽 신당동에 서양식과 일본식 주택을 섞어 만든 '문화 주택'에 살았다.
창경궁 남쪽에 배우개시장이 서고 동대문 일대 시장이 커지며 낙산 주변은 서민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생긴 마을 중에 재개발을 마다하고 지금도 달동네로 남아있는 마을이 있다. 낙산 아래 이화마을, 성 너머 장수마을, 멀리 성북구 북정마을로 성곽 주변에 생긴 판자촌마을이었다. 낙산 성 너머에는 동대문시장의 생산기지로 창신동 봉제마을이 있다.
▲ 이화마을 정경 성곽에 기대선 마을 중에 아직도 건재한 마을이 이화, 장수, 북정마을이다. 동촌은 권력실세의 동네이자 서민의 동네다.
동촌은 시대를 달리해가며 다양한 계층이 살던 곳이다. 핵심권력자, 이승만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 성균관유생과 서울대생 그리고 동대문시장 일대에서 일하는 노동자, 땅거지, 땅꾼, 백정, 갖바치, 서민까지. 종대를 이루며 살았던 이중마을이었다. 조선에서 산업화를 거쳐 온 우리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동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