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요트고래사냥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과학으로 보는 전쟁사 - 고대와 중세의 공성전, 그리고 페스트
베스 추천 0 조회 4,204 13.07.12 13: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류는 수많은 전염병을 겪으며 살아남아 지구를 메워가고 있지만, 그동안 극복한 수많은 질병들 중에서 지금도 악몽으로 남아있는 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유명한 흑사병, 즉 페스트죠. 중세 유럽에 번진 페스트는 수천만의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페스트, 중세식 이름으로 대역병도 전쟁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지요.

고대 사회에서부터 인간은 자신의 거주지 주위에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맹수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위협은 같은 인간이었지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치지 않을 경우 다른 집단이 손쉽게 쳐들어와 자신이 모아둔 식량과 재산, 여자들을 훔쳐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행위의 시작이었지요. 그리고 여러 전쟁행위 중에서도 방어측이 만들어둔 울타리, 즉 성벽을 넘어가는 행위를 공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 벽과 울타리가 허술하던 시대에는 도끼로 울타리를 부수거나 사다리를 놓고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고대-중세로 시대가 바뀌면서 성벽이 점점 튼튼해져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게 되었지요. 성벽 위에서 버티는 방어군을 사격으로 제압하고 성내에 불을 지르거나 여러 구조물들을 부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보통 화살만 가지고는 화력이 부족했으므로 돌덩이나 통나무 같은 큰 화살을 쏠 필요가 있었지요. 그래서 이런 물건들이 나오게 됩니다.



 

전형적인 로마의 캐터펄트




 


 

역시 로마식 캐터펄트




 

 



 

이것도 중세 투석기. 한자 이름이 있긴 하지만 영어로 트레뷰셋이라고 하는 게 이해가 빠를까요?


위의 두 가지는 로마 시대에 쓰던 투석기입니다. 그림을 잘 보면 뭔가 고무줄처럼 배배 꼬인 물건이 투석기에 힘을 주는 걸 볼 수 있는데, 로마시대에는 이 탄성을 주는 재료로 동물의 힘줄이나 두껍게 땋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했어요. 이에 반해서, 3번째 것과 같은 중세의 투석기는 탄력을 얻기 위해 짐승의 힘줄이나 머리카락 같은 옛날 재료 대신 밧줄을 사용했어요. 그 점을 감안하면, 아마 중세의 투석기는 고대 로마군의 것보다 힘이 약했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밧줄의 탄성 부족으로 인한 위력 약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무기가 바로 마지막 사진의 트레뷰셋, 한자로는 천평투석기입니다. 로마 시대의 것처럼 밧줄의 탄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레의 원리를 사용한 투석기죠. 막대기의 짧은 쪽 끝에 무거운 추를 달아 그 무게를 이용해서 아래로 떨어트리면, 축을 중심으로 긴 쪽이 크게 회전하게 되는 현상을 이용한 겁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재료의 탄성 따위와는 무관하게 돌을 날려보낼 수가 있는데, 간단한 그림으로 원리를 표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이런 형태의 투석기는 거의 중세 내내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사용된 기록 중 하나는 성 요한 기사단이 벌인 1480년의 제1차 로도스 공방전인데, 이때 터키군이 중포로 포격을 가해오는데도 불구하고 섬을 지키는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은 반격할 만한 대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골머리를 앓던 기사들은 트레뷰셋을 제작했고, 이를 이용해 터키군 진지를 포격해서 겨우 터키군의 포격을 침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화약과 대포의 본격적인 보급으로 트레뷰셋과 같은 투석기는 자리를 잃게 되지요.

물론 중세에도 기껏 만든 투석기로 돌만 날리지는 않았습니다. 불덩어리를 던지거나 살아 있는 적의 포로, 잘린 적의 머리, 오물이 담긴 통, 적병이나 말의 죽은 시체 따위를 성 안으로 던져넣는 데도 트레뷰셋이 사용되었지요. 1422년에 있었던 카롤슈타트(karolstadt,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크레팅가Kretinga) 공방전에서는 무려 200마차분의 오물을 수비군에게 퍼붓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던지는 이유는 대충 짐작하실 겁니다. 불덩어리를 던지는 거야 당연히 불을 지르기 위해서고, 살아있는 포로를 던지는 것은 수비군에게 겁을 주기 위해, 시체를 던지는 것은 성내에 질병을 퍼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투 습관이 그 무서운 병, 페스트를 유럽에 퍼뜨렸던 거죠.



 

흑사병에 걸린 희생자들을 짓밟으며 달리는 묵시록의 네 기사



이 페스트가 처음 발생한 것은 중앙아시아였습니다.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거쳐 동쪽과 서쪽으로 각기 퍼져나갔지요. 중국에서는 이 역병의 유행으로 수천만이 죽었고, 유럽에서도 전체 인구의 1/3~1/4 가까운 수가 죽었습니다. 이 전염병의 유럽으로의 유행이 시작된 곳은 바로 흑해 연안의 도시, 카파였습니다.


 


 

두 지도를 연속으로 보시면 흑해와 크림 반도의 위치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위 지도에서 테오도시아(Theodosia)로 표시된 그리스 식민도시가 중세의 카파(Caffa), 현재의 페오도시아(Feodosia)입니다.




1347년, 이 도시는 킵차크 한국(징기스칸의 정복 이후 성립된 몽고의 4한국(汗國)중 하나)의 몽골군에게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몽골군의 진영에서는 중앙아시아에서 전파된 흑사병이 퍼지고 있었고, 몽골군 지휘관은 시체도 처리할 겸 방어군의 사기도 떨어트릴 겸 해서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카파 시내에 던져넣었습니다. 제노바 측도 시체를 방치할 경우 병을 퍼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몽골군이 날리는 시체를 보는대로 바닷속에 처넣었지만, 한정된 인원을 가진 수비측으로서는 모든 시체를 제때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시내에는 페스트가 발생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공격하는 몽골군의 진중에서도 페스트는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몽골군도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도시의 함락을 포기하고 철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카파에서 떠나는 갤리선을 탄 승객과 뱃사람들은 이미 병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돌아가는 뱃길에서 발병했고, 배에 타고 있던 쥐와 사람으로 인해 이들은 들르는 항구마다 병을 뿌리면서 서쪽으로 가게 됩니다. 이들이 페스트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항구 사람들은 환자가 있다는 것만 보고 맞아들였다가 급속도로 자신들의 도시에 병이 퍼지는 것을 발견하자 뒤늦게 이들을 쫓아보냈고, 이런 식의 상황 전개는 콘스탄티노플, 메시나, 제노바, 마르세이유......그외 많은 항구들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이렇게 해안을 따라 병을 전파시키던 카파의 갤리선들은 결국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대서양으로 나간 뒤 소식이 끊어지지요. 이후 2년간 유행한 대규모의 페스트로 인해, 유럽에서는 25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게 됩니다. 페스트로 인한 사회적 영향이나 이후의 유행 등은 오늘의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므로 생략^^
(굳이 따지자면 백년전쟁이나 자크리의 난, 와트 타일러의 난과 관련이 있긴 합니다만...ㅋ)

이런 식의 노골적인 생물학전은 그 후로는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중세에는 우물에 썩은 시체를 던져넣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의 식수 공급을 차단하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작전이 자주 벌어졌지만, 근대 이후 기사도에 어느 정도 바탕을 둔 전쟁에 대한 국제법 같은 것이 그 형태를 잡아가면서 생물학전 같은
비열한 수단은 사용이 금기시되거든요.*주1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 화학무기가 대량으로 사용될 때도 세균무기는 별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연합국의 가축을 감소시켜 육류 및 축력 공급을 차단할 목적으로 독일이 탄저균을 일부 사용한 사례가 있지만,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한 세균무기의 대량 사용까지는 이르지 않았지요. 세균 무기가 갖는 두 가지 특성, 바로 무차별성상호보복의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의 대량사망을 초래할 수 있고, 적국도 똑같이 보복할 수 있다면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핵무기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게다가 페스트에 대한 유럽인들의 악몽같은 기억도 사람을 죽이는 데 세균을 쓴다는 것을 자제시켰습니다.

전염병이 역사를 바꾼 예는 많습니다. 전쟁중에 퍼진 전염병도 많고요. 하지만 전쟁 중에, 그것도 의도적으로 퍼뜨린 전염병 중에서 1347년의 페스트만큼 많은 사람을 죽이고 역사에 영향을 끼친 사례는 거의 전무후무하다고 보아도 좋지 싶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