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파파 사전조사 >
원제 : Luna Papa , 1999
감독 |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
배우 | 술판 카마토바 ... 말라카 모리츠 블라입트르 ... 나즈레딘 오토 무크하메즈하노브 ... 사바 메랍 니니트쩨 ... 알리크 폴리나 라키나 ... 크하비부라(목소리) 니콜라이 포멘코 ... 야시르 롤라 미르조라크히모바 ... 주부
제작 | 필립 아브릴, 칼 바움가르트너, 토마스 코에르퍼 각본 |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 아이라클리 크비리카제
촬영 | 다냐르 압둘라크마노브, 마틴 그츌라크, 라리 랄체브
음악 | 달러 나자로브 편집 | 킥 보 헤플린, 에비 로멘
제작사 | 판도라 필름,
유로 스페이스 카스피 해변 근처의 작은 마을 파코에는 셰익스피어 연극배우가 되고 싶은 아름다운 소녀 말라카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박약아가 된 오빠 나자르가 살고 있다. 말라카는 어느 달이 밝은 날 숲속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를 따라갔다가 임신을 하고 만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탐 크루즈의 친구이며 자신이 배우라고 소개했던 것 뿐. 말라카의 아버지와 오빠 나자르, 말라카는 아이 아버지를 찾아 더나지만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갑자기 소가 떨어져 남편도 아버지도 잃은 말라카. 곁에 남은 건 정신박약의 오빠 뿐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 -풍성하고 재미있는 사랑과 임신의 사회학- <루나 파파>는 '임신한 처녀의 아빠 찾기 소동'이라는, 단순하고도 낡은 플롯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플롯을 가진 여느 이야기와는 달리 말라카는 청순가련형이 아니라 씩씩하며 자주적이다. 이 영화에는 정말 물어볼 것이 많다. 말라카(슐판 카마토파)의 낙태 수술을 하려던 의사를 죽인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인가? 말라카가 도망간 곳을 아버지와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도 찾아내는가. 말라카 가족이 머무는 식당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오빠는 지뢰를 밟았는데 왜 정신지체가 되었는가. 정신지체자에게 먹이는 알약은 무슨 약일까. 말라카 엄마의 무덤은 바로 집 옆에 있는데, 죽은 아빠의 시체는 왜 바다로 흘려보내는가. 천장에 달린 선풍기를 돌리자 어떻게 지붕이 헬리곱터처럼 떠다니는가. 시대는 언제며, 장소는 정확하게 어디인가. 감독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는 스크린 뒤에서 씩 웃으며 대답을 않는다. 답답하시면 먼저 이 장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동차를 뜯어먹는 돼지, 요상하게 생긴 일인용 자동차, 우왕좌왕 몰려다니는 거위떼들, 부산스럽게 떠도는 사람들. 에밀 쿠스트리차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말하자면, 스크린 뒤의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 뒤에는 에밀 쿠스트리차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반추상이라고 우기면서, 거론했던 바로 그 감독이기도 하다. 리얼리즘과 표현주의를 통합하는 동시에 그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반추상, 이 미술사적 개념은 영화에 적용하기도 힘들지만, 김기덕과는 더욱 관련이 없다. 쿠스트리차와 쿠도이나자로프와 가까운 것은 마술적 리얼리즘일 것이다. '현상세계의 논리적 개연성을 적당히 무시하고 비사실적 환상을 부각시켜 비현실의 현실성을 창출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사실주의 문학과 환상문학의 결합으로 유명한 마르케스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루나 파파>는 '임신한 처녀의 아빠 찾기 소동'이라는, 단순하고도 낡은 플롯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플롯을 가진 여느 이야기와는 달리 말라카는 청순가련형이 아니라 씩씩하며 자주적이다. 혼전 임신이나 혼외 정사를 범죄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녀는(사실은 그녀의 아빠가) 태어날 아기의 아빠를 기를 쓰고 찾아나선다. 하지만 계속 사고만 터질 뿐 아빠조차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다. 말라카는 아직 세상의 법칙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에 부과된 규칙을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그래서 <루나 파파>는 외연 풍부한 '사랑과 임신의 사회학'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영화가 취한 태도에 기인한다. 이 영화에는 '현상세계의 논리적 개연성'을 무시하는 장면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사실적 환상(계제)을 부각시켜 비현실의 현실성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진짜 남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는 순간 아빠와 신랑은 하늘에서 떨어진 소에 맞아 즉사한다. 비사실적 계제인 셈이다. 이후 소를 떨어뜨린 비행기 조종사가 씨를 뿌린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마을 사람들은 그와 결혼하길 종용한다. 비현실의 현실성이 창출되는 순간이다. 이것은 그럼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묘사로 치닫는다. 말라카는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을 지붕을 타고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의 결별이며 어떤 결단 같았다. 하지만 이 사회학 교재는 풍성하고 재미있기만 하다. 그것 역시 마술적 리얼리즘 덕택이며, 쿠도이나자로프의 재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은 에밀 쿠스트리차가 만든 것 같다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삶에 대한 따뜻한 낙관은 가득하지만, 창조성보다 창조적 열정만 많았던 셈이다. (필름 2.0)
<안나 까레리나 감상문>
처음에 영화를 볼땐 단지 소피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기에 급급했다.
영화의 감상보다는 소피의 드레스와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소피 보다는 안나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던겄같다. 젊고 아름다운 사교계의 부인, 그녀는 눈부실정도로 젊고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뒤로 슬픔이 있었던것이다. 그런 안나는 젊고 열정적인 브론스키를 만나게된다.
늙고 체면만을 따지고 책임만을 따지는 남편과는 달리, 브론스키는 잘생기고 열정적인 멋진 남자였다. 몰래 사랑을하거나, 안나가 브론스키를 멀리할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빠르게 사랑에 빠져들었으며나중엔 떠나게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함께있는것만으로 사랑을했는데, 너무 너무 멋있어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있으며 두려울것이 없다는, 함께있는것만으로도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하지만 영화는 환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가고있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안나와, 이혼을 해주지않는 남편, 그리고 사교계의 시선. 사랑만있으면 다 된다는 그런 로맨스는 없는 것이다. 몇개월동안 방안에만 같혀있던 안나는 고통스러워하며, 그녀를 지켜보는 브론스키와도 갈등이 생기게된다. 브론스키도, 어쩌면 이해를 할수있을것같다. 자신의 어머니도 중요할것이고, 그리고 방안에만 있는, 사랑해왔던 이혼도 하지않은채 아들을 그리워하는 유부녀 골칫거리 안나말고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도 자기옆에 있으니, 젊은 남자가 어찌 안나만 바라볼수 있겠나, 이런 기분나쁜 논리는 어쩔수 없는 현실이였고, 이것은 영화를 보는 나를 답답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서서히 아편에 중독되어 인격이 파멸되가는 안나를 보며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고 초반에 보여줬던 기차사고의 복선은 결국 그녀의 자살로 이어진다.
개인적인 바램으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뜨거웠던 사랑이 잘 되었으면, 명분과 잣대같은것은 무시해버린 순수한 사랑, 그 자체만 인정받고 아름답게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 이었지만,,
그들의 무모하고 열정적인 사랑은,결국엔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비극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안나 같은 사랑이 있을까, 안나가 현재살고 있다면
안나를 과연 죽음으로 까지 내몰수 있었을까.
중국어 중국학과 20050235 주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