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24. 바그다드 함락, 무엇이 비슷한가?
▶ 1,400년 이어온 수니파 시아파 갈등
[사진 = 수니파와 시아파(진초록) 분포]
당시 압바스 왕조는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슬림은 당시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돼 있었다.
현재도 전체 무슬림의 90% 정도가 수니파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시아파는 10%정도로 소수다.
무슬림의 갈등과 분열은 예언가 모하메드가 죽은 후 표면화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는 모하메드가 죽은 후 정통 칼리프에 의해 운영됐다.
[사진 = 다마스쿠스 대모스크]
이들은 순나(Sunnah), 즉 예언자 모하메드의 관행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이들이 바로 이슬람교의 정통파라고 주장하는 수니파들이다.
시아파는 그 말 자체가 '분파' '파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후계자 선임문제에서 갈라져 나온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초기 4명의 칼리프 가운데 네 번째 칼리프 알리(656-661)를 따르는 무리들이다.
[사진 = 이슬람 사원]
시아파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모하메드는 신의 사자'라는 이슬람 신앙의 주요 원칙('샤하다'라고 한다)에
네 번째 칼리프 알리가 바로 신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바로 신의 친구’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알리에 앞선 세 명의 칼리프는 알리의 자리를 찬탈한 자들이라고 주장하며 그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두 파는 종교적인 믿음과 교리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교리나 교법이 달라서가 아니라 교권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서로 갈등을 빚는 동안 종교적 관행과 전통 그리고 예배 등에서도 견해차를 나타내며 1,400년 이상동안 단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 수니파가 다수의 시아파 지배
[사진 = 시아파 순교기념 의식]
이슬람 세계전체를 놓고 볼 때는 수니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만 놓고 보면 시아파가 오히려 수니파보다 더 많다.
이처럼 인적구성을 특이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영국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이라크를 지배하게 된 영국은 이라크의 남부에는 시아파, 중부에는 수니파
그리고 북부에는 쿠르드족이 자리를 잡도록 판을 짰다.
이라크는 독립운동을 통해 1932년 왕정국가로 독립했으나 지난 58년 파이잘 국왕이 피살된 뒤
군사 쿠데타에 의해 공화정이 되면서 암살과 쿠데타로 불안한 정치상황이 이어져왔다.
그 것을 종식시킨 것이 지난 68년 후세인의 쿠데타였다.
이후 49년, 근 반세기가 흘렀지만 당시 인적 구성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40% 정도를 차지하는 수니파가 50%가 넘는 시아파를 지배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 = 알리 이맘 추정도]
그렇다 해도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시아파가 많은 것은 시아파가 생겨난 곳이 이라크이고
그들이 받드는 알리 이맘의 묘가 이라크 나자프에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바그다드에서 180Km정도 남쪽에 있는 나자프에는 시아파 최고 성지인 이맘 알리 사원이 있다.
이맘(Imam)은 '지도자' 또는 '모범'이란 의미로 시아파 공동체의 우두머리, 수장을 말한다.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네 번째 칼리프였던 알리는 수니파와의 갈등으로 암살됐다.
시아파는 여기서부터 비롯됐다.
▶ 바그다드 함락 기뻐한 시아파
몽골군의 바그다드 함락 당시 수니파들은 압바스 왕조의 멸망과 바그다드의 함락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상당수 수니파들은 이는 분명 '하늘이 보낸 악마가 한 일'로 믿었다.
그러나 무슬림 가운데서도 바그다드의 함락은 당연한 일이라며 고소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시아파 사람들이었다.
[사진 = 이라크 전쟁]
아바스왕조와 바그다드의 몰락은 신앙을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신이 내린 철퇴라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었다.
그래서 과거 훌레구에 의해 바그다드가 점령될 때 상황과 13년 전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사담 후세인을 잡겠다며
일으킨 이라크 전쟁에서 바그다드가 점령되는 상황이 상당 부분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 몽골과 미국이 목표로 삼은 바그다드
[사진 = 사담 후세인]
세계 최강의 군대 앞에서 위기에 처해있던 당시의 바그다드나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받아친 무스타심의 대응은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맞선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대통령의 태도나 분위기와 비슷했다.
공격을 노리는 쪽이 당시 세계 최강의 몽골군이었다.
후세인을 노려 공격을 시작한 미국은 지금 세계 최강대국이다.
이들이 목표를 삼고 있는 곳도 다 같이 바그다드였다.
당시 몽골군은 투석기로 바그다드를 집중 공격해 바그다드는 돌멩이 세례에 초토화 됐다.
그런 뒤 몽골군은 성을 쉽게 점령했다.
미군 역시 수 십 차례의 바그다드 공습을 통해 도시를 철저히 파괴시킨 뒤 지상군을 투입해 이 도시를 점령했다.
▶ 비슷한 통치자의 최후
바그다드의 통치자가 맞은 최후도 비슷했다.
칼리프 무스타심은 바그다드가 점령된 뒤 참혹하게 처형됐다.
사담 후세인 역시 바그다드가 점령된 뒤 2년 이상 도망 다니다 고향 티그리티 근처서 체포돼 전범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시아파 주민 148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협의로 교수형 선고를 받고 11년 전인 2006년 12월 30일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24년간 이라크 대통령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후세인은 처형된 뒤 고향 근처에 매장됐다.
▶ 바그다드 붕괴를 기뻐한 시아파
[사진 = 코란 표지]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했을 때 시아파는 신이 내린 철퇴라며 기뻐했다.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했을 때도 시아파들은 후세인 정권의 붕괴를 반기며 환영했다.
이 점에서도 비슷했다. 740여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전쟁이 여러 면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였다는 점에서
역사는 지나간 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또 미래에도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