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신의 일에 빠져 허리께의 살이 드러난 줄도 모르고 일하는 여자의 그 드러난 맨살에 가슴이 아렸다던, 서커스를 하는 할머니를 보며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가슴을 아파했다던 서영은 작가의 말을 기억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마치 내 일 인양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 문득 나는 누군가가 되어 그의 아픔을 공유했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절망에 이른 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고 눈물이 흐르는 그 때에, 내게 기대어 온 이들에게 나는 위로를 해 주었다. 그이들의 눈동자 속 비친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이와 똑같은 표정으로 아파하는 듯 보였다. 입술로 하는 위로는 쉬웠다. 내 일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그이들 앞에 내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의 아픔 공유 방식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연예인 누가 애인과 헤어진 후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슬플 땐 이런 얼굴을 지어야 하는 구나, 생각했다고 말하는 인터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내 소설 속 소재로 쓰면 어떨까 생각 하곤 한다. 누군가 내게 어렵게 털어놓은 은밀한 이야기이든 TV 속 누군가의 이야기이든 가리지 않는다. 어느 시구처럼 나는 그렇게 얻어진 소재들을 품고 부자가 된 양 뿌듯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영은 작가는 말한다. 써봐야 아는 것이다. 써야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내가 더 부지런을 떨며 노력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제 나이에 맞는 것들을 느끼라고, 의미를 찾으며 살라고 하던 그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스물 하나. 나는 억지로라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소나기가 한바탕 퍼붓고 지나간 어둑한 저녁.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침대에 누운 엄마의 앓는 소리처럼 부르르 떨리는 바이올린 선율이 내 귓가를 파고든다.
2.
문학행사 때 들었던가, 누군가의 시에서 봤던가. ‘내 시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 시는 내가 된다.’ 이 말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운 선배를 추모하는 행사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그가 다녔던 영랑반에 내가 다녔고, 그가 앉았던 창가 쪽 가운데 자리를 즐겨 앉았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던 스승을 나도 존경한다. 마치 그가 내게 물려주고 간 듯하다. 행사를 시작하며 영한 오빠가 했던 말처럼 나와 상관없는 죽음은 없다는 말에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그것이 한 이유가 되리라.
그러다 문득 내 떠난 자리를 매번 기억하며 내 이름을 불러줄, 곳곳에 네가 있다고 너는 아직 우리의 곁에 있다고 생각해 줄 사람이 있나 생각해본다. 스쳐가는 얼굴들 뒤로 한숨이 따르는 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내 생애동안 보아온 몇 사람들 때문이리라. 인연, 그것은 어렵고도 쉽다. 내 곁에 있어주었던 이들을 떠올려본다.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맞닿았던 인연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분명 누군가 빠져나간 자리를 새로운 이가 채우겠지만 가슴 어딘가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한고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이.
3.
대식아. 아침에 7시엔가 잠들어서 밤 9시가 다 된 시각에 일어났다고 문자를 보내는 구나. 어제 만약 내가 호명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더라면 너에게 20박 21일의 휴가 후 복귀를 하고, 3일 뒤 제대한 우리 오빠의 이야기와 어서 시간이 흘러 너에게 민간인으로서의 자유가 찾아오길 바란다는 말을 전하며 ‘자유로 와’라는 노래를 불러주려고 했었다. 뭐,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작년 이맘 때 알게 된 너는 동갑인 나한테 누나라고 했었다. (호진이는 반 년 동안, 태균이는 아직도 나를 누나로 알고 있는 듯하지만.) 같이 뮤지컬도 보러 갔고 -가기만 했었고 보지는 못했지만- 술자리도 몇 번 가졌었고, 회관 행사도 여러 번 함께 했지만 어쩐지 우리들 사이에 추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앞으로 기회가 많겠지, 생각하며 너를 보내려 한다. 휴가 나오면 꼭 연락해. 자대 배치 받으면 주소도 알려주고.
우리 오빠가 그러더라, 군대는 겨울에 가는 거보다 여름에 가는 게 더 낫다고. 잘 다녀와. 너는 타인이 너를 편하게 생각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어디서든 편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통할 거다. 김대식이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