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의 뒤안길
탐스런 감이 익어가는 청명한 가을날, 나는 익산 왕궁리 언덕에 서있었다. 앞에는 오래된 5층석탑이 보이고 주변 곳곳이 건물이나 정원, 배수로 등을 표시하는 흔적들이 널려진 야트마한 궁궐터에서 그 옛날 서동요 전설의 주인공이었던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꿈꾸었을 국가의 새로운 도약을 상상해 본다. 국가는 문명의 성쇠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문명이 인간이 이룩한 사회적 유산이라면 지도자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가져야 할 사명감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무리한 토목공사와 정복전쟁으로 국력을 허비했다는 일부 비난에도 불구하고 능란한 정치와 외교로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위상을 회복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마침 오늘이 10월 26일이라 45년전 서거한 박정희대통령(1917~1979)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1961년 5.16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그는 조국근대화를 이끈 잊을 수 없는 지도자였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곤궁했던 60~70년대는 나의 학창시절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월남파병, 사회간접자본 구축, 중화학공업 육성 등 굵직한 정책 담론은 차치하고서라도 혼분식 장려, 쥐잡기, 송충이 구제, 장발단속 등 일상에서의 아련한 추억들이 주마등같이 뇌리를 스친다.
그와 함께 서거 당시 남아있었던 쿠데타, 유신독재, 긴급조치 등 나의 복잡한 심경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곰씹어 보게 된다.
2 국가의 실패
지난해부터 나는 공주, 부여, 서산, 익산 등 백제의 고장들을 둘러보았다. 공주의 공산성과 무녕왕릉, 부여의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서산의 마애삼존불 등등... 그 아름다운 문명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백마강에 비친 애련한 상념에 젖어들기도 했다.
백제는 왜 실패했을까? 백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밀려 한강유역의 도읍지를 버리고 공주와 부여로 천도한 이래, 지역의 풍부한 물산과 중국 남조시대의 영향을 받아 우아하고 세련된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지만, 역설적으로 현실의 풍요로움에 안주한 나머지 도전적인 헝그리 정신이 상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으로 나름 생각하고 있다. 삼국이 군사, 외교면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던 당시에 이 점이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중에는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지배국에 복속된 상태로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일제 35년이 문득 오버랩된다. 지금부터 미처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절에 아버지나 할아버지뻘 되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나라 잃은 서러움은 얼마나 느꼈을까? 만약 그 기간이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모든 게 궁금하지만 암울한 시절임에도 독립을 위하여 항거하던 지사들의 영혼은 여전히 존경스럽다.
3 국가주의(國家主義)
국가는 공정한 사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고 나아가 공동의 정의(正義)나 공의(公義)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이념을 강조하고 그 통일, 독립, 발전을 도모하는 일은 설사 구성원의 이해충돌로 갈등이 유발되곤 하더라도 공정한 룰이 모색될 수 있다면, 선의의 경쟁과 이익 추구는 바람직한 사회 구성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오히려 국민과 선출된 정부간의 적절한 견제과 협력관계가 조성된다면 이를 토대로 한 자유공화국(自由共和國)에 대한 효용성은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문명의 교류가 국경을 넘어 세계 전체로 확장된 글로벌 환경하에서는 천문학적인 부를 차지한 지배엘리트들이 정치, 산업, 금융, 언론 등 사회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Plutocracy (금권만능정치)로 흐르는 경향이 있고, 나날히 진화하는 4차 ICT정보혁명과 AI(인공지능) 알고리즘, 트랜스휴머니즘 (Transhumanism) 등 과학기술은 우리의 손발을 스스로 묶을 수 있어 국가의 존재 의의를 퇴색케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어제는 충남 홍성에 있었다. 홍성에는 만해 한용운(1879~1944), 백야 김좌진 (1889~1930), 매죽헌 성삼문(1418~ 1456) 등 유난히 지조가 강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기념관에서 만해의 족적을 보았다. 그는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불문에 출가한 스님이자 문학가로서 특히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발기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평생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전시된 얼굴 사진에서 본 그의 눈빛은 찌를듯이 형형하다. 그의 자필 원고에 쓰여진 글씨체에는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지고, 그의 시 '오도송(悟道頌)'에는 득도에 이르는 깨우침이 전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길게 여운을 남기는 건 '님의 침묵' 의 마지막 구절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4 번영의 길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국기(國旗)나 애국가(愛國歌)를 보고 들을 기회가 뜸해졌다. 웬지 나라 사랑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사적 자치의 주체인 개인의 권리가 보다 커진 탓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의 존재는 소중하다.
최근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 교수는 그들의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 에서 국가의 번영과 빈곤에 이르는 결정적 분기점(Critical Junture)으로 창조적 파괴가 가능할 수 있는 다원성을 포용하는 제도가 긴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어설픈 선악구도나 이념을 내세운 포퓰리즘, 남 탓, 떼법이 성행하는 한 국가발전의 발걸음은 더딜수 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집권 18년동안 흔들림없이 자유시장경제로 전진해갔던 박정희 대통령에 새삼 감사를 보낸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당시 '하면 된다'는 국민의 가능성을 믿고 매진했던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의 의미를 이제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물질적 성취하에서만 진정한 민주화도 가능하다는 것을~
어쩌면 역사의 우연성을 감안하더라도 2차세계대전후 독립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있는 많은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제 유래가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고, 세계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근면한 한국인들이 협동하여 꿈같은 새역사를 창조했던 셈이다. 그 중심엔 그가 있었다. 누가 그의 무덤에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유난히 자신에 엄격했던 그는 부인, 그리고 딸과 함께 희생되었다. 자칫 잊혀질 수도 있는 쓸쓸한 이 계절에 그가 그립다.
첫댓글 선생님께서 올려주신글 한자한자 잘읽고 지나간 역사에 대하여. 생각에 잠겨봅니다
감사합니다
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