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주요한
우리 집 동편 담 밑에는 돌창을 파고
서편 담은 곁집 담벼락으로 대신하였소
그 담에 붙어 있는 닭이 홰를 가리운 듯이
비스듬히 뻗어난 살구나무, 첫여름에
막대기로 떨구는 선살구의 신맛이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가지를 꺾어다 꽂았던 포플러가
곧은 줄로 자라나서 네 헤에는 제법
높이 부는 겨울바람에 노래를 칩니다.
나 많으시고 무서운 할아버님 안 계신 틈에
지붕에 오르기와 매흙 깐 마당 파기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봄에는 호미 들고 메 캐러 들에 가며
가을엔 맵다란 김장무 날로 먹는 맛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해마다 추석이면 으레히 헷기장쌀에
밀길구미 길구어 노티를 지지더니
늙으신 할머님 지금은 누구를 위하여......
[어휘풀이]
-돌창 : 도랑창의 준말, 깨끗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도랑.
-홰 : 닭이나 새가 앉도록 닭장이나 새장 속에 가로지른 나무 막대
-나 : 나이
-매흙 : 벽의 거죽을 바르는 데 쓰는 고운 흙
-메 : 메꽃의 뿌리
-맵다란 : ‘매운’의 사투리
-밀길구미 : ‘밀가루’의 사투리
-길구어 : 찧어
-노티 : 좁쌀, 찹쌀, 기장 따위의 가루를 쪄서 엿기름에 삭히어 찐 떡.
[작품해설]
우리의 개화기는 반봉건과 반외세라는 이중성을 갖는다는 데 그 특수성이 있다.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면서도 중세적 질서의 붕괴와 외세 침탈의 이중성으로 인해 개화계몽을 위한 근대 문물의 유입이 결국 외세의 침략으로 이어짐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일제에게 나라를 박탈당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근대화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며, 진정한 근대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내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에서 전통적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전통적 문학 양식과 현대적 문학 양식의 접목을 시도하게 하였는데, 이 시는 바로 그런 시도의 결과로 산출된 작품이다.
주요한의 「불놀이」로 상징되는 근대적인 자유시 운동에 앞자서기도 했으나, 그 정서의 밑바탕에는 전통에 대한 소중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같은 정서가 짙게 나타나 있는 이 시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면서 급격한 근대화로 인해 사라진 우리 것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고향의 정겨운 것들이 사리지게 된 것은 분명 근대화에 그 원인이 있지만, 시적 화자는 그러한 현실에 반감을 갖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변화된 현실을 긍정하고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화자가 좋아하던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 지금, 즐겁게 ‘노티’를 만드시던 할머니의 옛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생활양식읠 붕괴를 의미한다. 급격한 현실 변화를 접하면서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이다. 이러한 아쉬움의 정서는 근대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삶과 문학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특징과 관련해서 이 시의 율격을 살펴보면, 이 시는 음수율과 같은 눈에 띄는 정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나, 소리 내어 읽어 보면 한 행이 4음보로 낭송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4음보 율격은 3음보 율격과 함께 우리 시가의 대표적 전통 율격인 바, 주요한은 「불놀이」 같은 근대적 자유시를 추구하면서도 민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의도로 이 같은 전통 율격을 사용한 작품을 창작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주요한(朱耀翰)
별칭 : 송아(頌兒), 송아지, 송생(頌生), 낭림산(狼林山)
1900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1918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등부 졸업
1919년 시 「에튜우드」를 『학우(學友)』에 발표
문학 동인지 『창조』 동인
1925년 중국 상해 호강대학 졸업
1929년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1933년 조선일보사 편집국장. 전무
1945년 해방 후 문단 활동 중단
1980년 사망
첫댓글 추억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쉬임없이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