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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아제 聞中표류기-세번째
*기억하고 싶지않은 추억들<본편부터 부제 첨부>*
옛 기억을 더듬는 것 어쩌면 좋은 추억만 있으련 나쁜...감추고 싶은 기억도 꾀 많다~줄거리 배열 무시하고 문장 형식에 구애받음 없이 내방식대로 쓸 요량, 그리고 내 과거사 들은 좀 이색적 남다른데 가 많다고 스스로 그리 여기고 있지 다 까발림은 가족 존심 상 할 꺼리 도 많고 돌아가신 부모님께도 당연 불효, 하지만 냉정히 가감히 용기내서 솔직한 고백성 자서전이 되게끔 흔들 것 이다
전13,싸이트(전병근)서 대충 밝힌바있는 나의 소시쩍 가정사 중에서 괴팍한일이 아주 많은데 그중 특별난 우리가족의 移事이야기를 빼곤 넘어갈수가 없을 것 같다 때는 바야흐로 내 나이 만3살 생일 하루 앞둔(집나이4살)1951년 초봄, 너무 어린나이 기억 인데도 기특할 만큼 아직 생생한 그예기부터 주섬거려 보면
문경경찰서 뒷쪽 집마당 한복판에 깊은샘이 있는 단독주택(방두칸,부억1칸)의 마루위에서 1951년,3월18生 십수년전 수원에서 고인이 된 셋째 동생 낳는 장면을 목격케 되는데 예천에서 오신 두분할매(親,外)가 뒷바라지를 하시고 그날따라 아주 포근 따슨날로 기억되고 반쯤 열린 안방문사이로 동생의 탄생소리 요란했고 그때 난 만1살이 같넘은 아장아장 둘째동생과 우물카바(나무판데기 로 만든)반만 덮힌 샘위에서 두넘이 두발을 겁 없이 우물쪽으로 내려트리고 저아래 비춰지는 사진같은 본인들의 우물속 영상을 손짖하며 감상?하다가 바라지 하시던 두할매 기절초풍 꼴깍 단명 하시던것과 이튿날 생일床에 남동생 봤다고 큼다큼한 조기반찬 올라...
1,4후퇴 가을쯤,꼰대께서 지리산공비토벌부대 합류차 발령을 받고 먼저 남원으로 떠나시니 남편속情에 안달이나신 우리어매 우찌우찌해서 젖먹이까지 셋을 대동, 전라도 남원 대성여관8호실에 또아리를 친 것이 내기억속의 첫이사 였던거라.... 그냥 일시 방문이 아닌 여관살림 그자체가 보따리 유랑의 시초가 아닐랸지... 그여관집딸이 18세쯤 부모님 살으실제 사진이 존재했던게라 얼골이 또렸 했었지 셋째를 엄청 귀여워해 눈에 넣고 다녔던기억이 있고 그때 내노래와 미모에 반해 전라도말씨로..“오매 이뻐 죽겠서라~” 연발 볼을 두드려 어린맘에 흐흠,우쭐~
그후 다시 꼰대의 문경경찰서 복귀명령은 겨울지나 어느새 이듬 아카시아필 무렵 경찰서뒷길 돈달산쪽 길옆 과수원집에 두 번째 이사를 그동안 사람이 안살아 썰렁 했던 기억있고 사과밭에 윙~윙거리는 벌들과 정이 채 들기도 전 꼰대는 난데없이 뜬금없이 경남 고성 당동지서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 경찰행정는 아마?똘아이? 어쩌겠나? 죽어도 가기싫은 나를 오천큰집에 재차 맡기고 오매랑 동생둘은 따라...
625전쟁이 발발하던해 아장걸음 나를 예천 호명 오천 큰집에 한번 맡낀바 휴전후 또 부모와 떨어진다니 어린마음에 큰집이 왜그리 싫었던 크다큼한 큰집의 기억들 동갑내기 사촌과~니 집에가!`싸움질,예천농고 큰형의 기타를 몰래 쳐보다 된통따귀를 불나게 맞은일, 몰래 감홍시 먹여주시던 할매~고부갈등,부엌데기 누나의 포근함, 발가숭 소나기속을 동갑 사촌과 뛰던 추억,동내형 들과 과채소 곡식서리 추억, 그중 19세 수리조합 양수펌프장에 근무하였던 中형님이 感電死한 것이 기억킨다
훌쩍 세월 어느날, 당동지서에서 순사가 날 데리러 온 것이 복권당첨인 듯 기뻣고 들떠 점촌역앞 에서 간만 귀하게 산 풀빵봉투를 꼭 부등켜줘 차창을 옆에 했으땐 봉다리 위만 남고 밑은 찢어져 다흘렸으니 그 서러움 말로 다하랴 생전 처음타던 점촌발 김천행 열차, 열린차창에 목을뻬보니 분명 화통기관차 두 대가 끌고간다
중신기 고개를 힘차게 넘어서는가~ 함창까진 냅다빼는 열차의 매력에 이쯤부터 아마?내 오입기질이 잡혀같든게 아니었을까!?석탄연기가 달콤했었다면 거짓말까 백원을 지나 상주까지 제법 치치포폭 신바람에 제자리 엉덩뜀뛰기로 표현되고
상주에서 한참을 머물던 어서가자!~내기차는 다시 옥산 청리,지나니 다가닥~닥! 달리던 바퀴소리가 슬슬 뚜걱거려 느려지고 드디어는 문난칸쪽에 여럿 붙은 승객들이 내려 걷는다 기차보다 걷는것이 더 빠른광경도 어린눈에 신기해 닿고 잊지못할 첫기차여행에 지긋 눈감고 그때 생각에 취해 이것이 流浪의 첫신호이랴
김천역,망사줄능금,수많은 잡상들의 외침속에 노리까이 늦은 부산행열차에 몸을실고 동행순사 아찌가 저녁밥겸 사준 꼭쥐어 졎어무른 통김밥 허겁맛나게 물어뜻었지러~ 쾌달리던 밤열차 왜관,대구를 하염없이 왜서있드냐 어린마음,앞선마음,알까 모를까 한참을 우르릉 긴굴지나니 청도역,또 고구매 밤참을 구해온 고마운 순사아찌
개딴 어린눈이 휘둥구레 생소한 청도의 밤, 눈에 뵈는 사람도 까맣고 驛舍도 까매 온통 까만기억뿐 양쪽옆으로 씨꺼멓 도열한 화차들 그위 늘어뜨린 포탑의 탱크들 이튿날 새벽녘 썰렁한 밀양역을지나 삼랑진에 도착하니 왠군인아찌가 그리많던지 어찌 마산까지 왔는지는 잘몰라 먼짖길 충무행 버스타고 하매나 당동엘 도착했다
군헌병대 근무했던 큰외숙도 와계신 일본적산가옥 관사에서 그립던 부모님 동생을 눈물범벅으로 부등켜 상봉하고 인근 횟집 상봉기념회식을 하든데 숭악하게 내륙 촌넘인 내가 워떻게 회를머겅?초장만 실컷훌쳐 먹고 밤새 물켜 한강 오줌싼 기억, 여기 또렸기억 하나더 있으니 지서관사가 바닷가라 뒷 화장실구조가 밑은 바닷바위, 높다란 기둥세워 널빤지에 작은구멍내어 똥이 바로떨어지니 밑구녕 어디서 돼지새끼 꿀~꿀나타나 똥을 맛나게짭짭!?~그것뿐이랴 작은빵게 여러마리까지 우글이며 내똥을 탐한다 이크!~이게뭐냐! 촌넘 놀래 신나 똥은 들어간지 오래고 오매가 걱정소리로 종태야~똥을먹나!?뭐하노!?들어가며 생소한 광경에 취해서 정신없었던 추억에,..
어느듯 이듬해 꼰대께서 또 고성소재 개천지서로 전근을 가시니 무척 사람드문 산촌, 작고 예쁜 적산가옥 지서관사 다다미방, 방한가운데 숯불터,잘꾸려진 관사정원,언듯 이제 어린맘에도 옮겨살이 재미를 들이고 있지않은가!?생각하면 가당치가 않았다 여기서 1년 빨리 개천국민학교엘 입학하게 되는데 가만봐라!?이사가 몇 번 흘런지럴~ 자타가인정,총기좋은 내가?여기서 1학년을 우찌 다닌지 기억에 통없고 다만 유명사찰 옥천사 절을 초파일날 가족과 다녀온 기억과 꼰대 자전거 뒤에서 떨어져 다친 것 뿐,
고성소재지 보다 진주로 나가기가 수월은 개천은 그야말로 실개천이 널렸고나 벌써 배가 남산많한 어매를 편케해 드리려 동생둘을 데불고 논물대는 똘다리 끄티에 세넘이 걸터앉아 하염없이 흐르는물을 바라보다가 막내가 어질 앞으로 꼬라 첨벙!~ 물속을 헤엄치듯 시늉에..깔깔 웃다가 어라? 이게 아니다 싶어 내딴에 건질거라 물에 들어가는데...나도 센물살에 같이 떠내려 간다 햐이고! 난리났구나~배부르게 물먹었고 천우신조 다행히 논에 물을 보러 나오든 청년에게 다들려 생쥐새끼 건져올린꼴에 둘째의 부모님전 경과 증언이가관!~형과동생이 물에 들어오라고 손짖을 하드라나~
얼마후 퉁퉁신장염을 몹시 앓던 둘째가 진주도립병원에 腹水빼러 빨빵 들락 이다가 만삭의 어매 품 에서 눈물로 한많은 세상을 등지고 잔뜩취한 꼰대가 나를 대동하고 국민학교뒷산 공동묘지 양지별로인 곳에 동생을 뭍게 되는데 땅을 파며 꼰데 말씀, 어린 나에게 동생무덤자리를 단디 기억하거래이~왜냐!? 지금 생각에 그날도 슬픔에 잔뜩 술초를 친 꼰대의 붉은코와 홍시내음을 기억하기에 내가 절대 잊을랴..아무렴! 그후 성인이되어 군인시절 그곳을찾으니 아나 살찐아! 찾을길이 전혀 없었고,...
둘째동생이 간지 삼일만에 넷째 여동생이 관사에서 숨풍! 축복없이 탄생했고 아들베리고 딸 얻었다며 핏덩이때부터 어매의 원천 미움을 샀던 마음 아픈 추억, 그래도 여동생 커가는 과정에 무척 예쁘고 여럿 뭇사람들께도 귀염도 받았었지 그러나 오매로부터 아들잡아묵고<어매의표현>난딸이란 미움받이로 다클 때 까정 오매의 스트레스 덩어리 웬수같은 오명으로 참서러운 처녀시절을 겪었었다 두고두고 이 맞이 오래비의 恨으로 와 닿는다 하지만 인생사 아이니컬 하게도 어떻게 진주 서방님을 맞아 지금 진주에서 노래방 경영 오순도순히 잘도 살며 얼마전 첫딸을 시집 보낸바 작년이 환갑이었다 얄궂은 운명이여~각설코,
시방부터 정말 어처구니 없었던(적어도 내생각에)유랑아제의 초등학교 전학편력을 細細전개 한번 해보자~선친께 외람된 생각인진 몰라도 그때 꼰대 순사란 직업이 시쳇말로 웃기는 짬뽕같아 꼰대 월급수령날은 어매와 같이 지서트럭(쓰리코터)타고 진주시장에라도 나가려치면 시장상인들에 거의 칙사 대접 요란스럽던 기억이 나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꾀 대접받는 사모님과 그자제 였으니 월급날 돈봉투 거머진 우리 어매는 군데군데 외상값도 값고 차에 가득찰 정도 먹꺼리를 싸장만 하시니,..
얼마후 동생 무덤잔디도 돋기전 경북 영덕경찰서(2급)사찰계장으로 발령난게 아닌가 지금 곰곰 생각하면 거의 일년에 두 번 정도는 부모님때 부터 역맛살이 있던거같아 벼락 이사후 일학년 후반부는 낮선 영덕국교의 추위 땜빵핑계로 영덕 경찰서 옆 후미진곳 여관생활 실~실 자습 세월 보내고 어느 봄날 경찰서 반대쪽 멀리~ 영덕 오십천냇가쪽 초가 마당 넓은 아래채집을 세내어 쪼기리 이삿짐을 풀어 놓는다
난 영덕국민학교2학년에 편입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말썽없이 학교생활을 잘~한걸로 알고있지 부모님 시장심부름도 잘하고 동생들도 잘 돌본 기억이 있다 영덕 오십천 냇가 오매와 이불빨래 밟으며 거들다 커다란 민물장어를 이불보로 덮어 잡던추억,쪼고만게 간이 컸었던가!?뇌물로 들어온 커다란 방어고기를 어매를 도와 토막을 치든기억,2학년 어린넘이 애비빽 믿고 약해보인 3학년 형을 때려보고 학교가 멀리있어 꼰대 자전거로 거의 매일을 등교하던 기억도 새롭구나
1년후,드디어냐~또냐~난 공부나 했는지 학교를 다니긴 했는지 정신줄 놓은새 문경경찰서 사찰계장(그당시 2급署 경사가 계장을 맡기도함)으로 재발령, 드디어 기차로 떠난지 4여년만에 점촌에 당도하니 제법 흥청이던 시내모습을 기억하고(아마 문경씨멘트 공장과 탄광때문?) 이사간 첫날에 대뜸 이름모를 중국집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으러간 거 생각부터 난다 참 신났겠다!~
여름 막바지 였던때 꼰대는 날 데리고 호서남학교 엘 전학서류를 넣으러 갔다 그당시 결격사유가 있든 없든 학교 교장님은 항상 웃으며 통과~사찰형사의 敎係에 미치는 턱없는 위세?는 어린 마음에도 든든 하였던게 아닐까~글쎄!~
그러나 호서남엔 험상궂은 넘들이 있었던걸 눈치를 챘나!?가기싫차 방학때라서 어매 지갑 털어 대구 외갓집 向해 시외뻐스이른 첫차로 토사이를 놔 버렸나니 생전처음 내뺐던 오입이라 기억이 뚜렷하고 외할머니 외숙모를 능란하게 쏙이고 먼지풀풀 나는 대구대명로 극장구경 하려 다니니 어린나이에 하매 발랑 까지고 아마도 전학을 하면서 뭇시선이 두려웟던 컴프렉스가 이때부터 생긴게라 여겨진다 오매지갑 턴돈으로 신기한 구경꺼리 대구시내를 온종일 활보하며 재미를 낸 그후,
이런!가을에 호서남 학교를 가야 하는데 꼰대께서 또 전근,안동으로 가신단다!
그냥 오매와 같이 점촌에 정착, 학교를 다녔 더라면 내생활이 많이 달랐을께라 오매는 죽자고 서방님곁을 하루도 떠나선 살수없었다니..도깨비 살림 또 옮겨요!
오매의 서방님 사랑 그리고 아마 꼰대의 계집질 편력 땜시라 여겨지는데 지금 생각해도 자식교육 따윈 아랑곳 않은 어매의 집착에 혀가 둘려지지러 어쩌면 나의 유랑인생은 이때쯤 결정적 계기가 되지않았나 여겨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글의 전개가 지루고루 하지만 내딴에는 이래 할 수밖에 더훌륭한 글 재주가 없으니 친구님등께서 해량하시고 다음 네 번쩨 이어지는 안동의 이야기를 기대해 ...
모처럼 경주에 소낙비가 아침부터 나려 기분이 엎!된 유랑아제,
♬ Anak (아들아) / Freddie Aguilar (프레디 아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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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맛깔나게도 쓴다.
좋다.
참 좋다.
근데,
우예 기억력이 그리 좋노.
나는 대구 달성공원 수영장에서 수창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하던 그때부터 기억나는데...
참으로 기억력도 좋으네 그
어릴적 일들을 글로 남길수있으니 대단하네
건강도 잘 챙기시게나 유랑아제여....
유랑한 세월이 언젠데...
아직도 생생한가?
기억력 참! 대단하셔! 그래서 '유랑아제'가 되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