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글밭] 2020.06.29(월) '놓친 백범 김구의 죽음'
엊그제인 6월 26일, ‘마음을 열고’라는 제목의 글밭을 일구었읍니다.
‘함께 못할 사람’이라고 선 그은 일을 지켜보며 너무도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너그럽게 안아도 좋을 듯싶어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았던 것이지요.
그러느라 이 보다 더 아픈 ‘역사적인 슬픔’을 간직한 날을 잊고 말았읍니다.
지금부터 71년 전인 그날에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되었던 그 날을요.
아주 젊었을 때 ‘백범일지’를 읽고, 그야말로 큰 감동을 받았읍니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살았던 백범의 삶에 그저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읍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범의 삶을 살피고, 배우고 결국은 따라갔던 오늘까지입니다.
그 과정에서 백범 암살에 얽힌 사실을 알고, 받았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백주 대낮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분노’는 지금까지 식지 않으니까요.
어떻게든 이런 못된 놈들을 혼내 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으니까요.
그래서 너무도 당연히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가 나타난 것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이런 ‘오늘의 나’가 있기까지 맨 처음으로 먹었던 된 마음임을 고백합니다.
백범을 사랑하는 만큼 1965년 12월, 끝내 약속을 지킨 ‘곽태영의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백범을 사랑하는 만큼 1987년 3월, 끝내 자백을 받아낸 ‘권중희의 끈질김’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백범을 사랑하는 만큼 1996년 10월, 끝내 때려 죽인 ‘박기서의 정의봉’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백범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으로 숨을 거둡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받쳤던 백범의 삶은 분단을 넘어 통일을 꿈꾸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숨을 거두기 1년 전쯤인 1948년 4월 19일, 북으로 떠나는 날에 남긴 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내 몸을 지키자고 남한에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가는 길이니 막지 마라.
오늘이나 내일이나 당신들, 젊은이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요.
한때 이승만이, 박정희가 ‘돈의 얼굴’로 삼았던 때가 있었읍니다.
맨 처음 탄핵을 당하고, 대통령 자리를 훔치고, 독재를 하다 쫓겨난 이승만인데 말입니다.
광복군을 죽이고, 끝없이 변절했던 기회주의로, 독재 끝에 총 맞아 죽은 박정희인데 말입니다.
촛불 민심은 백범 김구를 다시금 살려 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먼저, 늘 사용하는 ‘돈의 얼굴’로 백범을 살리자는 말씀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나라의 자존’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백범의 얼’을 살리는 기념사업에 ‘나라’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때입니다.
끝으로 백범일지 중에 나오는 ‘나의 소원’의 두어 대목을 가져 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의 돈‘ 꿈을 꾸며 다시 시작하는 월요일 새벽을 힘차게 열어 갑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첫댓글 어제는 하루 종일 편하게 쉬었읍니다.
아무 생각도 없지 그저 쉬기만 했지요.
아무 생각이 없다고는 했지만...
어찌 생각이 없을 수가 있으리오.
그러니까 다른 때보다는
많은 생각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인가... 마음은 평화속을 헤맨 셈입니다.
그래서 늘하던 버릇대로요.
오늘도 어김없이...
어두 컴컴한 한 밤중에 눈을 떴읍니다.
그리고 글밭을 일구었지요.
잠시 지나쳤던 백범의 죽음을 가져 왔읍니다.
결코 지나쳐 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범 김구에 대해서
늘 하던 생각들의 한 자락을 글밭에 담았읍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