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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묵상글 ( 연중 제33주일. -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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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17 01:26
-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종말과 심판의 때가 옴을 얘기합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누구나 죽듯 종말은 누구에게나 오고
심판도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오늘 주일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런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오늘 것은 종말인가? 주님인가?
이쯤 얘기하면 이미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잡히시겠지요?
많은 사람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생을 끝냅니다.
그렇게 많은 죽음을 보면서도 자기의 끝은 멀리 있는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종말이 임박해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종말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무관심한 것입니다.
무관심이란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관한 마음이 없는 것’이 무관심인데 죽음에 관한 마음은 없는 것이지요.
다르게 얘기하면 무관심이란 죽음에 관해 진심이 없거나 진심이 아닌데
인간이 어찌 죽음에 관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안 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닙니까?
강 건너 불 보듯이 하지만 실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거나
보면서도 못 본 체하거나 정면으로 직면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나이 먹어서 또는 병이 들어서,
서서히 또는 갑자기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죽음이 덜컥 내 앞에 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이 이렇게 덜컥 오는데 신앙인은 어떻게 다릅니까?
죽음이 안 옵니까?
죽음이 덜컥 오지 않고 부드럽게 옵니까?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런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죽음이 오지 않고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죽음과 함께 주님께서 오시거나
오늘 주님 말씀처럼 종말의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도’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나도 그리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라는 표현이며,
신앙인인 우리도 예외 없이 종말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문 가까이 온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덜컥 문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던 주님께서 오셔서 부드럽게 문 두드리시는 것을 듣고는,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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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오, 예수님. 거룩해진다는 건 얼마나 쉬운지요. 선의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영혼 안에서 매우 작은 선의라도 발견하시면 서둘러 당신을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때는 영혼의 잘못도, 넘어짐도,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매우 관대하시며 아무한테도 당신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히 머무는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성녀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거룩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약간의 선의에도 조건이 붙으면서 주님의 활동을 가로막아 자기의 거룩함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됩니다.
악습에 빠진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에 대한 비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먼저 비판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비판할수록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를 위해, 비판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비판이 아닌 상대방의 좋은 점을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성호경으로 주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성호경이 힘든 기도일까요? 성호경 하는데 5분에 걸쳐서 해야 한다면 힘들다고 인정하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5초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까? 이 조금의 선의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서 거룩해지게 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선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얼마 안 있어 끔찍한 일들이 자기들 주변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 말씀에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 어디서 일어날 것이며, 특히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우리의 선의를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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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따뜻함을 나누면 서로의 마음이 맑아져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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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오늘의 기도>
낙엽이 우수수 지는 11월의 늦가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데”(히브 10,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히브 10,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 10,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발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마르 13,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마르 13,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무화과 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마르 13,28)
주님!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입니다.
오늘의 결별에서 새롭게 변형되게 하소서.
오늘의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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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전 생애를 통하여 천국갑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영생의 희망으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천국과 지옥 중에서 어느쪽이라고 생각 하시나요? 예, 다행입니다. 천국을 갈망하고 살아온 은총이 열매 맺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13,27).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끝까지 믿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12,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죄우한다’는 광고문도 있었지만, 믿는 이들의 순간의 선택은 영원 생명과 직결됩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릴’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늘 긴장하게 만듭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면 하필 그때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리 준비된 사람은 구원의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세상의 대이변을 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의 종말이든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고, 지금이 은총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구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차동엽). 이 순간을 통하여 미래가 옵니다. 그 때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마르13,24) 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3,13-15).
나중에 지옥 갈까 봐 두려워하는 분이 계시나요? 그러나 지옥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며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요즘은 입시지옥, 취업 지옥, 지옥같은 부부생활, 생계 지옥, 솔로 지옥, 지옥 쭈구미, 지옥같은 경제위기에서 살아나는 방법, 지옥이라는 참담하고 어려운 것을 표현합니다. “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겠습니까? 지옥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과의 단절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심판입니다.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2,13). 지금 지옥을 만드시나요? 천국을 가꾸시나요?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았는데 죽어서도 지옥 간다면 너무 화나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천국 모두 갑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중에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13,31). 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읽지 말고 나의 구원을 위한 말씀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천국을 바라시는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십시오.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하늘을 살게 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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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착한 목자의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품아(세상을 품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8년 명성진 목사님은 학교를 나와, 세상에 버려진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학생들은 소년원엘 들락거렸고, 본드를 흡입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고독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명성진 목사님은 우연히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경찰서, 법원을 다녀야 했습니다. ‘중독은 중독으로 치료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고, 음악 공연을 했습니다. 자전거로 몽골 여행을 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습니다. 목사님의 진심을 본 학생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튕겨 나온 학생들이 이제는 세상을 품은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전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는 바퀴가 있고,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학생들이 ‘믿음과 희망’의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과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목적을 잃으면 멈추게 되고 멈추면 자전거처럼 넘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1988년, 지금부터 36년 전에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돈 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만든 청소년 자립 직업 학교였습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청소년들이 찾아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들이 왔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청소년들을 모아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것이 살레시오 수도회가 되었습니다. 1988년 군대에서 제대한 저는 복학 할 동안 돈 보스코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성소국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돈 보스코 센터에서 ‘선반, 조립’과 같은 기술을 배웠습니다. 주일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미사도 드리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주일에는 학생들과 함께 방송통신고등학교에도 갔습니다. 저는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학생들을 위해서 헌신하던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때 했던 영어 공부는 복학해서 대학원 시험 볼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20년 후인 2008년 제가 본당 신부로 갔던 본당에서 그때 돈 보스코 센터에서 함께 했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결혼해서 세 아이의 아빠가 돼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청소년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0년 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한다고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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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무화과나무를 보아라.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빗대어 요즘이 이런 날들이 아닌가 합니다. 나뭇잎에 붉은 물이 들고, 조금 있으면 바람이 불어 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말합니다. ‘겨울이 오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앞으로 무엇이 올지 알아차리듯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날도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하여라.’라고 말입니다.
모래시계 아시지요? 우리 삶이 모래시계와 같지 않을까요? 태어남과 동시에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웠습니다. 모래시계는 아래로 흐르기만 합니다. 다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태어남은 동시에 죽음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 대림을 앞둔 시기에 죽음에 대한, 종말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실까요? 다음 달이면 성탄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달려갑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로 달려갑니다. 그러니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니까, 종말이 다가오니까 다 버리고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을 포기하라는 말도, 무기력하게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날은 아버지 하느님만 아시니까, 그날이 내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니 열심히 웃어주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늘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매일매일 열심히,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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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관심 없는 다육이
사실 저는 꽃이나 화분 선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키우면 다 죽더라고요.
동물도 그렇지만 식물도 정을 주고 키우다 죽으면 슬퍼집니다. 특히 ‘내가 뭘 잘못했나?’하는 자책으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화분 선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 년 전 선물 받은 다육이가 있습니다.
선물 받았다는 것도 잊을 만큼 바쁘게 지내다 갑자기 다육이가 생각났습니다. 두리번두리번 다육이를 찾았습니다.
누가, 언제, 왜, 구석으로 다육이를 옮겼는지 모르겠지만, 다육이는 사무실 구석에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잊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듯,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가끔은 관심을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너무 많은 관심은 누군가를 숨 막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관심이라는 것은 적당한 거리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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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키엣 대주교님.
오직 십자가의 길
그 옛날 로마의 지하 묘지에는 죽음과 투쟁하듯 살았던 많이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3 세기 동안 주검 옆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바오로와 베드로 성인께서도 그곳 어디에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비한 것은 서슬퍼런 권력을 지닌 제국 로마의 왕들은 자기를 방어할 어떤 무기도 없는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소멸시킬 수 없었습니다. 300년 동안 수많은 왕들이 죽었지만 믿음의 씨앗은 이렇게 깊은 지하 무덤에 묻혀 섞고 섞어 다시 꽃으로 피어나 열매를 맺었습니다.
1600년대 베트남에 복음이 전파된 후 300년간 지독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박해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족을 뿔뿔이 이교도 집에 보내기도 했고 뺨에 인두로 “사교”라는 글씨를 새기고 다니게 했습니다. 또 박해를 피해 깊은 밀림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붙잡혀 옥사를 당하거나 참수를 당하고 사지가 찢겨 나가는 죽임을 당하고, 코끼리에 밟혀 죽는 형을 받거나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는 형벌도 받았습니다. 망나니에 의해 숨이 멎을 때까지 살을 한점씩 베어내는 잔인한 형벌도 받았습니다. 그 결과 10만여명의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지금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10만여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되어 이제 6백만여명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로마 지하동굴에 묻힌 그리스도의 씨앗이 이곳 베트남에 전파되고, 베트남 순교자들의 믿음의 씨앗이 섞고 썩어 다시 꽃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녀들은 십자가 길 외에 어느 길도 갈 수 없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볼수록 주님의 말씀을 믿게 됩니다.
비록 지금 나의 믿음이 흔들리고 점점 사라져 갈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굴욕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처럼, 끝내는 십자가위에서 고통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자녀라면 십자가 길 외에 어느 길도 갈 수 없습니다.
그 옛날 견고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 내신 그분들처럼, 우리의 시련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함을 알고,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더해진다는 걸 안다면 우리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풍성한 수확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순교성인과 순교자분들께 기도드립니다.
저희가 숭고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만을 믿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이 땅에 교회가 생긴 후부터 수 많은 박해를 받았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교회를 지금까지 존재하게 하는 힘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한국과 베트남에 복음이 전파된 후 수 많은 시련과 박해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3. 나의 주님에 대한 믿음과 나의 믿음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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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난을 사랑합시다
<가난하나 존엄한 품위의 삶>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 제33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정한 ‘제8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아마 오늘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실 것이며 점심식사에는 매해 하는 것처럼 올해도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1천여명을 초청해 함께 식사할 것입니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교황이야 말로 현대판 예언자입니다. 교황의 엊그제 예술가들에게, 어제는 젊은이들에게, 도서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도 멋졌습니다.
“너희는 하느님 창조활동의 협력자들이다.”
“삶에서 결코 물러나지 말고, 계속 꿈을 키워라.”
“너희 도서관이 만남의 오아시스가 되도록 하라.”
올해 교황 담화문의 주제 성구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집회21,5참조)
바로 이 담화문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 파도바의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인 2024년6월13일에 발표했습니다. 가난을 사랑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이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주님의 참행복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루카4,18ㄴ) 역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실 때 맨 서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황의 올해 담화문중 감동적인 부분을 소개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구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겸손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는 겸손한 이입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덕이 있으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의지가지없는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힘을 얻고 그분께 모든 신뢰를 둡니다. 기도의 진정성은 애덕 안에서 확인됩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인간의 본질은 미사시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한 가난한 빈손의 행렬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늘 대할 때 마다 감동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흡사 너나할 것 없이 하느님앞에 줄서있는 가난한 거지들같습니다. 담화문에서 인용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의 유엔총회에서의 연설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난한 수녀일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 마음에 당신 사랑을 채워주십니다. 그리하여 저는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가난한 이에게 그 사랑을 전해 줍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여러분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알아봅니다.”
끝부분에는 베네딕도 요셉 라브로 성인에 대한 내용도 각별한 감동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로마로 순례를 온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가난한 사람들 가운에서 가난하게 지내면서 성체앞에 기도하고 묵주기도와 성무일도를 바치며 신약성경과 준주성범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방랑자로서 정주하는 곳 없이 콜로세움 폐허의 한 귀퉁이에서 잤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기도였습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도 긴 여운으로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바뇌에서 발현하시어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다.’라는 잊지 못할 메시지를 남겨주신 지극히 거룩하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이 여정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을 사랑합시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정결을 사랑하라, 단식을 사랑하라, 거룩한 독서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수행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가난을, 겸손을 기도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선비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된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을 대변하는 이 말마디처럼 존엄한 품위의 가난을 살았던 옛 선비들의 삶이 참 그립습니다.
영정조 시대 추사 김정희를 보완하며 오히려 능가한다는, 또 겸재 정선을 보완하며 능가한다는, 평생 가난속에 살았던 시서화詩書畵의 대가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이 아내를 잃고 바친 제문이 너무 아름다워 길다싶지만 전문을 소개합니다.
“아아! 내가 세상과 맞지 않아
궁하게 지내기로 맹세했건만
자질이 순수하지 못해
도道에서 멀었지요.
숙인淑人은 나의 아내이면서
나의 사우師友이기도 했지요.
나의 어리석음 깨쳐주고 슬픔을 위로했거늘
그 낯빛은 순하고 말씨는 순후했지요.
이 때문에 내가 치욕을 면할 수 있었거늘
내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숙인이 부지런히 힘쓴 덕분에
나는 집안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굶주려도 책을 팔지 않았고
추워도 꽃나무를 때지 않았지요.
시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나의 오활(迂闊;사리에 어둠)함을 열어 주었지요.
이따금 내가 산수에 노닐 때면
기분이 좋아 글이 번드레해졌지요.
돌아와 내가 글귀를 들려주면
문득 충고하며
말이 화려하면
도道가 높지 못함을 일깨워 줬지요.
규중의 즐거움이
옛 도에 있었으니
나의 두엇 단아한 벗은
우리의 금슬을 익히 알았지요.
아아! 여자가 훌륭한 건
크게 슬퍼할 일이외다.
지아비가 슬기롭지 못하니
누가 그 훌륭한 행실을 자세히 전하겠습니까.
숙인은 정숙하고, 굳세고, 따뜻하고, 은혜로워
타고난 본성을 잘 지켰으며
사리에 맞는 온갖 말들은
고인古人의 말을 끌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정성스레 내게 한 충고들은
당신의 죽음과 함께 가려져 버릴 테지만
차마 사사로움 꾸밀 수 없어
당신의 일을 적지 않습니다.
아아! 농사짓기는 갈산葛山이 좋고
낚시하기는 구담龜潭이 좋거늘
거기서 살자던 당신과의 약속
그만 무덤에 묻고 말았구려
머리는 희어지고 마음은 끊어질 듯해
남은 생을 슬퍼합니다.
아아! 내가 영결하는 말을 하니
그대는 길이 슬퍼하지 마오.
말을 가려 하고 병을 조심하며
사귐을 끊고 화려함을 거두어
끝내 도道에 돌아가
경전으로 자식을 가르침으로써
그대의 마음을 따르겠다는
내 진실한 마음을 고합니다.
아아, 슬프외다!”<능호과 이인상 서화평석 2서예,648-651;박희병>
제 강론에 이렇게 긴 글 인용하기는 처음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평생 극심한 가난중에도 끝까지 고귀한 품위를 지켰던 지어미의 삶이 너무 아름다워 그 지아비의 제문을 고스란히 인용했습니다. 이인상이 맘놓고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의 높은 덕임을 깨닫습니다.
도道는 말씀이요 진리요, 도를 통해 하느님은 옛 조상들을 이끄셨습니다. 도에 충실했던 옛 선인들, 그대로 다니엘 예언자의 말씀에 해당된다 믿습니다.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바로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빛났던 성인, 성녀, 군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가난에도 불구하고 창공의 광채처럼, 별처럼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말과 같은 혼란이요 작금의 현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모두이자 길이요 희망이신, 구원자이자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삼 떠오르는 “2027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 성서 모토, 요한복음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그러니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희망의 그날을 앞당겨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의 현실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난중에도 우리 모두 깨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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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불어함께>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
믿음의 벗이여
우리를 흩트려는
돈과 권력 그리고 스스로를
섬기라는 무리들을 거슬러
우리는
오롯한 믿음으로
더불어함께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심으신 믿음만이
온 누리를 이루실 그날은
이미 믿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우리는
늘 그렇듯 이렇게
더불어함께입니다
희망의 벗이여
우리를 흩트려는
무기력하게 제 자리에나
있으라는 무리들을 거슬러
우리는
새하얀 희망으로
더불어함께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안기신 희망만이
온 누리를 이루실 그날은
이미 희망하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우리는
늘 그렇듯 이렇게
더불어함께입니다
사랑의 벗이여
우리를 흩트려는
무관심으로 제 살길이나
찾으라는 무리들을 거슬러
우리는
뜨거운 사랑으로
더불어 함께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건네신 사랑만이
온 누리를 이루실 그날은
이미 사랑하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우리는
늘 그렇듯 이렇게
더불어함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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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3주일이자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가난에 대해 묵상하고 합니다.
브라질 상파울로 아른스 추기경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들의 염원이 무엇인가, 종교에 관해서 하느님에 관해서 교회에 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가난한 사람들 한테서 배우면서 다음의 체험을 얘기합니다.
“내 자신이 10년 반을 브라질 빈민가에서 살았다. 일주일의 사흘은 토굴 같은 골방에서 지냈는데 그곳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대학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지상에 내려온 제2의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만들며 성서 말씀의 구체적으로 실현케 하는 존재이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살 때 비로소 참 가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 가난에 알맞은 일과 특히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현존할 때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과 존중심을 지닌 연민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은 부동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 모든 신앙인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참된 가난, 즉 내적인 영의 가난에 대해 관상을 하게 됩니다.
내적인 영의 가난은 우리의 마음을 이 땅과 지상의 재물, 지상의 안락, 지상이 줄 수 있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두면서 하느님을 찾고 소유하며 재물이라는 유혹에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킵니다.
참된 가난은 감사를 주고 받는 것, 우리가 쓸 필요가 있는 것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된 가난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 척하고 청하지 않는 척 하면서 모든 것을 구하려고 애쓰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전혀 감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적 가난이 없는 곳에 겸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서로의 봉사를 기초로 하는 신앙 생활도 무너지고 맙니다.
영의 가난은 주님의 영에 좌우되는 삶이며 신앙생활의 원동력입니다. 무소유의 가난, 모든 영역을 총망라 하는 포괄적이고 완전한 참 가난입니다. 특별히 ‘세계 가난한 맞아 영의 가난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점이 되고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우리 또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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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란치아노(Lanciano)의 대주교이자 오르타나(Ortana)의 주교
번호: 06/L/ x x 1
이 곳에 서명자 나 란치아노의 대주교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성찬의 기적이 일어난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곧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는 란치아노 성당에는 세기부터 성찬식의 성체가 명약관화하게 살과 피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확인한다.
그 성체축성의 기적은 성 레곤찌아노 성당에서의 한 미사동안에 일어났는데, 오늘날 위에 언급한 성당이 높이 솟아 있다.
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위에서 말한 성스러운 유물을 전문학자들을 통해서 의학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몇 달 간을 연구했다. 이 학문적인 조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실제 살과 피가 문제가 된다.
2. 물론 이 살과 피는 어떤 한 사람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3. 이 살은 심장의 활동조직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4. 이 살과 피는 같은 혈액형을 지녔다.
5. 오늘날의 혈액이동에서처럼 결합표에 의해 이전이 가능하다.
6. 이 살과 피는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다.
본 서명자는 방금 기술한 사실이 진실임을 보증한다.
대주교이자 주교인
파치피코 페론토니(Pacifico Perontoni)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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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분노는 언제나 도움이 될 수 없다)
- 분노는 언제나 도움이 될 수 없다 -
그 자매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이상 당신 방에 찾아오지 않을 때,
당신은 분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당신을 어지럽히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녀에게 동정심을 갖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친절하게 그녀에게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서 그녀를 바라보십시오.
[기도]
사랑하는 하느님,
제 삶에도 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을성이 없는 저는 자주 당황합니다.
자신을 견딜 수 있는 참을성을 주십시오,
주님께서 저를 참아 주시고
제가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사랑하기를 기대하시지도 않음을 압니다.
당신의 도움이 있으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걸 배울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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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구원을 얻을 그날 그 시각까지 /
박윤식 [big-llight] 241116. 19:04 ㅣNo.177662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셨다. 이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한다.
사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과 그분 부활을 선포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세상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그 누구도 모른다. 우리는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될게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려는 거짓 예언자들도 많아질 것이니까.
“너희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처럼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사람의 아들이 아주 가까이 온 줄 분명히 알아라. 이 세대가 지나기 전,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이렇게 그 날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아무튼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종말을 맞는다. 더군다나 내가 원해서 세상에 온 건 아닐지라도,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이 끝날 날이 올 것임은 안다. 살려는 욕구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때를 궁금해 한다. 현대의학이 그 죽음의 세계를 해명하려 노력했지만, 죽음 너머를 분명히 알려 준 적은 없다. 이따금 죽음의 세계를 보았다는 이들의 체험 이야기가 여럿 있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죽음 이전에 일어난 주관적인 이야기일 따름일 수도.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더해 주고자 이곳에 오셨다. 이는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닌, 믿음과 희망을 갖도록 이끌어 줄게다. 사실 종말이 다가올수록 가족이나 국가, 사회와 자연계에 이상 현상이 일어난단다.
기존질서의 변화는 물론, 실제로 달도 태양도 바뀐다나. 그러나 자신이 변화되면 어제 태양과 오늘 태양 은 달라지듯, 종말 역시 이러한 삶의 변화일 수도. 마음이 밝은 날에는 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마음이 어두운 날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듯이. 이는 각자 어떻게 살았는지의 결론이니까.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수 필요는 없다. 이는 자신이 가진 기분이기에.
그러기에 우리는 삶의 중간에서 그 종말의 처신을 지례짐작 판단할 수는 없다. 감정적인 무엇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종말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거다. 누가 인간 삶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건, 단지 우리만의 생각일 게다. 그래서 교회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시작이 종말을 위한 가장 확실한 준비이다.
예수님께서는 해와 달 등에 이변이 생길 때,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 떨치며 구름타고 오시는 걸 볼 것이란다. 이는 그분께서 주실 구원을 위한 재림이라나.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마지막 날을, 구원의 날로 기쁘게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비록 그 날과 그 시각은 모를지라도, 우리는 주위의 수많은 ‘작은 이’와 함께 기쁘게 그분 재림을 기다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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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 연중 제33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교회는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기념하며, 가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난한 이들과 깊은 형제애를 나누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와 가난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습니다(루카 4,18; 19,10 참조).
교회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바로 전 주일에 기념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가난의 깊은 관련성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가난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참되게 거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긴 십자가의 가난에서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면서 가장 낮은 자로서 세상을 섬기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가 되셨듯이 교회도 비우고 버려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 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듯이 교회도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교회 헌장, 8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난을 자기 것으로 할 때,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며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책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간직할 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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