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 큐티
히브리서 10:19 ~ 25
성소에 들어갈 담력
관찰 :
1) 예수의 피를 힘입어 얻게 된 것
- 19절a. “그러므로” => 히브리서 기자는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되심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그의 제사로 말미암아 첫 언약은 폐하여졌음을 변증했고, 둘째 언약이 세워지게 되었음을 증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다시 죄를 위하여 드릴 제사가 없어졌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한 전제를 다룬 뒤에 말하고자 하는 결론적 의미로서의 “그러므로”이다.
- 19절b.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을 함부로 지나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대제사장일지라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온전히 사하지 못하고 휘장을 지나 들어간 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렇기에 쉐키나의 불꽃이 타오르는 그곳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그룹 천사들이 불검을 가지고 두루 생명나무 실과를 먹기 위해 다가오는 자들을 죽임으로 막았던 것이 풀리고 열리게 된 것을 암시한다. 그룹 천사가 그려진 성소의 휘장을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의 존전에 아담과 하와가 다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을 완전하게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 3:15절이 이렇게 성취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 20절a. “그 길은” => 예수님을 따라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 20절b.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 우리가 담력을 얻게 된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살이 찢기시고 피흘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심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3가지의 청유형 명령
a. 나아가자
- 22절a.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 마음에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만 양심 속에 조차 존재하는 악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행동을 하고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양심 속에도 죄가 존재한다. 그것을 온전히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피뿌림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 22절b.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 회개를 위한 세례를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의 고백으로 증인들 앞에서 이렇듯 물에 의해 씻음을 받는 것, 혹은 침례처럼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된다.
- 22절c.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음을 믿는 믿음이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신의 죄를 위해 달려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으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이를 용서해 주심을 믿는 믿음이다.
- 22절d. “하나님께 나아가자” =>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듯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여 나아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시기에 담력을 얻어서 행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 나아감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복이다. 하나님 앞에 그냥 서서 있게 되는 것도 영광중의 영광이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음은 더더욱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 영광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택도 없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뿌림과 세례를 통한 회개와 십자가를 믿는 참 마음과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한 구비조건을 만족시키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b. 격려하자
- 23절a.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약속하신 분은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가장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23절의 하반부 ~ 24절에 나오는 말씀들이 의미가 있게 되어진다.
- 23절b.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은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소망을 흔들리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어떠한 다른 이야기가 울려퍼진다 하더라도,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밀려와도 그 소망을 굳게 잡아서 흔들리지 않게 하여야 한다.
- 24절a. “서로 돌아보아” => 주님의 원하시는 것은 공동체적이다. 개인주의가 아무리 팽배해도 그렇게 해서는 사람이 변화되지도 교화되기도 어려운 일이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신앙을 가진 자는 없다. 때문에 동료가 필요한 것이고,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가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로 여기서 지체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 24절b.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 격려해야 하는 내용은 사랑과 선행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선행이다. 참 소망을 가진 자가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 이것이 교회가 세워진 이유이다.
c. 그리하자
- 25절a.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 필요없다고 하는 이들이 이 때도 벌써 있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다. 모이기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 25절b.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울수록 더 잘 모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세대는 비즈니스로, 개인주의로 하여 점점 바쁘고 바쁘게 만드는 시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매우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시기에 그분의 모범을 따르는 삶으로 서로 권하여 모이기를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대제사장으로 모시는 자들의 삶은 이렇듯 모이기를 힘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가르침 :
1) 올바른 예배는 언제나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담력을 얻어 하나님의 존전 앞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나오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예배를 들려야 한다. 그것은 담력이 필요한 행위이다. 그것을 우습게, 습관적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참된 예배는 목숨을 거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목숨을 예수님이 대신 주셨기에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습게 아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바르게 인정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담력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2)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의 다스리는 대제사장 되시기에 우리는 올바르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3)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의 다스리는 대제사장 되시기에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게 되었다.
4)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의 다스리는 대제사장 되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오실 것을 기대하며 모이기에 힘쓸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
적용 :
1) 예배. 이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임을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그리고 내가 은혜받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보다 우선이 되곤 한다.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예배는 피흘림이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것만이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목숨을 거신 것을 이제 와서 잊어버리고 내 중심으로 별 감흥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나도 담력을 얻어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음을 체험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배도 거저, 그냥 쉽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금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의 차이를 생각한다. 지성이면 감천인 자신의 정성이 중심이 되는 가인의 예배,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닌 하나님의 아이디어에 순종한 아벨의 예배. 아벨의 예배가 참 예배가 되었던 것이다.
2)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의 다스리는 대제사장 되심으로 가능하게 된 놀라운 일들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감,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함, 모이기를 힘씀. 또한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3) 12월이 되었다.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미얀마에서의 시간이 주님의 은혜로 흘러가고 있다. 2022년을 잘 마무리 하고 2023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전기가 일어나는 12월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