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남도에서 하던 말이 있었다.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자랑 하지 말아라."
70년대까지 성행하던 대일 밀수 사건에 큰 파장을 불러 온 대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1976년 여수 허봉용
밀수 사건이다.
부산에서는 대일 무역선을 통해서 밀수 행위가 발생하고 있었지만, 어항이던 여수, 통영, 심천포, 장승포 등에서
일본으로 활어 즉 살아있는 물고기를 어선의 선창 수조에 싣고 수출하는 활어선 무역이 성행하였는데 그 활어선이
돌아 올 때에 시계, 화장품, 의류, 카메라, 전자제품등을 대량으로 밀수입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여수가 가장 심했다는데, 여수에 허봉용이라는 활어선을 여러척 갖고 있고 재력도 대단해 지방 유지로
알려진 사람이 있었는데 소유 활어선들을 이용해 밀수도 하고 있었는데 76년 어느날 그의 어선 한 척이 밀수로
세관원에 적발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저 그의 아들 둘이 쫓아가 허씨 물건이라하고 타협을 할려는데 젊은 세관원이
청렴 결백해서 원칙대로 입건 처리하자 이에 분노한 이들이 칼로 세관원을 찔러 중태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대검에서 특별 수산 본부를 설치해 조사에 들어 갔는데 조사해 보니 밀수범들의
단독 문제가 아니라 세관원들이 널리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여수항 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국
항만에서 관례적으로 밀수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전국 항만으로 수사를 확대하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는 인왕2호에서 이틀마다 일본 코베항과 부산을 왕래하는 고려해운의 선플라워호로 선장과 같이 옮겨
와 1등항해사로 있었는데, 부산항을 대대적으로 수사하던 검찰 수사에 직면하게 되었다.
부산에 입항하는 여러 배에서 먼저 접대비를 거둬 세관에 상납한다는 것을 알고; 상납 대표자가 주로 조리장인걸
알아 이들을 체포해 누구에게 상납했으며 이를 누구 누구가 갈라 가졌는지를 집중 수사하게 되고, 그에 따라 부산
세관원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니 접대자 조리장이 심한 고문과 같은 검찰 수사로 자기 이름이 혹 나올까 싶어 세관원들이 입항하는 대일
외항선에 쾌속 순찰선으로 누구보다 먼저 승선해서 접대자들을 도망가도록 종용하는 진풍경이 속출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 배 조리장이 칠순 가까운 남해 사람이었는데 도망가자 못하고 잡혀 갔는데 며칠간의 모진 고문에도
참고 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가택 수색에 들어 갔는데 당시 대구 고검 검사장이 가족 사진에 있는 걸 발견
하고는 어찌 되느냐고 물었던 모양인데 친 조카라고 그랬단다. 그러자 난리가 난 쪽은 검찰 수사관들이었다,
자기네들 상관인 고검장의 삼촌을 심하게 고문 수사를 해댔으니...
당연히 무혐의 방면 되었고 그러자 세관원들은 자기네들이 무사하게 심한 고문에도 버텨준 의리의 사나이로 우리
조리장을 극진히 대우하게 되었고 그후 우리 배에는 접대비커녕 통과세도 내지 않아도 되었고 어느 배 보다 먼저
수속해 주어 바로바로 상륙하게 하여 주는 편의를 봐 주었다.
그리고 검찰의 과도한 수사가 알려지게 되어 비난 받고 얼마 뒤 수사는 종결 되었었다, 내가 볼 때는 세관 괸계인의
엄격한 관리가 있었다면 밀수는 근절 될 수 있었건만 부패한 세관 공무원의 비호로 밀수가 성행했던 시절이었다.
77년 약 3년간의 대일 컨테이너 선을 허리를 다쳐 그만 두게 되었고 그때 있었던 많은 일들이 내 젊은 날의 희미한
추억 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