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화가들
1) 마네(1832-1883)
마네는 인상파 화가들보다는 거의 10살쯤 나이가 많다. 그래서 마네를 인상파 화가로 분류하기 보다는 인상파를 연 화가로 대접한다. 젊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를 많이 따랐으나 그는 한번도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한 일이 없다.
어쨌거나 마네는 다음 세대인 인상파 화가들의 지도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는 상류 가정의 출신이었으므로 잡다한 신분들이 모여있는 인상파 그룹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본능적으로 어울림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마네는 전통 회화에 도전하므로 많은 물의를 일으켜서 미술에서 ‘전위’라는 개념을 세우므로 근대미술의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그가 밝은 그림이라고 말하는 인상파 그림을 처음으로 길을 연 것은 아니다.
그는 살롱에 꾸준히 출품하므로 자기의 그림을 거부하는 살롱에 집착을 가졌다. 그래서 일부의 인상파 화가들은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그렇다고 비난하였다. (당시에는 살롱전의 입선이야말로 화가로서 명예와 살아갈 길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비록 그가 모험적이고, 도전적이긴 해도 부르주아지 계급의 특성인 도시적 감각을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선원이 되고자 하다가 화가로 길을 바꿨다. 아버지는 사법관이었고,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로서 전형적인 상류 계급 출신이다. 생활의 여유 때문에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그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고 한다.
그는 꾸르베와 보들레르의 주장에 동조하여 현세의 인물을 주제로 택하였다. 지금까지는 영웅이나, 신화의 인물, 소설의 주인공을 주로 그렸지만 그는 현실의 인물을 그렸다. 붓자국의 물감이 마르기 전에 덧칠을 하므로 선을 지워 나갔다.(고전주의를 따르는 아카데미즘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이러한 미술은 선을 중시하는 아카데미즘 미술과는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1863년의 살롱전에는 그의 그림을 위시한 많은 젊은 화가들의 그림이 낙선을 하자 여론이 분분하였다. 이에 당시의 대통령인 나폴레온 3세가 낙선자를 모아서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낙선자전이다.)
이때 모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대단히 물의를 일으키면서 비난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그 그림 앞에 너무 많는 관람객이 모여서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1864년에도 입선은 되었지만 그림에 대한 비난은 여전하였다.
1865년의 살롱전 입선작인 ‘올랭피아’는 살롱전 사상 최대의 물의를 빚었다고 한다. 이때도 졸라와 보들레르 등 진보적인 사람 몇몇만 옹호해주었을 뿐 심한 비난을 받았다. (나중에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졸라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1872년에 네델란드로 여행한 마네는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1873년에는 일본 판화가 원색을 사용한 그림(부세화)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일본 부세화는 원색, 평면이 특징이므로 이런 그림을 ‘일본 취향’이라고 하였다.
마네의 화풍은 명암이 옮아갈 때는 중간색을 거치는 전통적인 기법을 무시하고 직접 대비가 되도록 배차하여 강력한 색채 대배로 충격을 주었다. 음영도 양감도 무시한 평면성과, 강렬한 단일색을 사용하여 전통 기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인상파처럼 색채 분할은 시행하지 않았다. 현대성 또는 리얼리즘이랄 수 있는 동시대의 사람을 그렸다. 미술에서 전통 양식을 무시했으나 꾸르베처럼 사회운동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외광에서 스케치 정도만 하였꼬, 직접 외부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근대에서 현대를 넘어서는 문턱의 역할을 한 화가라고 말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신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내 주변 인물을 담아내므로(현대성이라고 함) 현대성을 표현하였다.
사진의 발명은 미술 기능의 하나인 ‘기록’이라는 면에서 엄청난 도전이었다. 미술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인상파 미술이 등장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마네가 고민한 이런 요소들이 인상파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마네의 주요 그림
1) 퀼리르 정원의 음악회(1862)
이것은 일종의 단체 초상화이다. 이 그림에는 당시의 마네 주변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다 그려져 있다. 파리의 문화인들을 음악회에 모두 모아놓고 그린 형식이다.
한 구석에서(그림에서는 왼편에 반만 그려져 있다.) 화가 자신이 이들을 관찰하고 있는 형식이다. 즉 그림의 바깥에서 그림의 안쪽을 관찰한다는 형식이다.
2)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2-63)
63년 살롱전에 낙선한 작품이다. 낙선전에 전시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까지의 나체화는 신화의 인물을 다루었으나 현실의 인물을 다루지는 않았다. 현실의 인물이 나체의 모습으로 앉아있자 청교도적 분위기가 만연해있던 당시에는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이 물결쳤다.
실제로 당시에는 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대 풍조를 풍자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나체 여인의 자세도 지오르지오네의 ‘전원 음악회’ 구도를 그대로 본 딴 것일 뿐이라고 한다.
낙선전에서 이 그림이 주목을 받고 물의를 일으키므로 전통 회화에 저항적이었던 젊은 화가들에게 우상이 되었다. 그래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3) 올랭피아(1863)
벌거벗은 창녀의 그림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본 딴 그림이다.
마네는 여성의 나체에서 ‘신화성’을 제거하고 현실의 창녀로 묘사하였다. 색채도 과학적 이론을 무시하였다. 음영도 무시하여 평면으로 표현하였다.
4) 에밀 졸라의 초상(1972)
졸라는 마네의 그림을 이론적으로 지원해준 당대의 지성인이고, 작가이다.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려준 초상화이다. 그러나 그림의 주체는 졸라가 아니고 화가 자신이라고 한다.
책상 위에 얹힌 책에는 마네의 이름이 적혀있다. 마네의 이름이 또렷한 그림책을 펼쳐들고 있다. 즉 이 그림을 통해서 마네 자신을 선전하는 그림이라고 하였다.
벽에는 자신의 올랭피아와 일본 판화가 걸려있다.
5) 피리부는 소년 1866
완전히 평면 구도이다. 일본 판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즉 평면성과 강렬한 윤곽선은 일본취향(자포이즘)의 특징이다.
6) 발코니 (1869)
발코니를 통해서 파리 시민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성긴 붓질로 표현하면서도, 치밀하고 딱딱한 구도를 하고 있다.
즉 인상파적 요소와 전통적인 요소(구도)를 결합시킨 작품이다.
8) 뱃놀이, 온실에서
뱃놀이는 자연주의적이고, 현대적이며, 여가 지향적이다. 밝은 색채, 거친 붓질(성긴 표현) 등은 인상주의 화풍이다. 표현이 입체적이고, 평면적이다.
* 마네 그림은 표정이 없기 때문에 속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고 한다. 졸라는 마네의 그림을 평하기를 “이야기도, 감정도 없다.”라고 하였다.
마네는 그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시각적인 효과만을 드러내려 하였다.
9) 폴리 베르제르 바(1881)
쇠종이라는 여급과, 바의 카운터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은 유흥업소에서 제공하는 소비적 향락 상품들이다. 어쩌면 여급 자신도 그 상품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급 뒤의 거울을 통해서 카페의 공간이 보인다. 이 공간의 인물들에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 내며서 이 작품의 ‘다의성’을 제공한다.
(거울을 보면 여급 앞에 손님이 있다.) 무심한 눈길의 여급은 또 많은 읽기를 제공한다.
10)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1871)
가면 무도회에 참가하는 인간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다. 그러나 가면 뒤의 인물은 신분과 관계없이 이중성을 띈다. 그 이중성을 가면이 단절하고 있을 뿐이다.
다라서 마네의 그림을 “감정을 단절한 미학”이라고 한다.
바르비종파나, 낭만주의자들이 감정의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그는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인 사실로 표현하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사실주의 화가이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표현 방법이 젊은 화가들의 공감을 얻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과학적인 분석까지 한 사실주의자였다.
나중에는 마네도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야외에서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
2)) 바질르(바자유-1841-1870)
의학 지망생이었으나 1862년에 파리로 와서 글레르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모네를 위시한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서 사귀게 된다. (르노아르, 모네, 피사로, 등)
1863년부터 옥외의 밝은 해빛 아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글레르 학교는 아카데미즘을 따르는 미술교육을 하였으므로 염증은 낸 그는 1864년에 미술학교를 떠났다.
1867년에는 모네와 협동 작업을 할 만큼 우정이 깊었고, 그만틈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다. 그러나 모네와 바자유는 살롱전에서 거듭 낙선하였다.
그는 외광에서 그리는데 어느 정도 자신을 얻자 인간의 육체를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린 그림이 “여름 정경”이다.(목욕하는 모습이다.) 자연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뛰어난 색채 감각이 뛰어나다. 풍경화에 나오는 인물은 움직임이 없어서 조각같다는 평을 듣는다. 그림에는 천진난만성이 보이낟. 1870년에 보불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하므로 화가로서 꽃을 피우지 못하였지만, 인상주의 미술을 연 화가로 대접을 받고 있다.
1876년에 열린 인상파 2회 전시회에서 일찍 죽은 바질르를 추모하여 글의 그림을 전시하였다.
3)
3) 기요맹
Armand Guillaumin (1841∼1927) 프랑스의 화가. 파리태생으로 생활 때문에 처음에는 어떤 토목과에 잠깐 근무하면서 여가에 회화를 그렸다. 연구소에서 세잔과 피사로를 알게 되어 최후까지 친교를 계속했다. 기요맹은 누구의 감화도 받지 않은 제작으로, 갈색이나 붉은색·자색을 많이 쓰는 반면에, 개성이 강한 매력을 나타내며, 피사로나 모네처럼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야성적이면서 중후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 마침 1891년에는 복권에 당첨되어 그 이후부터는 네덜란드와 그 밖의 지역의 풍경을 그리면서 자유로운 제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