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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다
행 13:1-12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행 13:1-12 / 안디옥의 교회에서는 바나바와 사울 외에 `흑인'이라는 뜻의 니게르라는 별명을 가진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영주 헤롯왕의 젖동생 마나엔 등이 예언자와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2) 하루는 그들이 금식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성령께서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두 사람에게 맡길 특별한 일을 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 그래서 그들은 금식기도를 끝낸 후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고 떠나보냈다. 4) [구브로에서 전도하는 사도들;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성령의 지시를 따라 실루기아로 내려간 바나바와 사울은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갔다. 5) 요한 마가도 그들을 돕기 위해 동행하였다. 그들은 살라미라는 동네의 여러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6-7)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섬 전체를 두루 다니면서 설교를 계속하여 그들이 마침내 바보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곳에는 거짓 예언자이며 총독 서기오 바울의 시종인 바예수라고 하는 유대인 마술사가 있었다. 총독은 사려 깊고 통찰력 있는 사람이어서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8) 그러나 마술사 ㄱ) 엘루마는 총독이 두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주님을 믿게 될까봐 그들을 훼방하였다. (ㄱ. `박수'라는 뜻으로 바예수의 헬라식 이름) 9) 그러자 바울이라고도 불리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마술사를 쏘아보며 말하였다. 10) `기만과 악독이 가득 차고 모든 선한 일의 원수인 이 악마의 자식아, 언제까지 주께 대항할 작정이냐? 11)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너는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될 것이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에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서 그는 앞을 더듬으며 손을 잡아 부축해 줄 사람을 찾았다. 12) 이것을 본 총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놀라워하며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와 전도가 예루살렘을 근거한 유대인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가(1-12장), 13장부터는 안디옥을 근거한 이방을 대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파송(1-3) 누가는 1절에서 안디옥 교회에 이미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행 11:27). 누가는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보다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파송하는 교회의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로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모였음에도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교회였고, 금식하면서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을 기꺼이 파송할 만큼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구브로에서의 선교(4-5)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바나바와 사울은 첫 전도지요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Cyprus)로 향했습니다. 그들의 첫 목적지가 왜 구브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하였고, 사탄과 그 하수인의 영역을 깨뜨리시려는 성령의 의도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구브로는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그곳 출신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곳이었습니다(행 11:19-20). 구브로에 도착한 두 선교사는 살라미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선교의 전략적 출발점으로 삼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5). 바나바와 사울의 이러한 방법은 그들의 선교가 상당히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런 선교 패턴은 이후 바울의 선교에서 전형적인 전략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을 수행원으로 첫 선교여행에 동참시켰습니다.
바보에서의 대결(6-12) 7절까지 이 선교 여행의 리더를 바나바로, 사울을 동역자의 위치에 두었는데, 9절부터는 사울의 이름을 바울로 부르며 이 선교 여행의 핵심 인물로 묘사합니다. 바울은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요 마술사와의 영적 전투를 하게 됩니다. 이 싸움은 바울이 어떻게 이방인 선교사역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누가는 바울이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총독 곁을 지키고 있는 바예수라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의 정체를 폭로하였습니다(10). 바예수는 악령이 가득하여 총독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였으나,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거짓 선지자인 바예수를 맹인이 되게 하였고 총독으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며 가르침에 대하여 놀라게 하였습니다.
적용: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고, 적극적으로 전도를 하거나 간접적으로 전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한 사람에 속합니까? 또 전도를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재능이란 신이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겸손하라. 명성이란 사람이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사하라. 자만심은 자신이 스스로에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심하라.” -존 우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순종하는 믿음, 겸손한 마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성령의 역사 아래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빌립과 베드로와 안디옥교회에 의해 길이 닦기기 시작한 이방민족에 대한 전도가 바울에 의해 “땅끝까지”의 본격적인 이방전도로 나아가기 시작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그때로부터 시작된 박해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 안디옥에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고 그의 수고로 큰 무리가 주님께 나아왔습니다(행11:19-24). 동역자가 필요하다고 여긴 바나바는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로 가서 그를 찾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두 사람이 일 년간 전도하며 목회한 결과로 안디옥 교회는 튼튼히 섰으며 거기서 비로소 주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교회의 확산과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박해가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헤롯 1세의 손자이며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조카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인 것입니다(행12:1-2). 유대인들이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또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행12:3-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기적과 같은 놀라운 방법으로 파수꾼들의 엄중한 감시를 무력하게 만드시며 안전히 탈옥시켜 주셨습니다(행12:4-10).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손을 댄 헤롯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대셨습니다. 헤롯을 벌레에게 먹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행12:23). 세상권력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몸 된 교회를 억누르고 파괴하려 해도 그 권력이 무너지고 말 뿐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몸 된 교회는 더욱 왕성해져 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자는 헤롯의 죽음을 기록하고(행12:23) 이어서 보란 듯이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12:24)고 썼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흥왕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디옥 교회로부터 땅 끝을 향해 퍼져 나아가기 시작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 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미리 뛰어난 사역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본문 1절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사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한 것은 다섯 사람 중 몇 사람은 선지자이고 다른 몇 사람은 교사였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의 가르침이 성령에 이끌림을 받은 것이었다는 의미로 그들을 모두 선지자라고도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섯 사람 중에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습니다. 그는 그 이름으로 보아 아마도 북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도 다섯 사람 중에 들어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은 헤롯 1세의 아들이고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삼촌인 헤롯 안디바를 가리킵니다. 마나엔이 그의 “젖동생”이었다는 것은 그가 간난아이 때부터 헤롯 안디바와 함께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뜻입니다. 그가 왕과 함께 궁중에서 살던 대단히 지체가 높은 가정 출신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계선교의 전초기지요 요람이 된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가는 다섯 선지자 교사들의 출신지역과 신분이 다양했음에 의미를 두고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복음이 능력 있게 더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없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배타적으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들의 도시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언한 첫 번째 개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또한 자기들을 넘어 보다 넓은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들을 파송하기 시작한 첫 번째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를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 온 회중이 모여 금식하며 예배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 온 회중이 뭔가 중요한 뜻을 품고 결단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성령을 통한 그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하심을 확신한 안디옥 교회는 역시 금식하는 가운데 그 뜻을 받들기로 다짐하는 기도를 드린 후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안수하고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한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교회가 세계로 확산되고 더욱 성장하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음을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첫 공식 선교사가 된 두 사람은 실루기아로 내려갔습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으로 통하는 주된 항구로서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2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향한 것(본문 4절)이 사도 바울의 소위 첫 번째 선교여행의 출발이었습니다. 구브로는 실루기아에서 근 100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의 한 섬입니다. 구브로는 로마 원로원이 관할하는 영지로서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바나바 자신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입니다(행4:36). 바나바는 먼저 자기 고향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좋은 전도의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도 가까운 사람들부터 주님께로 이끌어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배로 도착한 곳은 살라미였습니다. 살라미는 구브로 섬의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로서 실루기아로부터 가장 가까운 쪽에 있었고 구브로 섬의 동쪽 절반을 다스리는 중심지였습니다.
살라미에 상륙한 바나바와 바울은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때 거기서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습니다(본문 5절). 여기서 수행원이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돕는 도우미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은 살라미에서 출발해서 살라미와 정반대쪽으로 15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구브로 섬의 다른 항구 바보로 갔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구브로 섬의 동북쪽 끝에 있는 살라미 항에서부터 섬을 횡단해서 남서쪽 끝에 있는 바보 항까지 갔다는 말입니다. 이 항구도시의 이름은 바보였지만 바보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바보는 행정관청 소재지로서 로마 총독이 주재하고 있는 신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총독은 서기오 바울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 앞에 서게 됩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본문 7절). 그런데 그 총독 서기오 곁에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이고 마술사인 바예수라 하는 자(본문 6절)가 있었습니다. 이 마술사는 엘루마라고도 불렸는데 그 이름 자체가 마술사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하며 총독으로 하여금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도 믿지도 못하게 힘썼습니다(본문 8절). 마술사 바예수는 총독의 수하에서 상당한 부귀를 누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총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이 일평생 쌓은 성과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이 자명해지자 그는 기를 쓰고 총독의 귀를 막으려 한 것 같습니다. 복음의 방해자가 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 바예수를 주목하고는 말하기를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본문 9-11절) 했습니다. 바예수란 “구원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그가 구원자의 아들이기는커녕 그 반대로 “마귀의 자식”이라고 폭로한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 떨어지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 자를 덮었고 그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장애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것을 본 총독 서기오 바울은 믿게 되었고 놀람 가운데 주의 가르치심을 받았습니다(12절). 구브로를 첫 선교지로 삼은 바나바와 바울은 그 섬의 최고 권력자를 믿음 안에 얻는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총독 서기오는 오랜 기간 로마제국 전역에 많은 고위관리를 배출한 명문 가문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명문가의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구브로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의미 있는 변화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그 하나는 바울의 호칭의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 2절, 7절까지만 해도 사울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9절에 와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쓴 후 본문의 끝 절 다음 절인 13절에서부터는 바울이라고 기록하기 시작해서 끝까지 그렇게 부릅니다.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라면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방세계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다 친숙한 이름으로 내세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바나바와 바울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서의 변화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이름이 처음으로 함께 거론된 것은 행11:30에서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자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냈다.”(행11:29-30)는 기록입니다. 행12:25에서도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다섯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제일 먼저 바나바를 쓰고 제일 끝에 사울을 썼습니다. 본문 2절과 7절에서도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부른 이후 바울이라고 이름을 바꿔 기록하기 시작한 13절에서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라고 호칭순서가 고정되어 나타납니다(행13:43, 46). 이제 바야흐로 바울의 시대가 열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모교회의 탄생으로부터 이방선교의 요람이 된 안디옥 교회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의 1-12장까지는 예수님의 직제자들인 열두 사도가 주역이었다면 13장부터는 바울이 단연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눈다면 전편은 12장에서 끝납니다. 13장부터는 후편이 시작됩니다. 그 후편을 가리켜 바울행전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호칭이 바울로 바뀌고 그 이름이 다른 모든 사도나 전도자들의 이름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유대인들이 자국민 혹은 동족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에서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마28:19) 하시고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민족에게로 널리 복음이 선포되는 시대에로의 변화를 알리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의 노력으로 많은 이방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피부색갈도 초월했고 사회계층도 초월해서 퍼져나갔습니다. 흑인도 믿게 되었고 지역의 최고통치자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전진과 확산을 가로막는 방해가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방해를 다 물리치셨습니다. 장애물들을 제거하셨습니다. 모든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자는 이 모든 복음의 놀라운 진전이 다 성령의 역사 아래 이루어졌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두 사람의 선교사를 세워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전도를 시작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갔다.”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어디서부터 선교를 시작할지를 지시하신 이도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8-12절을 보면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던 마술사 바예수를 바울이 그 자리에서 눈을 어둡게 하여 물리치고 총독으로 하여금 믿게 한 것도 “성령이 충만하여”(본문 9절)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나 선교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모든 방해자와 장애요소들을 물리치시며 제거하여주십니다. 이 성령의 역사 아래 이루어지는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두 이 위대한 사역의 동참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친히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새문안 새 생명 운동], 이것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크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새문안 새 생명 운동] 안에서 행해지는 전도훈련, 태신자 전도운동, 멘토 교육 등에 기도와 참여로 최대한의 힘을 모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소프트웨어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고 실행시킬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일 즉 새 성전 건축에도 아낌없이 헌신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복과 은혜를 베푸시리라 믿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세 가지 일
이윤재 목사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우리는 쉴새없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앞에 마귀가 어두운 얼굴로 다가왔답니다. 자세히 보니까 다 죽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었습니다. “마귀야, 너는 왜 오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왔느냐?” 그랬더니 마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요즘 너무 따분하게 지내거든요”. “아니, 왜 따분하게 지내느냐? 사람들을 유혹해서 죄짓게 하는 일이 네 일이 아니냐?”. 마귀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게 제 일이죠.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제가 유혹해야 사람들이 죄를 지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유혹하기도 전에 죄를 짓는 바람에 제가 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마귀의 말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는지. 우리도 얼마나 완악해 졌는지 우리가 생각해도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요즘은 마귀가 유혹도 하기 전에 죄를 짓습니다. 죄가 관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죤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쳔”이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들어가 보니까 방이 온통 먼지로 덮여 있습니다. 잠시 후 하녀 한 사람이 나오더니 빗자루로 방을 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빗자루로 쓸면 쓸수록 먼지가 더 납니다. 결국 하녀가 돌아가고 또 한 사람이 나왔는데 이 사람은 빗자루로 방을 쓸지않고 물을 뿌리며 청소합니다. 물을 뿌렸더니 먼지도 안 나고 깨끗하게 방이 청소됩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와서 이 장면을 해석합니다. “방은 인간의 마음이고 먼지는 죄로 덮혀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방을 쓸고 있는 하녀는 구약의 율법이요 인간의 노력인데 인간이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먼지가 더 나온다.
두 번째 나와서 청소한 사람이 있다. 그가 성령이시다. 성령님은 마른 빗자루로 먼지를 쓸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쓸면 쓸수록 더 먼지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물을 뿌린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리고 청소했더니 방이 깨끗해졌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적 노력만으로 개인이나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성령님입니다. 갈5:16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좇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페리파이테“입니다. 이 말은 ”페리“, 함께”. “파이테” “걸어가는 것”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Walking with Holy Spirit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실제 그렇게 살았던 교회가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입니다. 행11장에서 안디옥교회가 생기면서 보였던 세 가지 모습을 우리는 이미 들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예수님을 중심한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행13장이 있습니다. 13장에 계속해서 나오는 키워드가 “성령”입니다. 13:2절 첫부분입니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4절입니다. 행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로 내려가”. 그리고 9절입니다. 행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것이 성령님으로 시작하여 성령님으로 끝납니다. 13장에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지시하고, 사람들은 순종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안디옥교회에서 이루어진 성령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1절을 읽겠습니다. 행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성령님은 사람을 세우게 합니다.
1절에 나타난 사람들은 당시 안디옥교회의 대표적인 사람 몇을 소개합니다. 이름을 보면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그리고 사울입니다. 이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우선 그 다양성에 놀랍니다. 바나바는 교회 창설자입니다. 덕과 관용을 갖춘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니게르”는 아마도 “니그로”와 같은 발음일 것입니다. 본명은 시므온입니다. 루기오 역시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온 사람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리비아, 아프리카 북단 알렉산드리아 서쪽에 있습니다.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입니다. 마나엔은 어렸을 때 헤롯 안티바스와 같은 왕궁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갈라졌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 되고, 마나엔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입니다. 열심있는 유대교인이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개종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다양했습니다. 인종으로는 유대인, 비유대인, 흑인, 사회적으로는 왕족, 평민, 학벌로는 사울같은 박사, 보통사람, 종교적으로는 극단적인 바리새파, 온건 합리주의 사람들, 지역적으로는 안디옥, 이스라엘, 아프리카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다양성이 안디옥 교회의 생명이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습니다. 교회는 돈많은 부자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부자가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사회적 명사, 지식인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신앙의 색깔도 다양합니다. 진보, 보수, 따뜻한 보수, 온건한 진보, 다같이 모입니다. 우리는 진보적인 사람만 모인다. “운동권 교회”입니다. 우리는 보수적인 사람만 모인다. 사람들이 “꼴통보수교회”라고 부릅니다. 기장, 예장, 감리교, 성결교 다 모입니다. 본래 기장, 예장, 감리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 기장 가정에서 태어나면 가장사람입니다. 자라면서 감리교 다녔으면 감리교인입니다. 내 교단, 내 교파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교파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지역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판교 개발 이전에는 특정 지역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교회중에서 가장 지역색을 뛰어넘는 교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판교 개발 이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서울 경기, 다 모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과 관용입니다. 자기 주장을 덜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획일성에 있지 않습니다. 신학적, 지역적, 교파적 획일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은혜의 바다입니다. 누구나 들어 올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들어오면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 자랑스러운 전통이 이것입니다. 한국은 본래 양반과 상놈이 철저하게 구분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885년 기독교가 들어오자 이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마팻이 서울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는 양반, 상놈 다 받는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박동열이란 백정의 아들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백정의 아들은 그 당시로는 사람으로 취급도 안할 때입니다. 그러나 마팻 선교사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 의사에게 급히 연락해서 박동렬이를 살렸습니다. 그 의사가 누군가 하면 애비슨이었습니다. 애비슨은 당시 고종황제의 시의였습니다. 여러분, 황제의 시의가 백정의 아들을 고치러 급히 가방들고 왕궁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100년전 한국교회 모습입니다. 결국 박동열이는 애비슨의 치료를 받고 나았고 그 가족은 감동받아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박동열이는 1907년,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고 그 아버지는 축복받아 사업가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교회, 누구나 품는 교회, 그것은 한국교회 자랑스런 전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양하다고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성령은 교회안에 다양성을 예수님안에서 품게 하면서 또한 그 사람들을 말씀과 은혜로 훈련시킵니다. 1절 첫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으니.” 안디옥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선지자와 교사였습니다, prophet and teacher. 당시 prophet,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teacher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 선포자와 양육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안디옥교회를 이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하고 훈련시킨 영적 리더쉽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요? 행11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1:26절입니다.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훈련받았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모시고 와 둘이 함께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그 제자들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제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군중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배참석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따라 합시다. “제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제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받고 세움받아야 합니다. 골2:7절입니다.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다같이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직분과 지도력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직분은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은 받는 것입니다. 직분은 임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직분은 사람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은 하늘이 주는 것입니다. 직분은 position이고, 리더는 influence입니다. 교회안에서 position을 얻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포지션이 리더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리더입니다.
교회안에서 어떻게 좋은 리더쉽을 키워갈 것이냐 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돌아가신 고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공예배 참석과 십일조 하는 사람, 교회 하나를 개척하는 사람, 유산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죽은 후 시신을 기증하는 사람, 목사님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보통 사람에게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세울 때 10가지 항을 객관화하여 당회에서 점수를 주고 선발해서 교인들이 결정하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10가지에 각 10점씩이고 100점 만점입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등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금요기도, 새벽기도등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셋째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넷째 전도입니다. 불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다섯째 봉사입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삶의 실천입니다. 여섯째 목장입니다. 주어진 소그룹 목장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생활입니다. 일곱째가 훈련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커리큐럼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태도입니다. 여기까지는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여기까지는 자료가 다 나와 있습니다. 나머지 세 개는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그래서 당회원, 목회자가 함께 평가하여 합산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품입니다. 다른 사람과 잘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인격입니다. 아홉째는 리더쉽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이끄는 영적 영향력입니다. 마지막이 청지기입니다. 가정, 직장, 세상등에서 덕을 이루며 청지기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가의 평가입니다. 이렇게 해서 점수가 나오면 점수가 높은 사람순으로 교인들 앞에 내고 투표를 받습니다. 이렇게 몇 번 지도자를 뽑는 동안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은 다 되어도 이것 안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 참석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되지 않으면 다른 것 다 좋아도 교회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지도자는 세상 지도자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가 생명입니다.그 예배와 기도를 하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2-3절입니다. 행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3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님은 기도하게 합니다.
2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했습니다. 여기 “섬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일하다, 봉사하다”라는 뜻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레이투르기야”, 곧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안디옥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3절로 가면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자, 순서가 있습니다. 기도가 먼저가 아니고 예배가 먼저입니다. 순서는 예배하고 다음 기도합니다. 왜 이 순서가 중요합니까? 예배와 기도는 둘 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특징이 다릅니다. 예배는 공동체적으로 하고 기도는 개인적으로 합니다. 예배는 일정한 시간에 하고 기도는 아무 때나 합니다. 두 가지 다 하나님과의 관계안에 있지만 먼저 예배가 있고 다음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혼자 드리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같이 드리는 예배가 더 중요합니다. 예배가 되어야 기도도 됩니다. 예배는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요 기도는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나 기도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목적입니다. 2절, “주를 섬겨 예배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예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3절, “금식하고 기도할 때“ 또 성령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 감정을 발산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예배드립니다. 내 소원 성취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예배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강원도 태백에 가면 “예수원”이 있습니다. 미국의 토레이 신부가 세운 것입니다. 원래 이 토레이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부흥사였습니다. 그가 약 100여년전 무디를 도와 성령운동하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했던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성령님, 하나님이 만일 제가 좋아하는 일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일을 제가 좋아하게 하옵소서”. 그 토레이의 손자가 1965년에 한국에 와서 예수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토레이는 하루 24시간, 365일을 성령을 의지했답니다. 토레이는 너무 성령을 의지한 나머지 설교도 원고를 쓰지 않았답니다. 설교의 윤곽만 잡아 놓고 늘 성령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설교시간이 되었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아 서재에서 계속 무릎꿇고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모시러 와서 할 수 없이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준비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아직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설교단에 막 올라 갔는 데 그때부터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설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설교를 마치자 교인들이 악수하면서 말합니다. “오늘 설교에 너무 은혜받았어요. 혹시 설교 원고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설교 메모라도 있나요?” “그것도 없는데요”. 그는 철저히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가 원장으로 있으면서 항상 괴로웠던 것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원장님,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 하면 토레이 신부가 말했답니다. “나에게 묻지 말고 성령님께 물어 보세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기도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그가 하루 10시간동안 기도실에 앉아 있었답니다.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일을 낳습니다. 그래서 공식이 있습니다. “먼저 예배하고 기도하라. 함께 모여 예배하라. 무릎꿇고 기도해라. 그때 성령님이 말씀하신다. 그 음성을 들으면 산다. 그 음성을 들으면 승리한다“. 아멘.
여러분도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원합니까? 교회는 본질적으로 일하는 곳이 아님을 아십니까? 욥33:31절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교회는 내가 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계2:11,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모두 17번 나옵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평생 예배와 기도와 힘쓰시기 바랍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렇게 기도하자 드디어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2절 다시 보면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다같이 “따로 세우라”.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계속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했습니다.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셋째. 성령님은 선교하게 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최종적인 선교인 것을 아십니까? 성령님이 하시는 최종적인 일은 내가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해지고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일이 선교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교회나와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예배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우리의 삶이고 목적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꼭 외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만이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의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고 하는 일은 다릅니다. 교사, 공무원, 주부, 직장인, 하나님이 보낸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이 선교입니다. 전문선교사로 가면 복음선교입니다. 일반직장으로 가면 평신도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선교사입니다.
어떤 선교든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합니다. 은혜가 기본적인 동기입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으로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능력입니다.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은혜와 능력입니다. 은혜는 선교의 이유요 능력은 선교의 동력입니다. 마18장에 탕감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요즘 돈으로 약 10억쯤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주었습니다. 요즘 돈으로 약 천만원쯤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이 와서 10억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받은 그 날 그는 자기에게 천만원 빚진 사람에게 가서 빚을 갚으라고 욱박지르며 멱살을 잡았습니다. 이때 주인이 말합니다. 마18:32-33,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한국교회 교인가운데 은혜를 안 사람이 참 많습니다. 1900년대 경기도 강화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강화 홍의 마을에 종순일 이라는 교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부자여서 그의 돈을 빌려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마태복음 18장에서 탕감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받고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를 감옥으로 끌고 간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그는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다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을 다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또 빚독촉하는가 불안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때 종순일은 마태복음 18장 이야기를 들려준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 바로 나요. 내가 주님의 은혜를 1만달란트나 받았는 데 여러분에게 쥐꼬리만한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안 갚는다고 악한 짓을 했으니 나는 죄인이요. 그러다가 내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 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 준 돈은 모두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모든 빚문서를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에 따라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하고 아내와 함께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라고 강화, 석모, 주문, 웅진 등의 섬을 돌며 수 십개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은혜의 원리, “아, 나는 받은 은혜가 많구나. 이 은혜를 어찌할꼬?” 그래서 전하고 나누고 말하고 용서하고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가는 것, 종순일은 목회자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었지만 은혜의 정신으로 강화지역의 위대한 선교사 되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1900년 이전, 평양에 김씨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았는 데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라는 여종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40이 넘어 혼자 된 후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교회 나가 마태복음 18:18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가 여종을 부리고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여종을 다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니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 자매라고 했소. 그런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복섬이를 부리는 것은 마치 땅에 매는 것과 같은즉, 그러고서야 어찌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겠는가?” 그리고 김씨 부인은 종문서를 가져가 다 불태우고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종이 아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내 집을 나가도 좋다”. 그러자 복섬이가 말했습니다. “마님, 제발 저를 떠나라 말하지 말아주세요.” . 그래서 김씨 부인은 그를 양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죽은 후 딸에 많은 재산을 상속했습니다. 그 후 복섬이는 너무 김씨부인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가 받은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땅이 바로 평양신학교의 부지였습니다. 훗날 그 땅에 신학교가 세워져 수많은 영혼들을 살린 영혼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은혜, 은혜가 선교의 시작입니다. 은혜, 은혜가 전도의 시작입니다. 은혜, 은혜가 영혼구원의 시작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받았으니 백 데나리온을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은혜로 전도하고 은혜로 선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 3절에서 12절까지 이야기입니다. 2천년 전 안디옥교회에 역사하여 사람을 키우고 기도하게 하고 은혜로 선교하게 하신 성령님, 그 분이 우리 교회에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금식하다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의 일로 쓰임받은 바나바와 사울처럼, 우리의 일생도 성령의 도움과 은혜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가득한 구브로에 가서 성령의 도움으로 마술사를 이기고 우상을 악한 신을 제압한 것처럼 우리도 험한 세상, 우상을 이기고, 세상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을, 영혼의 추수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부모, 형제, 자녀, 친구, 이웃들을 마귀에게서 되찾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좋으신 성령님이 일마다 때마다 이 가을에 여러분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건강한 교회
빅인걸 목사
1968년까지만 해도 어느 나라가 1990년대 세계 시계 제조업계를 지배할까를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스위스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 때 스위스는 세계시계 시장 매출의 65%를 차지했고 이익의 80%이상을 점유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시계하면 스위스 시계를 하나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시계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무게, 방수, 방충, 디자인, 수명, 판매, 등에 대한 연구로 탄탄한 기술과 시장을 확보하였고, 시계 산업에 수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어 직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65%의 시장 점유에서 10%대로 떨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계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계적 매커니즘에 빠져서 전자공학의 새로운 매카니즘을 소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스위스인들이 귀하게 여기며 자랑하던 베어링, 기어, 매인 스프링이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전자 공학을 기초로 한(퀘르츠)수정진동 시계가 나온 것입니다. 1979년에 1981년 사이에 스위스 시계공업 제조공 63,000명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반면에 1968년에 세계시장의 1%도 점유하지 못하던 일본의 세이코 시계는 1999년대에 세계 시계 시장의 33%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뉴사텔 연구소에서“전자시대가 오므로 스위스 시계는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빨리 전자시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스프링 시계의 전통적 패러다임에 갇힌 스위스사람들은 그 말을 무시하였습니다. 지금은 스위스 시계업계도 변했지만 그 과정에 엄청난 손실을 겪었습니다.
들이 왜 그런 피해를 입었을까요? 업계 지도자들의 전략의 부재였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탐구의 요소에는 5요소가 있습니다. ❶ 영향의 요소입니다. 탐구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❷ 확산적 사고입니다.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고 능력입니다. ❸ 수렴적 사고입니다.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묶는 기술입니다. ❹ 배열화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로 연계하는 다양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형상화 능력입니다. 미래에 대하여 연구하며 새로운 모델들을 형상화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국가, 기업, 교회, 가정, 개인에게도 모두 적용됩니다. 위대한 국가, 성장하는 기업, 부흥하는 교회, 행복한 가정, 성공적 인생을 꿈꾸는 개인이 이런 전략을 가지고 앞날을 읽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에게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앞서가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주제가“건강한 교회”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를 건강하다고 합니다. 건강해야 행복이 유지되고, 건강해야 미래가 있고, 건강해야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건강은 국가, 기업, 가정, 개인 모두에게 필요한 요소이며, 특히 교회도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건강하지 못합니다. 첫째, 성장제일 주의의 폐해에 있습니다. 대형화 추세, 계층화 주도, 신앙의 보수화, 탈사회적 집단으로의 변질을 가져왔습니다. 둘째, 위화감입니다. 도농교회의 격차, 개척교회와 건축 된 교회의 격차, 중, 소형교회와 대형 교회의 격차는 양극화 현상을 부채질 합니다. 셋째, 교직주위의 경향입니다. 목사의 제사장화, 직분의 계급화, 교권주의의 폐해입니다. 넷째, 개인주의와 개 교회주의입니다. 협력, 연합, 공동체성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단과 안티 세력 앞에 흔들입니다. 건강진단을 바로 해야 치료가 가능하듯이 우리는 매일 자신의 신앙과 우리 가정, 그리고 교회를 진단하고 건강한 교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본문은 가장 건강했던 안디옥교회의 모습니다. 안디옥은 고대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기원전 300년경 셀레우코스 1세 때 건설하였으며, 최초의 기독교 중심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 이름은‘안타키아’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최초 목회자는 바나바였고, 바울 사도가 바나바와 함께 팀 목회를 1년간 했으며 이후 성령의 지시를 따라 세계선교의 교두부가 되었고, 기독교를 세계화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건강한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보겠습니다.
(1) 영성이 깊은 교회입니다.(행13:2)
“성령이 이르시되”현대 교회들 중에는 목회자가 주인인 교회가 있고, 교인이 주인인 교회가 있고, 성령이 주인인 교회가 있습니다. 원래 교회 주인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태동되었고 성장했으며, 안디옥 교회 역시 성령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모든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성령 충만했으며, 성령의 감동, 감화, 인도, 역사, 지시, 가르침, 나타남에 따라 움직인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쫓아 일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라고 하였고, 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영성이 있는 교회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이며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의 영역입니다. 영성 형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형성되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순종하고 복종하므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영성은 연구나 개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성에 대한 잘못 된 인식들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수도원주의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금욕주의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영성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고행주의도 아닙니다. 샤머니즘도 아닙니다. 영성은 성령의 임재와 내적 변화, 죄를 이기는 힘, 그리고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입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교의 전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 지붕에서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에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각종 짐승들이 가득하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에 부정하다고 하는 짐승들을 내게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느냐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보자기는 사라졌습니다. 동일한 환상이 세 번, 연이어 보였습니다. 이 때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따라 자신의 부하를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하여 보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난 후 가이샤라의 고넬료 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임하였습니다.(행10:44) 베드로는 유대인의 전통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베드로는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영성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정한 영성은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① 내적 충만(플레레스)로서 시인(是認), 즉 인정하는 사역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세주, 그의 십자가 능력, 죄 사함, 보혈의 피가 믿어지며, 그의 성육신, 죽음, 부활, 영생이 믿어집니다. 내적 충만이 이뤄지지 않는 사람은 복음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성령이 내적으로 임한 결과입니다. 플레레스가 이뤄진 것입니다. ② 외적 충만(플레스테이스)로서 능력이 부여됩니다. 플레레스는 구원의 방편이라면, 플레스테이스는 사역의 방편입니다. 플레스테이스가 임하면 은사가 임하고 시험, 대적자, 환란, 핍박, 위기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③ 생활의 열매(엘곤)로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납니다. 이는 생활의 방편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니 이런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그래서 영권은 주권에서 나오고 주권은 곧 영성인데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 즉 영성이 깊은 교회였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렇게 영성이 깊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이나 소리가 아니라 언제나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나타나심을 따라 움직일 때 건강한 교인,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 기도하는 교회입니다.(행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2)“금식하며 기도하고”(3) 안디옥 교회는 기도와 금식, 금식과 기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도와 금식은 유대교의 기도와 금식과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금식과 기도는 교리주의, 종교적 전통, 형식화 종교의 의와 자랑을 하기 위한 외식적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의 금식과 기도는 성령의 강력한 인도에 의한 결과입니다. 이 때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셨고, 나타나셨으며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과 금식하는 일, 그 외에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안면도에서 작은 농촌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 주일 저녁식사 때 한 달간 김치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사연인 즉 사모님이 주일 오후에 김치를 담가 저녁밥상에 올린 것입니다. 목사님은 화를 내며 그렇지 않아도 주5일 근무제로 인해 주일 지키기가 어려운데 목사 사모가 주의 날을 거룩히 안 지키면 어떡하느냐고 훈계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주일을 거룩히 지키란 계명을 어긴 죄, 둘째, 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죄, 셋째,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유산을 물려주지 못한 죄, 넷째, 세상 사람과 같이 주의 날을 구별하지 못한 죄를 지적했습니다. 목사인 자신은 한 달 동안 근신하며 김치를 먹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아닙니다. 옹고집 목사는 더욱 아닙니다. 모든 거룩한 것이 무너지는 세상에, 그래도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이런 목사들로 인해 기독교는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항상 본질에서 나옵니다. 신앙의 본질, 행위의 본질이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지만 주님이 기도의 본질을 잘 기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18:13-14)고 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한편 기도하는 교회, 기도 안 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인, 기도하지 않는 교인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는 교인인지를 살펴 볼 일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고, 숨을 쉬어도 불규칙하거나 숨소리가 거칠다면 질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죽은 신앙이고, 불규칙하게 한다면 병든 신앙입니다. 우리 교회는 1년 내내 새벽기도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1년 내내 금요기도회에 빠지지 않는 교인이 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2000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이 16강에만 들어가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4강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우리 국민이 전부 합심해서 응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기가 있는 날에 광화문 사거리일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선수가 한 골을 넣을 때마다 모두 일어서서 “대한민국”하고 외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뭉치기만 하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고 두 사람보다는 열 사람이 낫고 열 사람보다는 백 사람, 천 사람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우리 교회가 보강해야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할 때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가고, 변화가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며, 기적이 일어나고, 성도의 가정에 일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또 무엇일까요?
(3) 복음 전도하는 교회입니다.(행13:3)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 다음 절을 보세요.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13:4-5)고 하였습니다. 인디옥 교회는 세 사람을 보냈고, 세 사람은 전도 현장에 나갔습니다. 보내는 교회와 나가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영성이 있고, 기도가 있고, 전도가 있습니다. 영성은 있는데 전도하지 않고, 기도는 많이 하는데 전도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는 영성, 기도, 전도가 함께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전도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전도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면서 전도하지 않는다면 불균형적 신앙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전도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 역시 불균형적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세요.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그의 위에 임하였습니다. 영성이 충만했습니다. 주님은 그 길로 즉시 전도하러 나섰습니다. 그리고 새벽과 저녁에 기도하셨고,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으며, 틈만 나면 기도하셨고, 예루살렘에 오시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성, 기도, 전도가 삼박자 맞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피터 와그너는 “필요 중심적 전도”를 주장하였습니다. 전도를 하는 데는 사람마다 격차가 있습니다. 잘 하는 분도 있지만 못 하는 분도 있습니다. 성령을 못 받았거나 믿음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재주가 없거나 숫기가 없어서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한지 얼마 안 돼도 사람을 잘 사귀는 분은 전도를 잘 합니다. 그것은 개인차 때문입니다. 와그너가 말한 필요 중심적 전도는 생활 속에서 불신자들을 섬기고 그들과 항상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는 전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11월 18일 전도 페스티벌을 실시할 때, 약간 부담이 되거나 많은 부담이 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전도방법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들려 줄 수 있는 기회이므로 좋은 방법이지만 더 좋은 방법은 이웃과 관계를 잘 맺어, 강제나 억지로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전도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가 끊어지거나 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생산이 끊어진 공장, 물건이 팔리지 않는 회사, 새끼를 낳지 못하는 가축농장, 아이가 탄생하지 않는 가정,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 혹은 신앙이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는 꾸준히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결론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영성이 깊었습니다. 기도가 강력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가 모델로 삼아야 할 교회입니다. 이렇게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는데 모든 성도가 하나 되어 주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