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21
7월17일[연중 제1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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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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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Zl1KErmevo
[인천교구 김기헌 대건안드레아(청라본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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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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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huBUQDQY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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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는 꽃밭의 한 무더기 똥을 보며 꽃밭을 안다고 말한다>
가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나도 그 사람 알아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자신이 아는 단점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의 단점만 말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밭에 어떤 짐승의 똥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 똥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던 한 똥파리가 좋은 똥을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똥을 발견했어!” 꽃밭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가 그 꽃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 있는 단점들을 몇 가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꿀벌이 날아가다가 그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꿀을 발견했어!” 물론 그 꽃밭 안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는 알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본질이 ‘꽃밭’이기에 똥파리보다는 꿀벌이 그 꽃밭을 잘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습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그 습지를 보지 않고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연꽃을 보았다고 말하지 시궁창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 선한 면을 보시며 키워주십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똥파리로 만듭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보면서도 하와를 왜 만들어줘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고 한탄합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에게서 더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빛 가운데서 어둠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부모를 잘 아는 때는 언제일까요? 아이일 때일까요, 아니면 사춘기 반항의 시절일까요? 제니스 캐플런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15살 아들을 비싼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애들을 캠프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한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차로 태워다주며 그 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애잖아. 운전을 못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데려다줘야지!”
사춘기 아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엄마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커져 버리면 눈이 멀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부모가 되면 그제야 겸손해져서 부모의 마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가수 김진호 씨의 ‘가족사진’처럼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될 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불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감사하십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감사를 잊기 쉽지만, 어린이는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때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사랑을 보고 감사해야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 사랑의 선물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주시는 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사랑을 볼 눈을 잃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보아도 잘못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철부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에 집중합시다. 아는 만큼 감사해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어느 정도씩은 사랑이 있으므로 반드시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감사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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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령회에서 11월 위령성월을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죽음이란?’이라는 주제는 본당신부님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서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말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자주 듣는 말이 ‘돌아가셨습니다.’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듯이,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고, 이 세상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갔다 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를 교회는 ‘우상숭배’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예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도’는 죽은 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연도는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연도는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이를 위해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우리 형제들은 잠시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의 계약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그 교만에 마땅한 벌을 짊어질 것이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령기도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신앙인들에게 죽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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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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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같은 하느님 말씀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고해성사인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진실한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은총을 얻습니다. 같은 기도인데 어떤 이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살이로 얻은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에 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가치와 이득을 좇게 만들고, 합리와 효용을 찾게 만들기에 하느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인문학과 심리학 강의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도, 필요하거나 바라는 것이 생기기 전까지는 의미 없는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기도보다는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이 말만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다음에요, 주님.”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나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봅시다. 어린아이가 무조건적인 신뢰로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혜와 슬기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나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여기지 말고, ‘하느님 말씀이니까 오늘 꼭 실천하여 보겠다.’는 단순함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대하여 봅시다.
그리고 성체 앞에 자주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시다. 철부지가 부모 곁에 늘 머물러 있으려는 것처럼,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아무 이유가 없어도 성체 앞에 자주 머무릅시다. 하느님의 신비는 이러한 단순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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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는 소외계층이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5-27)
1)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인간 사회의 ‘기득권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철부지들’은 ‘사회적 소외계층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사업, 구원의 진리,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 나라’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는, 기득권층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보지 못하게 구원의 진리를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외면하고 안 보는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는, 소외계층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구원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고 예언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감사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제대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소외당하지 않고 똑같이 구원을 받으니 선하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2) 기득권층과 소외계층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은, ‘마리아의 노래’에 들어 있는 찬양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축복하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저주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소외계층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찬양하는 말씀이고, 또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진심으로 겸손해지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물을 내려놓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더욱더 움켜쥐고만 있다면, 심판 날에 하느님 앞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빼앗기는) 초라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그 자신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3)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라는 말씀은,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 나라에는 소외계층이 없고,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고, 힘 있는 사람도 없고 힘없는 사람도 없고,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없고,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잘못되어 있는 그 마음부터 버려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발언권이 없거나 약한 소외계층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실제로 소외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안에 소외계층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곧 기득권층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신앙인들부터 회개해야 하는 것처럼,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4)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구원사업’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당신은 완전한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시는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이고, 예수님의 뜻은 곧 아버지의 뜻이고,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를 쓰시는 것도,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을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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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우리 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 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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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때로는 아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는 선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하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게 하는 선물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그것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슬기’ 역시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지혜롭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부지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그것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찾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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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아름답고 은은하지만 그 내용은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기도! 오래간만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을 아는 이들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과 “철부지들”을 비교하시며 후자가 ‘아버지를 아는 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이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을 가리킵니다.
종교 권력을 틀어쥔 그들은 자기들만큼 하느님을 아는 이가 없다고 자부하며,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에 대해서 정통한 이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을 포함한 ‘철부지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들이 하느님을 아는 영역에 속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 본 사람들, 곧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이들은 모르는 이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오히려 아는 이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제 생활에서 하느님과 신앙,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복음이 소개하는 ‘철부지들’을 만나지 않을 때입니다. 비록 전문적인 신학과 성경의 지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삶을 거쳐 나오는 신자들의 깊은 고백은 제 교만의 해독제입니다. 그 만남은 오늘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로 저의 두 손을 모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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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11,25~27)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빠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 어느 수녀원에 미사 갔을 때 그 수녀원 복도에 걸려 있던 “나이가 들면 세상의 눈은 멀어지지만, 영적 눈은 점차적으로 밝아진다.”라는 표현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아픈 다리는 낫지 않고, 눈도 귀도 멀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마음도 굳어져 가는 듯해서 이런 저를 보면서 저도 마음이 여간 불편합니다. 작은 것인데도 예전처럼 잘 참지 못하고, 급한 성격이 더 급해지는 것 같아서(=나이 들면 다 그런다고 하던데 저만 그런가요?) 요즘 거의 말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갑니다. 혹여 대화하다 보면, 서로 불편해지지 않도록, 보고도 보지 않은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하면서 말문을 닫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고루한 관점을 마치 지금에도 맞는 것처럼, 우길 땐, 참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철부지처럼, 다만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아직은 그렇지 않네요. 하느님 앞에 작은 자의 삶과 숨은 가난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 데 그렇지 못한 저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하느님 안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전적인 신뢰와 의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11,27) 그래서 아버지를 알고 아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지적인 앎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앎, 사랑의 앎에서 오는 지혜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을 수 있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신비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11,25~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불행하다’는 예수님 말씀과 대비되고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을에선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했었으며,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앎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 병이다, 는 표현처럼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생명의 빛을 보지 않았고, 귀를 틀어막고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대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 의로움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11,27)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지식과 지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듣고 배운 것이 흘러넘쳐 오히려 부족함만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습니다. 과유불급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로써 지나친 하느님에 관한 지식 과잉이 오히려 하느님을 살지 못해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지식 과잉이 하느님보다 우선하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우위에 둘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공간이 충분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든지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자세나 가진 것이나 경험한 것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힘써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터득한 슬기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다만 예수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온전히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을 살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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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대화의 한자어를 보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alogue인데, 어원상 고대 그리스어 dia(통과하다, 사이로)와 logos(말, 말씀)에서 왔습니다. 직역하면 ‘말을 통과하다’, ‘사이로 말하다’로, 말이란 서로를 통과해서 나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쪽에서 일방적이 되어서는 대화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 하십니까? 예전에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는 공중전화 줄이 길게 서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나오고서는 길을 걸어가면서 길게 통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화로 길게 통화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메신저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메신저로 소통할 때도 유행어와 이모티콘 표현이 가득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대화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화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꼭 필요한 대화이지만, 대화가 없다 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해도 많습니다.
이런 대화 부족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잠식 기도하는 것도 어려워하며, 메신저를 통한 간단한 대화처럼 짧은 기도에만 익숙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만 마치고서는 밖으로 나가시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 곁을 떠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 짧은 만남을 통해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계속된 오해와 불통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전교 활동 가운데에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당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어렵고 힘든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범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쁘다고, 힘들다고 대화를 멈춰버리면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대화도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다면 과연 대화가 가능할까요? 대화가 되지 않고 가까운 관계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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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하라>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다.’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필요에 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커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사람,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살아온 면모가 드러납니다.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사람이 감추어진 부정이 더 많게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좋은 학군으로 위장전입을 하고, 절세를 노린 쪼개기 증여, 부모 찬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범한 이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불법으로 물질을 챙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존경받아야 할 무리에서 뻔뻔한 사람이 생각 외로 많아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는 것이 남을 등쳐먹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남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순수함을 회복하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 11,27)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 10,15)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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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으로 감사를>
마태오 11,25-2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참으로 감사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많은 것이
아닌
적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잘난 것이
아닌
못난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넘치는 것이
아닌
모자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무언가임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님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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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을 향해 마음껏 달려 나갈 수 있을 때까지>
+ 찬미예수님
아이들에게 칭찬을 할 때, 재능이 아닌 노력에 대해 칭찬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재능에 칭찬을 받아온 아이들, 예를 들면 머리가 좋다고 칭찬을 받았던 아이들은 노력한 뒤 결과가 안 좋을 것을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을 일부러 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원래는 머리가 나빴나 보네’ 라는 말보다 ‘쟤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아’ 라는 말이 훨씬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모든 일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력보다는 재능에 칭찬을 받기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입니다. 밤새 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다음 날 친구들에게 공부를 하나도 안했다고 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았다고 하고 시험을 잘 보면, ‘쟤는 공부하지 않는데 머리가 좋다’라는 기분 좋은 평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노력보다 재능에 칭찬을 받기를 즐거워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머리 좋다, 능력이 출중하다.’ 등 재능에 칭찬을 받게 되면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노력을 경시하게 되고 성적 유지의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합니다. 반면, ‘너 정말 열심히 했구나!’라는 칭찬을 받으면 그 아이는 노력을 중요시하게 되고 성적 유지의 가능성 또한 높아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은 재능이 뛰어난 이들을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부를 축적한 이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과 같이 구약의 율법을 연구하고 성실히 지켜온 이들이 이 그룹에 속합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으므로 구약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신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재능이 있었음에도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교만이었고 결국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어 도태되기에 이릅니다. 반면 제자들은 완벽한 노력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자신의 한계를 재차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서툴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로써 구원 역사의 가장 커다란 축이 됩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재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아주 높은 사람들도 아니었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학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아무런 재능 없이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노력만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앞서 말씀드린 올바른 칭찬법을 매우 잘 알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하느님께 드러내 보임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철부지와 같은 그들 안에서 이뤄졌음에 감사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성인의 전기를 읽으면서 아, 이 성인은 애초에 이렇게 타고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저는 한 없이 나약하고 여러 가지 유혹에 쉽게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저에게 재능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재능이 없으니 조금이나마 더 노력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저의 노력을 인정해 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가끔은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교만할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행할 때 기도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먼저 저의 지혜를 내세워 판단하고 결정짓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있을 때 예수님의 복음은 빛을 잃고 그 자리에는 저라는 인간만 덩그러니 놓여있음을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아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남들처럼 두발로 걷고 싶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뒤뚱거리며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러다가 또 넘어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단번에 일어서서 걷는 아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평균 2,000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섬을 반복할 수 있는 이유는 넘어지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되는 행동만이 답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난 걸을 수 있는데 노력을 안 하는 거예요’라고 중얼거리며 계속 누워만 있다면 그 아이는 평생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미움과 안락함과 사소한 질투와 물질적인 것들의 유혹 속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특출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할수록 노력을 귀중히 여기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수없이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재능은 필요 없고 노력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노력을 모두 알고 계시며 그 모습을 오히려 귀중히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몸을 돌리는 그 순간,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그 순간, 첫걸음마를 떼는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팔을 벌리고 계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재능이 아닌 노력에 뜨거운 격려를 보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부모에게 의탁하는 자세로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우리는 분명 언젠가 주님을 향해 마음껏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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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종, 주님의 도구’인 우리들>
-거룩한 철부지의 삶-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마태 11,25)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그 어디든 가까이 내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선택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면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자신에게 떳떳하게 행동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어른이 되고, 일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다산>
다산의 말씀도 멋집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일 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때 참기쁨, 참행복의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군자는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형제에게 탈이 없는 것,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맹자>
역시 맹자다운 말씀으로 주님의 종으로서 손색이 없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닮고 싶은 것은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부끄러움없이 하늘을 바라볼수 있다면 참행복한 주님의 종들입니다. 자주 자신을 성찰하라고 눈들면 어디나 하늘입니다. 18년전 “언제나”라는 고백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언제나
높이보다는 깊이를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드러나기보다는 드러나지 않음을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시끄러움보다는 고요함을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을
부수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이는 것보다는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라!”-2006.
이에 앞선 “수묵화水墨畵처럼” 이란 글도 마음이 끌립니다.
“천연색 사진보다
빛과 어둠이 신비로이 조화된
흑백 사진이 좋듯이
천연색 마음 들떠 가볍게 하는 봄, 여름, 가을 풍경보다는
수묵화처럼
깊고 고요한 넉넉하고 편안한 겨울 풍경이 좋네.”
이래서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는 수도승들은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는가 봅니다. 문득 나이 50이 넘으니 겨울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수녀의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도구로서 묵묵히, 겸손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제분수를 모르고 기고만장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바로 제1독서, 하느님 징벌의 도구인 아씨리아가 제 분수를 많이 벗어났고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에 이어지는 분수에 넘친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질책이요 이와 아랑곳없는 무지한 아시리아의 자기확신입니다. 의인화된 아시리아 제국의 교만한 행태가 오늘의 제국을 보는 듯 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하느님을 망각한 제 분수를 잊은 교만한 제국의 행태요, 정말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습니다. 지도자의 외로움과 고독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각계각층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은 정말 기도해야 할 난세중의 난세입니다. 다시 제분수를 잊은 아시리아의 건방진 행태에 대한 주님의 신랄한 질책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아시리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겸손한 종, 주님의 참 좋은 도구인 예수님이 우리가 본받을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앞서 무도無道하고 사악한 불신의 세 도시를 꾸짖던 자세와는 판이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일한 감사기도이자 찬양기도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당대의 제자들은 바로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란 젊잖은 호칭이지만 원래 아람어는 “아빠”입니다. 얼마나 아빠 하느님과 친밀한 부자관계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종으로, 도구로 살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바 하늘나라의 신비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는 일상화된 감사찬양기도의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같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 ‘거룩한 바보’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
참 마음 설레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야 말로 참행복, 참부자, 참자유인입니다. 역설적으로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살 줄 하는 진짜 지혜로운 자들은 철부지 제자의 삶을, 주님의 충실한 종의 삶을 원할 것입니다. 이어 우리가 평생 추종하는 예수님의 신원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은혜로이 계시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에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삶의 참보물이자 참행복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종이자 도구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 갈수록 날로 거룩한 철부지의 삶, 겸손과 온유, 감사와 찬양의 삶, 주님의 충실한 종이자 도구로서의 삶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은총이 날로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줍니다. 늘 바쳐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좋아하는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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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안다는 모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제 생각에 대표적인 교만이 바로 내가 옳다는 교만과 안다는 교만입니다.
진정 올바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올바르지 않으면서 옳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비유를 가지고 비판하셨지요. 바리사이와 세리가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오, 하느님!’ 하며 둘 다 하느님을 불렀지만 누가 실제로 기도했고, 하느님을 뵈었습니까?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 앞에 있었고,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교만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안다는 교만, 곧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교만인데 마찬가지로
진정 하느님을 잘 알고 진정 지혜롭고 슬기롭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서 잘 안다고 더 나아가서 다 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지요.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곧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지혜는 겸손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잘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인데, 자기를 잘 안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때 모르는 것을 물을 겁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반대로 자기는 잘 알고 있으며 다 안다고 자신하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잘 알고 다 안 결과가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행히 이렇게 교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고 다만 땅에서 교만하고 그래서 땅만 보고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할 바에는 얼치기로 겸손하지 말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이 제대로 겸손해야 합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귀찮을 정도로 모든 것을 물어댑니다.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손주와 그 할머니와 함께 어디를 간 적이 있는데 가는 내내 눈에 보이는 족족 할머니에게 그것이 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런데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모르고, 그래서 모든 것을 묻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주님 말씀을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알고 일부 아는 것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안다는 모름이 나의 교만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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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6)
<단순함의 덕!>
오늘 복음(마태11,25-27)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나고, 철부지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철부지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고,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철부지들인가?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 앞에 벌어진 사건이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영(靈)이 맑고 깨끗한 사람', 곧 '단순함의 덕(지혜)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지칭한 것인데, 그들은 진짜 지혜가 아니라 지혜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말재간'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많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참지혜인 단순함의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말이 적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 8,2)
철부지들이 됩시다! 단순함의 덕, 단순함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철부지들이 됩시다!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언제 어디서나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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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VMkHtSdr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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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철부지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철부지들도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철부지에게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철부지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가 모두 사랑 속에
살고 있음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가 우리의
마음을 닦아줍니다.
철부지의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볼 수 있는
우리이길 기도드립니다.
작고도 단순한
삶의 기쁨을
철부지들에게
배우는 행복한 날
되십시오.
즐겁고 신나는
철부지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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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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